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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목사의 도덕적 실패 뒤에는 나르시시즘이 있는가?

사진: Михаил Секацкий on Unsplash

자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느끼는 게 바로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다

왜 최근 몇 년 동안 그토록 많은 교회 지도자가 도덕적으로 실패한 걸까? 거기에 관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현재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When Narcissism Comes to Church(나르시시즘이 교회에 들어올 때)를 쓴 척 디그로트(Chuck DeGroat)는 대중의 높은 인지도를 즐기는 목회자 사이에서 특히 흔한 게 나르시시즘이라고 지적한다. 자기애에 빠진 사람일수록 권력과 존경과 무대를 갈망하고, 또 교회는 자기애에 빠진 유명 목사를 선호한다. 그런 나르시시스트일수록 사람을 “반짝이게(glittering)” 하는 “자신감과 강력한 지도력, 명확한 비전”으로 가득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디그로트는 말한다(1장과 4장). 

공감 능력이 부족한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낙담에 빠트릴 수 있다. 필요할 때는 온갖 매력을 발휘해 자기 사람을 만들려고 하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내친다. 그러면서도 자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느끼는 게 바로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다. 

따라서 누군가 나르시시즘에 빠진 목사에게 회개를 외치면, 그저 무의미한 공격으로 여겨지고 만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분노가 쏟아진다. 한편으로 나르시시스트의 매력과 능력으로 이익을 얻은 교회는 그런 목사를 비호하기 마련이다. 

그럼 디그로트는 과연 목회 실패의 원인을 제대로 찾은 걸까? 모든 사람에게 결함과 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교회에도 결함 있는 지도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진짜 물어야 할 것은 권력에 굶주린 사람과 나르시시스트가 교회에 특히 더 많은지의 여부이다. 

에고의 문제 

성경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 이기주의자를 비난한다. 예수님은 지위와 권력 추구에 몰두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지적했다. 마태복음 23:1-15에서 예수님은 남자들이 영적 지도력이 가져다 주는 (예를 들자면 “랍비”와 “아버지” 같은) 지위와 권위와 타이틀을 추구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디모데후서 3:2-4에서 바울이 열거한 악덕 목록을 보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게 다름 아니라 자기 사랑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시작과 끝이 거짓 사랑이라는 점에 주목하라.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과 돈과 쾌락을 사랑한다. 도널드 거스리(Donald Guthrie)는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모든 도덕적 부패는 잘못된 사랑에서 비롯한다.” 나르시시스트 목회자에 대한 오늘날의 강조가 유행에 불과하고 또 과장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바울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우선하는 이기주의자를 비난한다. 바울이 언급한 악덕, 교만과 욕설은 확실히 이기주의의 열매처럼 들린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 자기애의 결과인가? 

나르시시즘은 확실히 나쁜 품행이며,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목사도 얼마든지 그 유혹에 굴복할 수 있다. 그런데 특히 교회에 특히 나르시시스트가 많은 게 사실일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디그로트는 성격 테스트 결과 “대부분의 목회직 후보자”가 “자기애, 나르시시즘을 특징으로 하는 성격 장애”의 스펙트럼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르시시즘의 비율이 그중에서도 “교회 개척자들 사이에서 훨씬 더 높다”(19)고 덧붙인다. 왜 그럴까? 디그로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사역은 나르시시즘의 성격을 끌어들이는 자석과도 같다.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면 그 누가 매주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고 싶겠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대중 연설을 힘들어한다. … 그런데 그것을 정기적으로 또 ‘신의 권위’로 하는 사람들이 바로 목사이다”(19).

나르시시즘에 대한 디그로트의 작업은 나르시시스트와 함께 사는 사람 또는 나르시시스트 지도자와 싸우는 사람에게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교회에 나르시시즘이 만연하다는 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르시시즘 성향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상 대부분의 선지자, 사도, 교사, 설교자가 다 나르시시스트였다는 말인가(엡 4:11-16)? 디그로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르시시스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목사를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시에 모든 설교자의 동기에 의문을 제기함으로, 사실상 “경건한 설교자”라는 말 자체를 모순어법으로 만들어버린다. 

