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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조용선 칼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고래와 우리의 성격, 그리고 빌립보서

출처: pixabay

(빌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래는 잠 잘 때 어떻게 숨을 쉬는가?

나는 고래가 숨을 쉬는 동물인데 바다에서 어떻게 계속해서 살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활동을 하고 나면 잠을 자야 한다. 고래도 활동을 하고 나면 피곤할 것이고 그러면 인간처럼 잠을 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래는 뇌가 두 개라고 한다. 그래서 한쪽 뇌가 의식을 끄고 쉴 때에 다른 쪽 뇌가 활동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다에 사는 포유류 생물체에 환경에 알맞은 창조를 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뇌는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이다. 그래서 인간은 뇌가 쉬기 위하여 잠을 자게 된다. 인간이 잠을 잔다는 것은 단지 뇌가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몸도 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바쁜 세상에 인간의 뇌도 고래처럼 두 개였으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소망을 들어 주었으면 한다. 예를 들어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서 빨리 돈을 벌어 형편을 좋게 해야 하는 경우가 그럴 것이다. 그런데 뇌가 두 개이고 이것을 번갈아가면서 사용한다고 해도 사실은 우리의 몸이 24시간 활동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뇌만이 아니라 몸도 쉼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의 몸이 24시간 쉼 없이 노동을 하게 된다면 인간은 몸의 피로로 인하여 질병이나 몸의 고장이 찾아오든지 아니면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고래와 인간의 활동을 비교해보면 두 개의 뇌를 사용하면서 평생 몸을 사용하는 고래는 그 활동이나 행동이 몸에 해를 줄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바다에서 유유히 헤엄치면서 먹이활동을 하는 고래의 삶은 오히려 자유를 만끽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인간의 삶은 죽음에 이를만한 스트레스에 쌓여있다. 그나마 잠을 통해서 뇌와 몸이 쉼을 얻는 것인데 이것이 없이 현대의 복잡한 문명과 사회 구조에 노출되고 스트레스를 24시간 받으며 활동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게 될 것이다.

최근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데 나는 이것을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자폐증을 갖고 있는 주인공 우영우가 변호사가 되어 사람들을 돕는 내용인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고래이다. 그녀는 고래에 대해 전문인처럼 다 알고 있는데 자폐증(自閉症)을 갖고 있는 그녀가 왜 고래를 좋아하는지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은 사회구조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대양을 자유롭게 오가며 살아가는 고래의 삶을 동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에서 고래가 도시를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는 모습에서 나는 일종의 신비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면서 자유와 해방을 느낄 것이다.

인간의 뇌

고래와 달리 하나의 뇌를 갖고 있는 인간의 뇌는 마치 호두(核桃)의 속처럼 좌우대칭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많은 연구를 통해 왼쪽의 뇌는 선형적으로 작동하면서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고 현재와 과거를 비교한다. 그렇게 해서 종합판단을 한다. 주로 사고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반면 오른쪽 뇌는 곡선형으로 작동하면서 지금의 순간에 중심을 둔다. 그래서 주로 감성에 해당하는 영역을 담당한다.

뇌 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Jill Bolte Taylor;吉尔·波特·泰勒)

  • 뇌졸중(腦卒中)의 경험

뇌 과학에 관한 보다 빠른 진전은 뇌 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Jill Bolte Taylor;吉尔·波特·泰勒)에 의해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녀는 직접 뇌졸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왼쪽 뇌가 꺼진 상태로 한참을 살아야 했다. 그때에 그녀는 뇌가 일으키는 특별한 것들을 직접 경험했다. 왼쪽의 뇌가 작동하지 않을 때에 그녀는 과거의 아픈 기억 때문에 아파하지 않아도 되었다. 마음은 고요했고 세상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자신의 개별성을 잃었다고 한다. 세상과 자신이 구분되지 않기에 ‘나’라는 자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삶을 계획하지도 않았다. 무엇인가를 시도하지 않았고 그저 세상이 흐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흘러 그녀의 왼쪽 뇌가 회복되면서 그녀는 개별성을 회복했고 의지와 욕심도 생겼다. 부정적인 감정도 나타났지만 이제 그녀는 90초만 기다리면 그 부정적인 감정이 연기처럼 서서히 엷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우뇌에서 보내는 잔잔함을 경험했다. 이 말은 한국에서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속담과 일맥상통한다. 즉 순간의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고 잠시 참으면 우뇌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게 하는 잔잔함이 밀려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거나 엷게 만드는 호르몬의 작용이 있도록 오른 쪽 뇌가 작동하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런 것을 경험한 그녀는 밝음이나 즐거움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어둠이나 슬픔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아플 수도 있는 경험을 하지 않는 삶이란 살아가기에 밋밋한 것이라고 말했다.

