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조용선 칼럼] 기독교와 한국의 정치, 경제 사상

▲ 사회복지기관의 구제활동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행렬. 사진: 프레이포유 제공

1. 사회주의와 진보주의의 원래의 뜻과 위치

1-1. 막연하게 생각하던 중간

한국 상황에서 어떤 정치와 경제의 사상으로 나아가야 올바른 길인가? 한국은 지금 이 때문에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파와 우파로 구분돼, 공산주의, 사회주의, 진보주의로 대표되는 좌파가 있고 자본주의를 선호하는 우파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 좌파와 우파를 선택적으로 동조하는 중도파도 있다. 2009년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진보세력이라고 답한 사람이 36.7%, 중도 34.8%, 보수 24.2%에 이른다.[1] 

이 조사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질문은 없다. 이 두 세력에 대해 진보주의라는 이름으로 조사를 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정치와 경제 사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자신을 ‘진보주의자’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진보라는 말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을 갖고 있어서 좋게 들리기 때문이다.

한국 상황에서 좌파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진보주의 성향을 보이고 우파는 자본주의 진영에 속한다.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중요한 개념에서 좌파는 공동체 개념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본주의는 개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상체제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와 진보주의도 좌파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보다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와 진보주의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상대적으로 중도적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첫째, 사회주의와 진보주의가 어떤 배경에서 형성된 사상체계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둘째, 좌파의 개념이 프랑스 대혁명에서 태동됐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셋째, 20대 80으로 잘 알려진 파레토(Pareto; 帕累托)의 법칙과 최근 좌파의 경제학자로 유명한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汤玛斯·皮克提)의 유럽 자본주의 형성에 대한 정밀한 연구를 비교하며, 왜 이 세상이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를 입증하고 싶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해 인간사회가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달란트 비유와 직결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1-2.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모태이다.

먼저 사회주의를 보자.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중간 단계가 아니다. 두 사상체제를 비교해보면 원래는 사회주의 개념이 먼저 존재했다. 그러던중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등장하면서 사회주의의 극단적 단계로서 공산주의가 등장했다. 즉 이전에는 공산주의라는 말이 그저 사회주의에서 사람들이 재물을 평등하게 분배하는 즉, 낭만적으로 이루어지는 최종단계를 뜻하는 정도였다. 이를 칼 마르크스는 공상적 공산주의라고 명명했다. 생시몽, 푸리에, 오웬 등이 이런 공상(空相)적 공산주의에 헌신했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 자신이 말하는 공산주의는 사회 전체가 생산하는 이익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자본과 이익의 흐름 전체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이라고 했다. 그의 과학적 공산주의가 내린 결론은 자본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搾取)하여 부를 축적(蓄積)하는 것이므로 자본가들을 제거하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노동자들이 평등한 임금을 받는 세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본가들은 탐욕에 빠져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는 악마와 같은 존재들임으로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보았다. 즉 공산주의 혁명으로 노동자들의 세상을 만들어, 모두가 평등한 급료를 받는 세상을 이루기 전에 사회주의 체제가 중간적 단계로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과도기적 단계로 여겨진다. 그러나 원래는 사회주의가 모태이고 여기서 극단적 공산주의를 주장한 것이 칼 마르크스의 사상이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중간 지대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1-3. 진보주의는 무엇인가?

– 진보는 좋은 말이다

진보주의에 대해, 한국인들은 중도적 개념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앞서 말한 대로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진보라는 말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좋은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선호한다. 그래서 정치와 경제 사상을 잘 몰라도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진보라는 단어를 지향함으로 자신을 진보주의자라고 말하는 경우들도 많다. 그리고 한국인이 잘못 알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처럼 진보주의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중간에 속하는 사상체제라고 생각한다.

– 무엇으로부터의 진보인가?

