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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그렇다. 목회자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

사진: pixabay

“ 나는 교인과는 친한 친구로 지내지 말라는 조언을 받았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조언이었지만, 그건 내가 느끼던 고립감과 절망감을 더 심화시켰다 ”

[7월의 토론: 목회자에게 ‘친구 같은 교우’는 가능한가? 적절한 질문이기는 한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 안에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교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단, 전제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교회 공동체의 성원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그러니 결국 목회자의 ‘친구 같은’ 교우는 특히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는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 목회자에게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미국 목회자의 글입니다. “친구”라는 말에 담겨 있는 의미 자체가 우리와 굉장히 다른 문화에서 목회하는 이의 글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 글은 말하자면 “비판적 읽기”를 더욱 요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예 “목회자에게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로, 제목에 물음표를 달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글쓴이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접었습니다.) 개인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미국에서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는 미국 목회자의 마음에 성급하게 동화되거나 공감을 표한다면 자칫 오독에 빠지지 쉬운 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독에 기초한 잘못된 적용이나 주장은 (탱자에게는 미안한 비유지만) 귤을 탱자로 만들 것입니다. 애초에 “관계” 중심의 문화가 강한 데가 한국이라면, 이 글은 어쩌면 우리에게는 반대의 논의를 촉발하는 부싯돌의 역할만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목회자에게도 외로울 자유가 있어야 한다!/있어야 하지 않을까?!” “목회자에게 혼자 있는 시간을 대폭 허하라!/허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을 비판적으로 읽고, 우리 교회의 현실을 천착한 반응과 기고가 복음과도시에 쇄도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 분의 글(“우리의 글”)을 환영합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방에 있으면서도 혼자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고독과 외로움은 가장 외향적으로 보이는 목회자조차도 흔하게 느끼는 괴로운 감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양 떼를 치도록 부름 받은 사람도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막 목사가 되었을 때 나는 교인과는 친한 친구로 지내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조언이었지만, 그건 내가 느끼던 고립감과 절망감을 더 심화시켰다. 나는 가까이 지내면서 일상을 나누는 관계를 갈망했다.

교회를 가족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고, 또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 교회 가족은 우리가 잘할 때에도 또 못할 때에도 다 지켜보고 있고, 그건 당연한 것이다. 목회자가 교회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꺼려한다면 어떻게 교인이 교회를 가족으로 여기기를 기대하겠는가?

이런 필요를 인정하면서 차차 사역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관점과 경험이 바뀌었다. 목회자에게 교제가 필요하다는 점에 있어서 다음 네 가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1. 목회자도 교인이다

당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교회에 고용되었다고 해서 교인 자격에서 벗어난 건 아니다. 직분으로는 목회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른 교인들과 동일한 교우로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에 속한다.

누가는 교회를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는” 신자들로 이루어진 한 몸이라고 말한다(행 2:42). 그리고 사도들도 그 교인에 포함된다.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묘사된 친밀한 공동체는 멀리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 목사와 그 가족은 단순한 상담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를 더 많이 알아가고 돌보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친구이다. 목사는 회중을 “나와 그들”이 아니라 “우리”로 보아야 한다.

2. 교인은 서로를 안다

공동체 생활을 하려면 다른 사람이 내 삶에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본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그를 멀찍이서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아예 예수님의 삶 속으로 초대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일반 교인들과 분리되어 있거나 교인들의 관찰 대상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목회자와 그 가족에게는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 되려면 단지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stage persona) 또는 소셜 미디어 속 과장된 모습을 넘어 진짜 나의 모습을 알려주고 서로 알아가겠다는 진정한 노력과 열망이 있어야 한다.

알기 위해서는 알겠다는 의지가 먼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결혼을 생각해 보자. 신혼 기간도 좋지만, 결혼생활을 몇 년 이어가면서 경험하는 친밀감과는 비교할 수 없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 부임하고 처음 몇 개월은 종종 이런저런 모임으로 바쁘겠지만, 그건 다 표면적인 관계일 뿐이다. 진정한 친밀감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다(눅 9:20). 예수님과 보낸 시간이 많았기에 가능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에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깊은 관계를 갈망한다면, 의도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당신은 교인을 집으로 초대하고, 교인 집으로 가고, 당신의 취미에 교인을 부르고 또 다른 사람들을 당신이 즐기는 활동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또한 그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3. 공동체는 연약함마저 노출하게 한다

목회자는 종종 공동체의 중요성을 설교는 하지만 실천은 못한다. 진정한 공동체는 연약함(vulnerability)의 노출까지 요구한다. 동네 카페에서 눈물 고백을 하라는 게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까 물으면, 진짜 기도제목을 나누라. 자존심 때문에 연약함을 숨겨서는 안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겟세마네에서 함께 기도하자고 청했다. 제자들은 결국 잠이 들었지만, 예수님은 어쨌든 가장 힘든 시간에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하셨다. 진짜 연약함은 기도 너머로까지 확장될 수 있지만, 기도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로 도움이 필요했을 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진지한 요청을 한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혹시 기억하는가?

4. 목회자도 돌봄을 받아야 한다

최근에 한 교인이 우리 가족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우리 집에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제안은 그냥 사랑에서 나온 친절이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고맙게도 그녀는 나를 만났을 때 신속하고도 또 꼭 필요한 책망을 해주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가족에게 베푼 섬김에 감사했고, 동시에 이번 일을 자신이 내게 베풀어야 할 하나의 섬김의 기회로 보았다는 말을 솔직하게 했다.

교인이 베푸는 진정한 환대를 거부함으로써, 양 떼에게야 끊이지 않는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그런 돌봄이 필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본의 아니게 전달할 수 있다. 목회자로서 우리는 교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만큼, 우리도 그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목회자의 필요가 믿음의 가족인 교인에 의해 충족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도 돌봄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충실히 가르치셨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친절과 환대와 격려를 받으셨다. 자신이 가르치고 보살펴 준 사람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셨다.

예수님의 모범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의 돌봄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바란다. 우리의 삶을 교인에게 맡기고, 우리도 그들처럼 두렵고 불안해하는 존재임을 인정하자. 하나님께서 오로지 은혜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가족과 하나 되기 위해 더욱 더 힘차게 노력하자. [복음기도신문]

“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충실히 가르치셨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친절과 환대와 격려를 받으셨다 ”

제레미 토드(Jeremy Todd) | 제레미 토드 목사는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 주에 있는 Harvest Pointe Community Church에서 교육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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