  • 뇌의 특성 네 가지

질 볼트 테일러(Jill Bolte Taylor;吉尔·波特·泰勒)는 인간의 뇌와 성격 혹은 성향이 어떤 관계를 갖는 지를 글로 썼다. 그녀가 볼 때에 인간의 특성은 왼쪽의 뇌와 오른 쪽의 뇌, 그리고 사고와 감정이 종합하여 인간의 특성 혹은 성향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먼저 왼쪽의 뇌를 중심으로 하여 나타나는 첫 번째 특성은 생각이나 사고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성향이다. 사고 중심의 성향은 자아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개별성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구별한다. 이런 성격의 특징은 예를 들어 매일의 삶이란 것은 주어진 할당량을 처리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성공이란 것은 내가 세상에서 많은 자원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런 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두 번째 특성 혹은 성향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걱정과 염려의 특성이다.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현실이 계속될 때에 인간은 걱정과 염려를 하게 된다. 특히 범죄나 비윤리적인 행동과 연관되었을 때는 투덜거리고 화를 내고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면서 세상을 비관적으로 본다. 이때에 스트레스가 많아진다.

오른쪽 뇌를 중심으로 하는 특성은 첫째 현재의 순간에 충실한 경험을 중심으로 한다. 가령 석양이 지는 바다에서 하늘과 섬과 바다가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자신의 생각이나 걱정이나 염려가 뒤로 밀려나고 우주 안의 먼지와도 같이 작은 자신을 느끼게 된다. 예술가나 작가들은 이와 같은 경험을 이용하여 글과 그림과 음악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의식이 좀 더 확장되면 두 번째 특성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우주의 흐름 속에 자신이 있는 것을 느끼게 되고 나의 개별성과 정체성에 대한 의식은 사라지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를 느끼게 된다. 이것은 주로 종교적인 경험이 된다. 기도와 명상의 깊은 단계에서 이와 같은 경험들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뇌 과학에서 보면 주로 생각과 걱정과 염려를 담당하는 왼쪽의 뇌가 거의 활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앙의 깊은 단계로 들어간 사람들은 창조주와 우주와 흐름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 네 가지 특성의 활용

뇌 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는 왼쪽과 오른쪽의 뇌, 그리고 사고와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인간의 성격이라고 할 만한 것이 형성된다고 보는데 인간의 성격이 단지 하나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네 가지 특성을 상황에 따라 잘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인간은 첫 번째 성격에서 계획적으로 살고 두 번째 성향에서 위협으로부터 미리 보호할 수 있고 세 번째 특성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과 네 번째 특징에서는 감사함과 평온함을 느끼는 것인데 이것들이 인생에서 필요에 따라 적절히 활용된다면 보다 좋은 인생이 될 것이다.

질 볼트 테일러가 이런 뇌 과학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인간의 성향, 성격, 특성, 특징 등이 하나로 고정될 필요 없고 이와 같은 학문의 연구를 통해 주어진 인생을 위해 어떤 성향을 발휘하며 사는 것이 자신에게 좋은 지를 인간이 스스로 선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와 방향은 인간의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그야말로 인문주의가 인간에게 어떤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기독교와 인간의 성격

  •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이와 같은 연구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는 인간이란 존재의 정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둔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시기는 한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 인간이 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신이 인간이 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닮아가려고 한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닮아가는 것은 사실상 피곤한 일이다. 이것은 성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정신으로는 실천하기 어렵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이성과 감성과 의지에 작동하고 최종적으로 믿음의 행동을 하게한다. 믿음의 행동이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는 행동인데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을 규정해보아야 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의 원리를 ‘순전히 남을 위해 산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산 사람이다. 그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났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설교하고 기적을 베풀었다.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으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활했다.

  • 인간의 세 특성

1. 이기주의(egoism)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궁극적으로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을 분류해보면 어떤 사람은 순전히 자신을 위해서 산다. 이런 사람을 이기주의자(egoist)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죄인과 악인이 되기 쉽다. 왜냐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령 범죄이고 남을 죽이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에서 사이코패스(Psychopath;精神变态者; 精神病患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 개인주의(individualism)
그 다음은 개인주의(individualism)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개인주의는 사회적 책임감을 갖고 공동체에 필요한 의무와 권리를 행하는 것이다. 기독교인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반인이 사회에서 함께 살 때에 필요한 의식이 개인주의이다. 일종의 상생(相生)의식이다.

3. 이타주의(altruism;利他主義)
그 다음은 이타주의(altruism)가 있다. 이것은 타인의 이익을 위한 사상이라는 것인데 ‘나’라고 하는 자아를 가진 일반적인 사람이 이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강조한다. 내가 뇌 과학을 연관하여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뇌 과학에서 이타주의가 가능한 것은 오른 쪽 뇌가 주로 작동하는 세 번째와 네 번째 특성이 발현될 때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나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다고 느꼈을 때이다. 나의 성공이 별로 의미가 없고 집착이라고 여겨졌을 때에 그래서 재미가 하나도 없다고 느껴졌을 때에 우리의 시선은 내가 아닌 남을 향하게 된다.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Faust;浮士德; 福斯特)』에서도 파우스트 박사는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일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간척지 사업을 했다.

  • 존재의 영생

여기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자. 궁극적 의미는 존재의 영생이다. 그런데 존재의 영생은 사실 주님께 최후의 심판을 받고 영벌에 처해진 자들도 존재의 영생은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존재의 영생은 우리를 존재케 한 근원적 존재자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생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영벌로서의 영생이란 것은 복을 받은 영생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주의에서 너와 나의 상생을 위한 개인주의로 나아가고 기독교인의 경우에는 이타주의로 나아갈 때에 진짜 재미와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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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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