그런데 이 진보주의라는 말은 한국에서 좀 더 복잡하게 사용된다. 첫째는 한국에서 진보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둘째는 조금 더 놀라운 것이다. 사실 진보주의를 영어로는 프로그레시비즘(progressivism)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뜻은 ‘점진적’이란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진보주의의 등장 배경은 미국에서 남북전쟁 이후였다. 당시 권력을 장악한 북부가 산업주의를 통해 경제를 빠르게 성장으로 이끈 결과, 19세기 말엽에 급하게 밀어닥친 산업혁명으로 사회에 어둡고 그늘진 부분들이 형성됐다. 즉 정치권력과 경제력이 결합된 체제가 자유로운 경제의 기회와 여기에 상응하는 민주 정부의 전통을 파괴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보완하면서 자유주의로서의 자본주의가 나아가야 한다고 본 것이 원래 진보주의의 뜻이다.[2]  

그런데 이 생각이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에 더 관심을 갖게 되면서 결국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경향을 같이 하게 됐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좌파의 교수나 지식인들에게 이 부분을 농담처럼 질문한다. 즉 다음과 같다. “진보주의란 말을 사용하려면 어떤 사상체계가 먼저 있고 그것으로부터 진보한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진보주의는 무엇을 기준으로 놓고 진보한다고 말하는 것이냐?” 그들이 이 말을 날카롭게 받아들이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 진보주의는 진짜 보수주의이다

‘진보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은 당연히 자본주의가 돼야 한다. 특히 한국에서 진보주의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헌법이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자본주의로부터 더욱 진보하는 사상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진보주의는 자본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 속에 있기 때문에 저들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가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칼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공산주의로 가는 것이 인간의 사회와 역사가 발전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개념에서 진보주의라는 말을 보면 사실 그것은 자본주의를 퇴보시키는 퇴보주의라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원래 진보주의라는 말은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향하되 급격한 사회의 발전으로 인해 오는 사회의 어두운 부분들을 보완하며 더욱 자본주의로 나아가자는 뜻이 진보주의의 참 뜻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물들어 사실은 진보주의 참 뜻을 퇴보시키는 저들로부터 진보주의라는 단어를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진보주의라는 말은 ‘진짜에서 진’, ‘보수주의에서 보’라는 단어를 따서 ‘진짜 보수주의’가 원래 진보주의의 참뜻임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 사회복음(social gospel)

진보주의의 배경에서 기독교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사회복음(social gospel)이다. 원래 이 말은 정치와 자유주의 경제의 결합으로 급격하게 거대해지는 미국의 산업혁명의 상황에서 기독교가 사회의 어두운 부분들을 해소하며 복음을 전하고자 한 실천의 흐름에서 등장했다. 그런데 이것이 개인과 공동체라는 사상의 중간점에서 공동체 쪽으로 방향이 기울어지게 됐다. 이 같은 경향이 신앙과 신학에 흘러들어오게 되면서 오늘날 좌파 기독교인, 좌파 지도자들이 형성됐다. 이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역사적으로 등장하게된 시점으로 가보자.

2. 프랑스 대혁명의 교훈

2-1. 혁명의 배경

프랑스 대혁명은 루이 14세 때에 개신교 신자들을 추방하고 나라를 천주교화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개신교 신자들은 위그노로 불렸는데, 이들은 사회의 중산층들이었다. 학문과 기술 분야에 전문적인 이들을 추방한다는 것은 곧 프랑스의 국력이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성장하는 당시의 국력을 믿고 개신교 위그노들이 나라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몰랐다. 그 뒤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의 부흥 성장을 막기 위해 식민지 미국 편을 들면서 많은 돈을 사용했고, 그로 인해 루이 16세 시대에 와서는 프랑스의 경제가 매우 힘들어졌다. 이 시기의 배경으로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2-2. 혁명가들이 행한 일

이런 상황에서 1789년에 대혁명이 발생했고 혁명세력은 부자들의 재산을 압류(押留)하고 해외 망명자들의 재산 또한 매각했다. 모든 교육은 무상을 도입했고 가난한 자와 신체부자유자들을 나라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했고 정부가 상품의 가격을 정했다.[3] 이 모습은 진보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실행하는 내용들과 꼭 일치한다.

