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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이신칭의, 바로 알고 제대로 누리기 (3)

사진: BBC Creative on Unsplash

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장 10~14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의 정수를 죄인은 쉽게 훼손한다. 의인이 되어서도 그 어리석고 미련한 성향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사도 바울에게 이신칭의의 복음, 은혜의 복음을 듣고 회심한 갈라디아 성도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리석게도 육체의 행위를 의지하며 율법을 좇아 의를 얻으려 했을 때, 바울은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 사역이 의미하는 것(1-5절), 둘째, 아브라함에게 선포된 복음 그리고 그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6-9절)이 ‘이신칭의’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갈라디아서 전체가 모두 이 주제를 다루는 특별 서신서지만, 특히 우리가 주목하여 살펴보고 있는 본문(3:1-14)에서 마지막으로 바울이 강조한 것은 바로 이신칭의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10-13절에서 바울은 매 구절 명제를 세우고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 명제를 확증했으며, 14절에서 결론을 내린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신칭의를 가르친다.

1. 명제1: 율법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다(10)

“무릇”은 앞에서 진술한 내용의 근거를 앞으로 밝히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는 접속사다. 왜 이신칭의가 참인지 성경을 통해 조목조목 입증하겠다는 것이다. 첫 번째 명제는 바로 “율법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이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10절).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그 자체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롬 7:12). 문제는 그 율법의 행위로 의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율법 행위에 속한). 그런 자는 저주 아래 있다. 왜?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누구도 행위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이를 확증한다(기록된바).

바울은 여기서 신명기 27장 26절을 인용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바울이 강조한 표현을 보면, “누구든지”, “모든 일을 항상” 등이 있다. 없는 말을 덧붙여 과장한 것이 아니다. 70인역을 보면 헬라어로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은 저주받았다’라고 되어 있다.

그 누가 율법의 모든 말씀을 항상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자기 행위의 완벽함으로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만족시키려는 자는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각종 제사법을 주신 이유는 사람의 행위가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그렇다. 우리에겐 이런 은혜로운 복이 필요하다. 자기 죄와 허물을 자기 행위로 완벽하게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2. 명제2: 율법은 아무도 의롭게 하지 못한다(11)

두 번째 명제는 첫 번째 명제를 보충한다. 첫 번째 명제가 율법의 완벽한 순종이 ‘불가능한 것’의 문제였다면, 두 번째 명제는 ‘율법의 목적’의 문제다. 율법은 의롭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11절). 바울은 확신했다.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단지 모든 사람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율법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가진 확신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 사람을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이것’으로 의롭다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에 근거한 확신이다.

이는 이후가 바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11절). 이 말씀은 선지자 하박국을 통해 하신 말씀이다(합 2:4). 의인은 율법의 행위로 사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의롭다고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하시는 근거는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다.

그런데 믿음을 또 하나의 행위로 보는 사람이 있다. 열심히 믿고, 간절히 믿어 의인이 된다고 착각한다. 믿음을 의를 얻기 위한 조건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은혜를 감사함으로 겸손히 받는 수단이다(엡 2:8, “선물”).

3. 명제3: 율법과 믿음은 다르게 작동한다(12)

세 번째 명제 역시 두 번째 명제와 연결된다. 앞서 하나님은 의인이 무엇으로 산다고 말씀하셨는가? “믿음”. 그런데 12절, 세 번째 명제에서 바울이 인용한 말씀을 보면 율법을 행하는 자는 믿음이 아니라 다른 것을 통해 산다고 하셨다. 바로 율법 행위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12절,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레 18:5). 상반되는 것이 보이는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으로 산다. 서로 완전히 다르게 작동하는 것이다. 칼을 제작하는 회사에서 같은 칼을 만들어도 도축하기 위한 칼과 수술을 위한 칼을 만들어 서로 완전히 다른 일을 하게 하는 것처럼, 율법과 믿음은 완전히 다른 목적을 위해 각각 작동한다. 바울은 이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고 표현했다.

율법과 믿음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없어선 안 될 귀한 선물이다. 하지만 목적이 다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려는 목적, 믿음은 은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주셨다(롬 3:20).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목적에 맞게 사용해야지, 엉뚱한 곳에 가져다가 사용하면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한다.

믿음으로 사는 의인도 율법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다.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을 위한 목적으로. 하지만 율법을 의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율법이 심판의 칼이 되어 육신의 연약함으로 율법의 요구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저주를 내릴 것이다(롬 8:3). 그러므로 우리에겐 이를 대신하여 육신을 입고 십자가에서 우리 죗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

4. 명제4: 예수님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13)

마지막 명제는 방금 말한 것과 연결된다.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린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13절). ‘우리’가 반복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하셨는가? 저주받으셨다.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저주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것이다(속량, 구원).

바울은 이번에도 신명기 21장 23절을 인용하며(“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을 확증한다. 율법 그 자체는 누군가를 저주하지 않는다. 다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이 저주인 이유는 육신을 입은 우리 중 누구도 그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율법 앞에 완전무결하셨다.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셨다. 자격을 갖추신 분으로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부과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이다.

5. 결론(14)

성경이 확증하는 네 가지 명제는 다음과 같다: 1) 율법과 믿음은 다르게 작동한다. 2) 율법은 아무도 의롭게 하지 못한다. 3) 율법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다. 4) 예수님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이기도 하다(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지금까지 바울이 설명한 것이 여기 다 들어 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으로 이방 모든 족속에게까지 미치게 하신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다는 것이다(6-9절).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신칭의의 복을 받는다. 이 약속의 보증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며(“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3), 이는 성부 하나님이 작정하신 뜻에서 시작되고 성자 하나님 안에서 허락되며 성령 하나님으로 확증된 복이다(1-5절). 당신은 이 복을 바로 알고 제대로 누리고 있는가?

바울은 성령을 가리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이라고 말했다(롬 8:15). 이신칭의는 우리가 믿음으로 값없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복을 허락한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 친밀한 관계를 당신의 행위로 사려 하지 말고 마음껏 감사함으로 누려라.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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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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