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중반에 건강이 나빠졌다. 수면 문제, 정신 문제, 큰 어깨 부상과 수술, 그리고 희귀한 편두통까지 빠르게 또 연속해서 나를 덮쳤다. 고통은 무려 5년이나 이어졌고, 때때로 도무지 나을 거 같지 않다는 절망에 빠지곤 했다.
나는 고통이 시작한 그 계절을 희망적인 전망으로 시작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또 신앙 공동체를 찾았다. 그런데 몇 달 만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새벽 4시에 차 안에서 하나님께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고,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엄두가 나지 않아 이불 속에 숨었다. 비참함 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
잘못 자리 잡은 소망
돌이켜보면, 가장 큰 문제는 영적 피로와 혼란이었다. 일부는 내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대부분은 내가 신학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난의 계절이 시작하기 몇 년 전, 나는 구원에 대한 칼빈주의적 이해를 오로지 머리로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 진리를 실생활에 적용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고난을 잘 감당하게 하는 능력을 무너뜨리는 교묘한 거짓 아래서 활동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 매달리고 믿음을 잃지 않는 게 내게 달렸다는 사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 무엇보다 “충분히 또 넉넉하게”(good enough)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성경에는 끝까지 견디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고대하라는 수많은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신실함보다는 신실할 수 있는 나의 능력에 있었다. 나는 칼빈 학자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의 가르침에 대한 단순한 이해만으로도 나의 잘못된 생각이 드러났고 결국에는 큰 소망을 갖게 되었다. 고난 중에 도움이 되었던 많은 교리 중 두 가지만 언급하겠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에게는 그가 결정하신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가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했다. 하나님께 감히 그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누가 하나님을 잔인하다고 판단하는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한다. 게다가 나는 하나님이 나의 선을 위해 자비롭게 일하시며, 또한 죄인들에게 관대하시다는 약속을 받았다.
나의 가장 암울한 순간에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위로가 아니라 더 큰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친구가 남긴 믿을 수 있는 상처였다(잠 27:6). 그의 주권이 없다면, 나의 고통에는 목적이 없고, 그것은 결국 훨씬 더 나쁜 운명을 초래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가 나의 고통을 의도적으로 허용하거나 심지어 야기했다는 것까지도 받아들임을 의미했다. 그건 어려웠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고 그를 선하다고 고백하는 것은 소망과 기쁨의 길이 되었다. 하나님이 내 삶을 마구 명령하신다고, 내 마음대로 우기는 것은 오로지 분노와 의심을 가져다줬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나는 자유를 느꼈다. 나의 시련이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반증”하는 힘을 갖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모든 고난이 궁극적으로 나를 더 그리스도를 닮게 하기 위한 것임을 발견했다(벧전 1:3-9). 이런저런 삶의 기복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주권이 나의 든든한 터가 됨을 발견했다.
성도의 견인
구원은 은혜로 받았지만 거룩하게 할 책임은 내게 있다고, 어린 시절부터 나는 암묵적으로 배웠다.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고, 심지어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나중에는 건강 문제로 인해 화가 나고 낙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믿음이 약해져서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잃을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달콤한 교리로 나를 인도했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이것은 무조건적 선택(내게는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 외에 내가 구원에 기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과 불가항력적 은혜(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나는 무조건 구원받음)를 포함한 몇 가지 다른 교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종합해보면, 이 교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구원은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또는 내가 얼마나 많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를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적 씨름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전하다는 것이다. 나의 안전은 나 자신이 아닌 외부에 달렸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운 시기일수록 더 믿음을 키우고 그리스도께 매달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나의 안전은 내가 완벽하게 고난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나를 대신하여 완벽하게 고난을 당하신 유일한 분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의 손에서 그 누구도 나를 빼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와 의심이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었다(요 10:28-30).
변화
끔찍한 세월을 거치면서 내 기도와 예배가 바뀌었다. 나는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핑계로 그를 믿지 않는 불경한 죄를 포함한 모든 죄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이해했다. 믿음과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선물이라는 것을 더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또 연약함 속에서 오히려 내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더 커졌음을 깨달았다.
전보다 더 커진 인내와 믿음으로 앞으로의 시련을 이겨내길 바란다. 그러나 더 큰 위로는 내 믿음이 부족할 때도 주님께서 여전히 나를 붙드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모든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셨다. 나의 인내는 나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함으로 보증된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사랑 앞에서는 고통의 칼날도 무디어진다. 심지어 내가 품은 의심이나 시련 그리고 죄조차도 그 사랑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롬 8:35-37). [복음기도신문]
제인 스토리(Jane Story) | 제인 스토리는 대학생선교회(Cru)의 캠퍼스 간사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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