2-3. 로베스피에르와 우유

프랑스 혁명 당시의 상황 가운데, 후대에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罗伯斯庇尔)가 사람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우유를 많이 마시도록 하기 위해 우유 값을 강제로 내리도록 했다. 그러자 우유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수익이 맞지 않아, 당시로서는 애물단지일 수 밖에 없는 젖소를 처분했다. 우유를 생산할 젖소의 수가 줄어들자 로베스피에르는 건초(乾草) 값을 내리도록 하면 젖소를 키울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건초 값을 내리도록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건초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건초를 만들어도 수익이 없으니까 건초를 생산하지 않게 됐다. 건초가 부족하니 젖소를 키울 수도 없고 젖소가 적어지니 우유 생산량 역시 줄어들었다.

결국 많은 사람에게 우유를 공급하려던 로베스피에르의 계획은 엉뚱하게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우유를 마시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혁명 세력은 자신들의 정책을 포기하고 철회했다. 그들의 법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았고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평등하게 하려는 시도는 다 폐지되었다.[4]

2-4. 프랑스 대혁명과 문재인 정권

한국에서 문재인 정권이 부동산 정책에서 행한 것과 똑 같은 현상이다. 그런데 공부를 게을리한 이 정권은 경제를 잘 못 건드리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 역사가 말해주는 것에 귀 기울이지 않고, 프랑스 대혁명에서 행한 것과 유사한 사회, 경제 정책을 펼쳤다. 분통터지고 고통 받는 것은 국민들뿐이다. 저들은 겉으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경제 정책을 펴면서 뒤로는 집과 건물을 몇 채씩 사서 이미 부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들을 지지하는 사람들, 속았는데 속은 줄 모르는 사람들,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와 민족이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성경 중심의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번영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한다.  

3. 파레토의 법칙과 토마 피케티의 연구

3-1. 파레토의 법칙(Pareto; 帕累托)

사실 파레토 법칙의 중요한 부분은 20%의 사람의 생산량이 전체의 80% 생산량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20%의 사람이 80%의 노동의 대가를 가져가는 것이 맞다. 그러면 80%의 사람은 20%의 급료를 가져가게 된다. 아마도 현재 세상의 급료 체제가 대충 이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순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왜 세상은 이런 식으로 구조가 형성되는 것일까? 100명의 사람이 100%의 일을 할 때에 1명당 1%의 일을 하고 1%의 이익을 가져간다면 세상은 공평할 것이다. 그런데 왜 20명의 사람이 80명이 하는 일을 해내고 80%의 이익을 가져가며 80명의 사람은 20%의 일을 하고 20%의 이익을 가져가는 구조가 되고 있을까?

3-2.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전환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전체 구조를 뒤집어 엎는 것이 공산주의 혁명이다. 그러나 100명의 사람이 각각 1%의 일을 하고 1%의 수익을 가져가게 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20명의 사람이 80%의 일을 하고 80%의 수익을 가져가는 구조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것은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만든 정부에서 거의 100년에 걸친 실험을 통해 확인된 사항이다. 소련은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없어 해체하고 자본주의로 돌아섰고 중국 또한 공산당 정부는 유지하되 경제에서는 자본주의로 돌아서서 두 나라 모두 20%의 사람이 80%의 일을 하고 80%의 수익을 가져가는 구조로 전환했다.

