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의 연주곡 ‘새들의 노래’는 온갖 새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캐럴 곡이다. 그런데 마치 장송곡같이 어둡고 슬픈 느낌이 난다. 조국 카탈루냐를 독재자 프랑코에게 빼앗긴 카잘스의 마음엔 즐거운 새들의 노래조차 슬픈 마이너 코드처럼 들렸나 보다. 얼마나 조국의 독립을 바랐으면, 그는 이 곡을 연주하기 전 “하늘의 새들이 평화, 평화라고 노래한다”고 하였을까! 그러나 한 천재 음악가의 감정 이입이 아니라 실제 우리 주위의 수많은 동식물이 죽어가며 슬픈 목소리로 절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사라지기 전에 인간에게 전해 줄 메시지를 전하고 간다. 마치 죽어가면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래로 던지고 간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963)처럼 말이다.
혐오와 폭력, 그리고 복수
때로는 인간의 편견이나 고정 관념들이 섬뜩한 광기를 동반한다. ‘유대인은 나쁜 인간들’이라는 편견이 나중에는 유대인과 같이 살 수 없다며 폭력으로 이어졌듯이 ‘야생 동물은 무섭고 더럽다’는 고정 관념도 그런 식으로 폭력으로 이어져 왔다. 지렁이 한 마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 밟아 버리고, 스쳐 지나가는 쥐 한 마리에도 비명을 지른다. 이런 태도는 어렸을 때부터 학습되고 주입이 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이 뱀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뱀을 악하고 무서운 존재로 교회에서 배워왔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뱀에 대한 두려움이 신앙처럼 고정된다. 다른 벌레들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많은 벌레가 율법에 의해 부정한 것으로 불린다. 베드로조차도 벌레를 먹으라(이방인에게 선교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 번 거절할 정도로 그 잘못된 신앙과 같은 고정 관념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했다. “어린양과 사자들이 뛰어놀고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이사야 35장)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매일 자연을 대하는 게 내 직업이다 보니, 이 말씀이 전혀 비현실적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한 대학에서 아이들에게 뱀에 대한 편견을 실험한 적이 있었다.
이미 뱀에 대해 학습된 3세 이상의 아이들은 뱀을 무섭다고 피하였으나, 겨우 젖을 뗀 3세 미만의 아이들은 전혀 뱀을 무서워하지 않고 접근하였다고 한다.
잘못된 학습에서 비롯된 우리의 편견이나 고정 관념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뭇 심각하게 봐야 한다. 즉 내가 마주하는 대상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의 반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피조물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 관념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결코 아니고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 것이라 가인의 후손의 통치 방식(폭력)이 반드시 수반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이 이렇게 편견에서 혐오와 폭력으로 파괴되어 왔다.
인간은 자연에 감당치 못할 폭력을 행사해 왔다. 대표적인 예가 모기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하게 되돌아왔다. 모기는 치명적인 지카 바이러스, 말라리아, 일본 뇌염, 뎅기열,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 같은 바이러스를 옮겨 연간 7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다. 그래서 엄연한 해충으로 분류되어 왔다. 그래서 사용된 최고의 살충제가 DDT이다. 우연히 개발되었지만, 후에 모기 살충제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1930년대 이후 DDT를 사용한 국가(베네수엘라, 인도, 아프리카 국가 등)에서 말라리아 환자가 사용 이전에 비해 수천 수만 배로 줄어들었다. 모기만이 아니라 개미, 거미, 진드기, 벼룩, 빈대, 심지어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해충까지 완벽하게 제어하여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널리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후 30여 년이 지나지 않아 그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에서 DDT와 그 이상의 독성이 있는 살충제의 무분별한 살포로 각종 벌레가 사라지고 이를 먹이로 하는 새들이 오염되어 멸종되고 있었다. 새봄이 되어도 새들의 지저귐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1962년 미국의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 Carson, 1907-1964)이 쓴 침묵의 봄(Silent Spring)에 이런 폐해의 경고가 잘 드러나 있다. 1991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세계 각국 사람의 체내에 DDT를 비롯한 각종 농약 성분이 발견되었고 남극 지방의 펭귄이나 크릴 새우에게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우리가 매일 먹는 달걀에도 농약이 남아 있으니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지난 50년 동안 전 세계 동물의 68퍼센트가 사라졌다. 아마존 열대우림 지대의 광산 개발, 대규모 경작지 개발로 라틴아메리카에서 94퍼센트의 동물이 사라졌다. 식물들의 수분 매개 역할을 하는 동물들이 급격히 사라지자 식물도 40퍼센트 넘게 멸종 위기에 처했다. 식물은 동물의 먹이다. 식물이 없으면 동물도 살 수 없다. 연쇄로 자연이 무너지고 있다. 말을 못 하는 자연은 그렇게 죽음으로 인간에게 되갚아 주고 있다. 여전히 돈을 섬기는 시장 숭배자들에게 자연은 막대한 재산과 생명의 피해로 돌려주고 있다. 뛰는 농산물값, 물과 불로 휩쓸려 가는 산림, 온대 지역 열대화에 따른 열대 박쥐들의 온대 지역 출현,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 세상…. 수백만의 생명이 사라졌고 도저히 온전한 정신으로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자연이 인간의 폭력을 제대로 되갚아 주고 있다.
