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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칼럼] 대체신학 이슈와 새 예루살렘 연구(1)

▲ 통곡의 벽. 사진: Unsplash의Snowscat

-통곡의 벽과 세 그룹을 중심으로-

복음기도신문은 아신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중동연구원 정형남 교수의 논문 “대체신학 이슈와 초림 예수의 즉위 연구”를 <대체신학인가, 성취신학인가>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다(2021.7.3~21). 또한, <대체신학 이슈와 열두 사도 연구>[1], <대체신학 이슈와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연구>, <대체신학 이슈와 “온 이스라엘”(롬 11:26) 연구>를 각각 연재하였다(2021.7.24~2022.5.1).[2] 이제 그의 <대체신학 이슈와 새 예루살렘 연구>를 연재한다.<편집자>

목차

I. 들어가는 말
II. 통곡의 벽과 관련된 세 그룹
1. 이슬람교
2. 유대교
3. 예루살렘 중심적 기독교
III. 새 예루살렘 중심적 기독교
IV. 나가는 말

I. 들어가는 말

최근에 대체신학 이슈를 제기하는 자들이 꽤 많다. 다음은 “대체신학”과 더불어 표현되는 강의나 글, 또는 책의 제목들이다.

“악”, “마귀”, “허구”, “거짓”, “누룩”, “성경”, “베일”, “위험성”, “이스라엘”, “오류와 모순”, “깨어나라”, “불편한 진실”, “루터와 히틀러”, 마귀의 신학”, “사탄의 장난”, “사탄의 전략”, “회복신학으로” “강탈, 도둑 신학’”, “이스라엘을 열라”, “사탄의 최대의 걸작품”, “이스라엘을 못 보게 만든 신학”, “교회에 스며든 사악한 교리 중 하나”, “한마디로 웃기지도 않는 신학”.

 이와 같은 제목으로 유튜브 등을 통해 진행되는 강사들의 열정과 시청자들의 반응이 매우 뜨겁다. 그들은 곧 예루살렘 중심적 기독교인들로서 이스라엘 회복 운동을 하는 자들이다. 필자는 그들을 편의상 “대예기”(체신학 이슈를 제기하는 루살렘 중심적 독교인들)라고 칭하고자 한다. 대예기는 그들과 대조되고 비교되는 새예기( 루살렘 중심적 독교인들)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대예기는 성경 예언 성취의 주인공은 이스라엘이라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신학이 교회로 하여금 그 주인공을 교회 자신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대체신학을 최초로 정립한 신학자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으로 시작된 종교개혁도 대체신학의 범주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이 대예기의 주장이다.

구약 성경에 “대체”라는 개념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체 제물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직전에 등장했다(창 22:9~10). 그 정체는 두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이었다. 이 숫양이 바로 이삭을 대신하는 대체 제물이 되었다(창 22:9~13). 그 제단이 위치한 곳은 바로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이었다(창 22:2).

유다왕국의 초대 왕 다윗은 모리아 산을 성전 터로 확정하였다(대하 3:1). 그의 아들 솔로몬이 그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집으로서 성전을 건축하였다(주전 959년, 왕상 6:1~38). 이 성전은 바벨론 제국 황제 느부갓네살에 의해 파괴되었다(주전 586년).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 황제 고레스의 칙령으로 성전 재건이 허락되었다. 그리고 주전 516년에 완공되었다(주전 516년, 스 6:16~22). 그러나 이 성전은 헤롯 대왕(주전 37~4)에 의하여 대폭 확장되었다. 이 확장 공사가 개시 83년 만인 주후 63년경에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헤롯 성전은 약 7년 후에 로마제국의 디도 장군에 의하여 전소되었다(주후 70년).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라고 하셨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라고 반문하였다(요 2:20). 이 성전이 주후 70년에 전소되었던 헤롯 성전이다. 그러나 서쪽 담벼락은 전소되지 않고 남았다. 이 담벼락이 바로 이른바 통곡의 벽이다.

이 통곡의 벽을 붙들고 기도하는 두 그룹이 있다. 하나는 유대교들이다. 또 하나는 그들의 친구라고 자처하는 대예기이다. 최근 대예기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의 때가 임박했다고 크게 기뻐하고 있다. 그 증표 하나가 곧 이스라엘의 미국 대사관이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바로 이 시대의 고레스라는 것이다.

현재 예루살렘의 옛 여호와 하나님의 집터에는 이슬람교의 두 건물이 있다. 하나는 바위 돔 사당이고, 또 하나는 알아끄사 사원이다. 무슬림들은 그 바위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승천과 더불어 이슬람교의 신앙고백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 메카의 하람 사원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드리고 있다. 그들은 이 제물이 아브라함의 대체 제물의 본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 절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에 비추어 볼 때, 유대교도들과 대예기는 이사간 옛 처갓집 말뚝에 절을 하고 있다. 옛 처가집의 현 주인은 바로 무슬림들이다. 통곡의 벽은 곧 이사간 옛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 남겨진 말뚝이다. 처갓집 식구들은 옛집에 대하여 전혀 미련이 없다. 그들은 훨씬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하여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따르면, 대체제물의 실체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는 이 사실을 성찬식 등을 통하여 천명한다. 이는 곧 교회 공동체가 “회복된 이스라엘”이요, “새 이스라엘”이요, “참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현재 집”이라는 뜻이다. 이 집은 현재 공사 중이다. 이 공사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그 완성품이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이다. 곧 교회 공동체가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새예기(새 예루살렘 중심적 기독교인들)의 신학이다. 따라서, 새예기는 이사간 옛 처갓집 말뚝과 같은 통곡의 벽에 절을 하지 않는다.

대예기가 아니라 새예기가 옳다는 것! 그리고 새예기의 신학은 대체신학이 아니라 성취신학, 실체 신학, 확장 신학임을 입증하는 것이 본고의 목표이다. 대예기는 새예기로 거듭나야 한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1] <대체신학 이슈와 열두 사도 연구>는 <대체신학 이슈와 사도 베드로 연구>라는 압축 버전으로 ACTS 중동연구 2022에 발표되었다.

[2][정형남 칼럼] 대체신학 이슈와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연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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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 전 아신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교수 및 GMS 아랍권 선교사(천안장로교회 파송. since 1989). 그의 책으로 『이슬람과 메시아 왕국』CLC, 2009)과 아랍권 및 이슬람권 선교와 관련된 여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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