성경은 설교자의 동기를 달리 이야기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을 준비시키고 부르시면 전파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고후 5:20).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별하여 그분을 위해 설교하고 권위를 가지도록 하셨다(행 5:429:15롬 10:14-15). 그래서 바울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소심해서 문제가 되었던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딤후 4:2).

목사에게는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필요하다 

일부 교사와 설교자가 나르시시스트라는 건 확실하다. 마이크 코스퍼(Mike Cosper)는 마크 드리스콜(Mark Driscoll)과 마스힐 교회(Mars Hill Church)의 몰락에서 나르시시즘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훌륭하게 설명했다. 그뿐 아니라 다른 많은 목사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이고, 그러면서 교인들을 유혹하고, 또 권력을 남용했다. 나르시시즘과 도덕적 실패에 대한 우려가 성품보다 재능을 더 중시하는 교회에 경종을 울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건전한 비판이다. 더불어서 그 비판이 한편으로 특권을 놓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혹하게 상대를 비판하는 데에 여념이 없는 상처 주는 목사를 경계하기 위해서라면, 그것 역시 교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의 초반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역은 자기애의 성격을 가진 사람을 끌어들이는 자석이다.” 나중에 그는 나르시시즘 스펙트럼에는 공감, 겸손, 호기심뿐만 아니라 “확신이 아닌 자신감”을 특징으로 하는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36). 디그로트가 목회 후보자의 “대다수”가 나르시시스트라고 주장한 직후에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언급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목하고 설명하지 못하면 독자들이 목회 리더십을 의심하게 될 위험이 있다. 

어네스트 베커(Ernest Becker)가 말했다. “실무 수준의 나르시시즘은 자존감 그리고 기본적인 자기 가치감(self-worth)과 분리할 수 없다.” 심리학자들은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적절한 자기 보호, 주체 의식, 적절한 자존심, 그리고 계획을 세우려는 의지와 연결한다. 

물론 “건강한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이것보다 더 나은 용어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도자에게는 건강한 자존감이 필요하다. 외과의, 정치인, 프로 운동선수, 최고경영자에게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이 세계에 자신이 뭔가를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기 위해서는 자아의 힘이 필요하다. 지도자에게는 자신의 역량,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사명에 대한 감각이 필요하다. 

각종 비난과 반대, 질질 끌기, 사보타주, 그리고 수군거림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목사에게는 그 누구보다 더 큰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 자신감이 “건강한 나르시시즘”의 한 측면이라면, 목사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그 어떤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있어야 한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책 후반부에서 디그로트는 “누구나 나르시시즘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라고 말하며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탐구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167-70). 나르시시스트를 끌어들이는 분야로 의학, 엔터테인먼트, 스포츠, 미디어, 법 집행, 정치, 기업 리더십, 종교 리더십 및 학계를 언급하는 자료가 차고 넘친다. 대중을 이끌거나 연설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신감과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 “목사의 도덕적 실패 뒤에는 나르시시즘이 있는가?” 그리고 “나르시시스트가 교회에 특히 더 많은가?” 이제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많은 분야에서 도움이 된다.” 그리고 “리더라면 누구나 자신감과 사람들을 얻는 능력을 오용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동시에 얼마든지 그러한 유혹에 맞서서 싸울 수 있다.” 

관심의 중심이 서는 데 목을 매는 설교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디모데와 많은 선지자(이사야 6장예레미야 1장아모스 7장)는 아예 하나님을 대변해서 말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했다고 고백하는 목회자가 지금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설교는 오히려 자기 의심과 자기 비판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그들이 버티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시스트 목사가 있는 것도 맞다. 그러나 목회 사역에는 다른 위험들도 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젊은 목사들이 적지 않다. 최근 내가 이끄는 신학교에서 행한 자기 평가 결과를 보면, 요즘 목회 후보자들은 권력과 스포트라이트를 얻기보다는 오히려 피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많은 목회자가 그러했듯이, 그들도 하나님 안에서 강인함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의 대사(고후 5:20)라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이는 올바른 것이고 또한 꼭 필요하다. [복음기도신문]

목사에게는 그 누구보다 더 큰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

댄 도리아니 Dan Doriani | Center for Faith and Work  St. Louis의 설립자이자 사무총장이다. TGC 이사이며, Work: Its Purpose, Dignity, and Transformation의 저자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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