세상은 사랑을 노래하며 그렇게 죽어간다
뜬금없이 한 가수의 이야기를 해야만 될 것 같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듣자면 고통이 함께 따른다. 그녀의 삶을 알고 나면 더 그렇다. ‘팬텀싱어 시즌 4’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오.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한 테너 가수가 너무 멋지게 불러 그녀의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까지 찾아 듣게 되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달이라도 따오고, 큰 돈이라도 훔치고, 조국도 친구도 버릴 수 있어요. 그대가 원한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어요.” 이 노래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비행기 추락 사고로 잃고 도저히 더는 노래할 수 없었지만, 다시 노래하기로 결심하고 작사한 곡이다. 그녀의 다른 노래, ‘장밋빛 인생(Ra Vie en Rose)’도 그렇고, 가사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1차 세계대전 중 원하지 않는 아이로 태어나 영양실조와 치명적인 병을 견디고 살아온 그녀, 사랑하는 사람의 배반, 그리고 사별과 이별, 여러 번의 교통사고로 인한 고통,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시작한 모르핀 치료, 그리고 모로핀 중독으로 죽음까지…. 그래서 분명히 희망차게 사랑을 노래해도 슬픈 탄식의 노래로 들릴 뿐이다. 슬프지만 그래도 사랑을 노래하니 사랑의 노래다. 카잘스의 새들의 노래가 아무리 우울하게 들려도 새들의 노래인 것처럼….
사람들은 그녀를 ‘노래하는 피아프(참새)’라고 불렀다. 이 별명이 그녀의 이름이 되었다. 에디트 피아프처럼 새들도 분주하게 하늘을 날며 짝을 찾아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풀벌레도 허공을 향해 구애를 하고 공작도 사랑의 날갯짓으로 사랑을 갈구한다. 새들이 울면 천적에게 자기 위치를 노출해 위험에 빠진다. 그래서 들키지 않으려고 아직 어두운 새벽에 그리 울어 댄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연장된 삶에 필요한 언어들을 허공에 지저귄다. 죽음을 무릅쓰고 하는 얘기라 고되고 힘들지만, 새끼들과 연인들을 향해 염려하며 부르는 사랑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 죽음의 위협 속에 다른 할 얘기가 없다.
피아프는 남자에게 배반당하고 피해를 보고 죽어가면서 또 다른 남자를 향한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죽어갔다. 인간은 자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살려 내야 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죄성을 가진 타락한 존재라도 하나님의 형상과 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속성을 지녔으니 자연이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결국은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사실 인간이 다 사라져도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리석은 자연은 끝까지 인간에게 희망을 걸어본다. 에디트 피아프처럼…. 그래서 동물들은 생명의 위협에 처하면 사람에게 도움을 구한다. 상어에게 쫓기는 물개가 어선에 뛰어들어 살려 달라고 갈구하고, 낚싯바늘에 걸린 상어가 잠수부에게 다가와 입을 벌려 도움을 찾는다. 혹한에 처한 다람쥐는 사람이 사는 집의 문을 두드리며 쉬어 가며 먹을 것을 달라고 한다. 갈증에 지쳐가던 커다란 코브라가 입을 벌려 사람이 주는 물을 받아먹고 얌전히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간다. 길 잃은 새끼 사슴이 마음씨 착한 아저씨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그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비며 애정을 표시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서 틈틈이 찾아와 고맙다고 표현한다. 어린 까마귀를 돌보아 주자 이 까마귀는 빛나는 돌, 유리를 물어와 사람에게 은혜를 갚는다. 병에 머리가 낀 붉은 여우가 제 발로 사람을 찾아와 도와 달라고 청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인간은 자기 체험적인 선지식에서 다른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야 ‘이 나무의 열매를 먹어 이제 죽게 되었구나’ 하는 식이다. 플라스틱을 개발하고 200년이나 지나서야 ‘이것을 써보니 해양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우리 몸은 병들어 죽게 되는구나’ 하는, 아담의 후예다운 탄식이다. 온갖 벌레와 새들이 그 지구의 위기를 노래로 말해주고 도와 달라고 해도 전혀 모르다가 인류가 멸망하게 되어서야 그 비참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만물의 탄식은 구원을 향한 몸부림인 게다.
자연은 인간을 찾아와 애타게 자기들의 언어로 무엇인가 호소하고 탄식하다가 어디로 자취를 감춰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피아프가 사랑을 노래하며 사라져갔듯이 자연도 죽어가며 사랑과 구원의 노래를 부른다. 어찌 이 노래를 들으며 기도하지 않고 잠들 수 있을까…. [복음기도신문]
필립정 | 필립정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BA),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MDiv), 미국 Talbot School of Theology(MA, 목회 상담)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청소년 영어 담당 사역자와 이민 1세대 교회의 목회자로 섬겼다. 현재 Go Eco Pest Control 회사 대표이며,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과 야생 동물의 관계를 연구하여 달라스 DKNET 방송국 고정 게스트와 달라스 부동산 라이프 기고자로 활동하고 있다. 인간과 벌레의 교감을 다룬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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