3-3. 20대 80의 변형이 혁명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파레토의 법칙은 인간의 역사에서 모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그런 사회체제의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뛰어난 20%의 사람이 사회를 이끌어가면서 80%의 수익을 누리고 나머지 80%의 인간들은 20%의 이익을 나누며 사는 구조로 역사가 이어져왔다. 문제는 이 균형을 깨졌을 때에 즉 20%의 사람들이 80%의 이익이 아니라 90%를 가져간다든지 변형이 일어날 때에 80%의 사람들이 반란이나 혁명을 통해 다시 구조의 균형을 맞춰 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필자의 짐작이지만, 아마도 틀림이 없지 않을까 싶다.

– 중국의 왕조와 반란

내가 이것을 깨달은 것은 중국 선교사로서 중국의 역사를 공부하며, 중국의 왕조가 평균 200년에 한 번씩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부터였다. 왕조가 바뀌는 이유는 바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져 하류층이 생활 자체가 곤란할 때 발생하는 반란 때문이었다. 새로 생긴 왕조가 처음에는 잘한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후 다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생기면서 약 200년쯤 되었을 때는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현재 중국은 건국한지 70년 정도가 되었는데 가장 번성할 시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역시 내면에는 상류층인 공산당 간부들의 부패가 매우 심하고 점차 그 부패는 중국에서 하나의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듯이 새로운 국가체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씨아오캉’(小康)

이러한 쇠락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는 중국말로 ‘씨아오캉’(小康)이다. 이 단어는 백성이 등 따뜻하고 배곯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뜻한다. 즉 중국의 백성에게 ‘씨아오캉’(小康)의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될 정도의 경제가 되면 사람은 권력가와 재벌을 부러워하기는 해도 증오하고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이것을 서양식으로 말하면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國富論) 사회가 되는 것이다. 영어로 보면 그 뜻이 더 숭고한데 ‘부유한 국가(Wealth of Nations)’가 된다. 여기서 아담 스미스가 생각한 것은 자신의 조국인 영국만이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어떻게 하면 부유해지는 지를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마음에는 모든 나라, 모든 민족, 각 사람들이 잘 사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에 비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資本論)은 자본가들이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함으로 인해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고 결국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하는 것이므로 자본가들을 제거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가를 없애고 나면 누가 공장을 만들고 급료를 주는가? 결국은 누군가 다시 자본가가 되어 공장을 지어야 한다. 아니면 공장이 없는 세상, 즉 농업의 시대로 회귀해야 한다. 그러나 농업의 시대로 회귀한다고해도 거기에는 다시 자본가와 같은 지주계급이 형성된다. 지주 계급이 형성되지 못하도록 하면 될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의 속성은 질서를 위해서라도 지배 계층 혹은 계급을 형성한다.

– 토마 피케티의 연구

참고로 수년 전 좌파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汤玛斯·皮克提)는 유럽에서 300년간 자본이 어떻게 축적되었는지를 조사해 그 내용을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 first century)에 담았다. 이에 대해 인간 사회의 불평등을 증명하는 좋은 자료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반대로 뒤집어서 보면 인간의 역사가 언제나 그렇게 상류층이 많은 재물을 갖고 하류층은 적은 재산을 갖는 형태로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 한겨레신문의 칼럼

참고로 한겨레 신문의 칼럼에서 자료가 될 만한 것을 발췌한다.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汤玛斯·皮克提) 등 세계 유수의 학자들이 작성한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22’에 따르면 상위 10%의 소득은 전 세계 소득의 52%를 차지했는데 하위 50%의 소득은 전체의 8%였다. 하지만 부의 경우, 상위 10% 부자가 전체 부의 76%를 소유한 반면, 하위 50%는 겨우 전체의 2%를 차지했다. 한국은 소득 수준에서는 서유럽만큼 부유해졌으나(한국은 당당한 선진국이다) 불평등 상황은 서유럽보다 한층 열악하다(한국은 부끄러운 후진국이다). 부의 경우, 상위 10%가 전체의 58.5%를, 하위 50%가 전체의 5.6%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의 경우, 상위 10%가 46.5%를, 하위 50%가 16%를 각각 차지했다. 사회적 안전망을 제대로 구축하지 않은 채 급속히 공적 규제를 완화한 결과 이처럼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것이다.”[5] 

3-4. 한겨레신문의 칼럼에 대한 비평

– 역사에서

한겨레의 칼럼은 경제의 불균형에 대해 잘 정리한 글이다. 그런데 이 글의 문제는 한국의 역사에서 그리고 세계의 역사에서 언제든 이와 같이 불균형이라고 말하는 상태가 아닌 적이 있는가?하는 점이다. 한국에서 시간을 거슬러 개발도상국 시절, 일본강점기 시대, 조선 시대, 고려시대, 고대 시대 등등 어느 시대이든지 지금 좌파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돌아가야 할 이상의 시대가 있었는가? 세계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그런 시대는 없다. 만일 좌파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현재의 불균형과 불평등과 대조할만한 균형과 평등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면 정말 보고 싶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거의 20대 80의 상태로 흘러왔다.

– 미래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보자. 좌파학자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그런 세상이 없었으므로 이제 인간이 경제적 불평등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인간이 가야할 길이라는 것이다. 멋있는 말이며 가슴이 뛰는 말이다. 그런데 아마도 그런 세상은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진보주의자 등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고 경제를 개혁하려고 해도 안 될 뿐만 아니라 개혁하겠다는 사람들조차도 권력을 잡은 후에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전 역사의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재산을 가진 자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소련과 중국과 북한 등 공산주의 나라에서 공산당 간부들이 더 많은 재산을 갖고 해외에 은닉해놓는 것과 같은 현상에서 잘 알 수 있다.

– 인간 마음에서

더 중요한 이유는 인간 자신이 모두 평등하기를 원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은 평등할 수 없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이미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점에서는 모두 같고 인권을 귀히 여기고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다른 유전자의 재능과 태어난 이후 다른 성장 환경을 갖게 된다. 또한 인간이 성장하면서 공부와 일에 있어서 어떤 의지와 노력으로 집중하느냐? 에 따라 결과 역시 다른 신분과 계층에 속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은 평등하지 않으며 평등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인간의 역사와 마음을 이해하지 않고 현상만을 보고 모순과 비합리와 부조리를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또한 현상만을 보고 선동하거나 선동되어지는 것도 큰 문제이다.

4. 달란트 비유와 파레토(Pareto; 帕累托)의 법칙

성경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가 등장한다. 여기서 1달란트를 받은 하인과 5달란트를 받은 하인을 비교하면 한 사람은 4개의 달란트를 더 받았다. 이것을 파레토의 법칙에 연계해서 보면 20%의 사람이 80%의 일을 하고 80%의 수익을 가져가는 것은 4배에 해당한다. 달란트의 비유와 파레토의 법칙은 매우 유사하다. 이 부분도 연구하면 이 시대에 상당히 의미 있는 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5. 나의 원하는 바

만약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누구든 증거 자료와 함께 비평을 부탁한다. 만일 그 주장이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라면 나는 언제든지 나의 생각을 수정하고 보다 온전한 지식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싶다. [복음기도신문]


[1] Jesus Army, 2022, 3월호 별책부록, 이희천, 「대한민국은 체제전쟁 중」, p. 13.

[2] Heather M. Campbell edit, ‘The Britannica guide to Political and Social Movements that Changed the Modern World’, (New York: Britannica Educational Publishing, 2010), pp. 71-73.

[3] Heather M. Campbell edit, ‘The Britannica guide to Political and Social Movements that Changed the Modern World’, (New York: Britannica Educational Publishing, 2010), p. 52.

[4] Heather M. Campbell edit, ‘The Britannica guide to Political and Social Movements that Changed the Modern World’, (New York: Britannica Educational Publishing, 2010), p. 54. The social laws were no longer applied, and efforts toward economic equality were abandoned.

[5] ‘21세기 자본의 정치경제학-피케티와 그 이후’ 한겨레, 2022, 01, 13.

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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