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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남편의 희생적 사랑

사진: pixabay

세상은 남편들에게 “누구도 네게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 못하게 해! 멋진 사나이가 무게를 잡아!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살아!”라고 말한다. 성경은 이와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너 자신을 죽여” 여기에 바울은 에베소서 5장 25절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일으킨다. 심지어 위대한 그리스도인 남편도 그의 전성기에조차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바친 사랑을 따를 수 없었어. 도대체 바울이 기대하는 것이 뭐야?

바울은 넘쳐 흐르는 사랑의 느낌이나, 쇠하지 않는 육신적인 매력을 마음에 두고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감정과 매력은 어떤 때는 빨리 변하고 쇠퇴한다. 그러나 세상은 느낌이 중단하면 사랑도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도덕적이지 못한 결혼(일부일처)을 계속하게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세상이 생각하는 훨씬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존 맥아더는 남편이 어떻게 자신들의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음은 존 맥아더(John MacArthur)의 설교를 옮긴 글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명령에서 뜻하신 것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너무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사랑의 방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다시 25절에 보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굉장히 분명하지요? 이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지배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남편들은 아내들을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어서 자신을 내어주신 것 같이 사랑해야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베푸신 사랑과 같은 사랑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그가 그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나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자격없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면서 사랑을 쏟으시는 것이 그려져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저는 종종 사람들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자기의 아내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나는 우리 아내를 너무도 사랑해요” 거기에 이렇게 바로 대답할 수가 있죠.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아내를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준입니다.

바울이 남편들에게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하였을때 이것은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내 인생에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한 내 아내가 될 수 있다. 더 이상 내 필요를 못 채워 줄때에는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고 하는 남자들에게도 혁명적입니다. 그렇죠? 그게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충격적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랑에 대해 사랑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더 깊이 있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을 보세요. 우리는 6절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복종하고 주라 칭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그렇게 해야 하지요. 그런데 7절을 보면 “남편 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저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말입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러분이 기억할 수 있게 세 개의 단어를 드리겠습니다. 첫째, 배려입니다.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 이것은 여성에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사고방식,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사고방식, 독립적인 사고방식,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사고방식과 반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고, 섬세하며, 그녀의 필요를 채워주고, 또 그녀가 느끼는 것, 두려움, 걱정, 관심, 목표, 꿈과 바람을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가 뜻하는 바입니다.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 때로는 그저 들어주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의 사랑이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면 당신의 사랑의 표현할 수 없으므로 그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십시오. 배려뿐 아니라, 다른 단어로 또 표현하자면, 정중함입니다. 7절에 보면 아내와 지식을 따라 살 뿐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에 연약한 그릇과 사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물리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여성들은 연약합니다. 여성이 물리적으로 더 약하다는 것은 이해하시지요. 하나님께서 남성의 힘과 보호 아래 두시기 위해 그렇게 디자인하셨습니다. 아내는 우리 남편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아내의 물리적으로 힘이 되어 주시고 또 세 번째로, 나눔….나눔입니다. 아내를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알고 귀히 여기십시오. 남성과 여성은 물리적으로 다르지만, 영적으로 같으므로 영적인 동반자처럼 대하십시오.

아가서에서 남자가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하면 여인이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남편이 되려면 친밀하고 동등한 영적인 나눔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내를 알아야 합니다. 그녀의 필요를 이해하고, 느낌을 이해하고, 그녀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내들에게 물리적인 힘, 정서적인 힘, 또 인격적인 힘을 제공해주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를 영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것을 고백하기 전에는 “글쎄요. 저는 더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혹은 말하기를 “잠시만요. 우리 아내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모른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그를 미워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모델이고 기준입니다. 거기에 더이상 감정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감정은 더욱 풍성해지고, 서로에게 짜릿한 느낌이 들게 될 것이며, 둘 사이의 우정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성경적인 정의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깊습니다. 다시 에베소서를 살펴보겠습니다.  25절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쉽게 말해도 되겠습니까, 신사 여러분? 성령 충만한 남편은 아내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방식이었고 방식입니다. 우리 안에 무언가 매력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압제하시기 위해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려고, 우리를 이해하시려고, 힘을 주시려고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자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아 보여서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호감을 살 만한 아무런 요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그리스도께서는 호세아가 고멜을 사랑한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는 그녀가 창녀일 때부터 보아 왔습니다. 그녀가 창녀 짓하는 것을 지켜보아 왔습니다. 많은 남성을 거쳐 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길거리에서 벌거벗긴 채로 경매에 팔리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가장 비싼 값에 팔리는 노예 시장의 창녀, 그녀가 정결하며 순결하고 우아하며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기로 그의 마음에 작정하였기에 호세아는 그곳에 가서 그녀를 샀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매춘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또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이 그의 교회이기 전부터 애정을 가지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의 교회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매춘하여 죄를 짓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없어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전적으로 자기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특징짓는 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신을 부인하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자존심, 개인적인 욕망, 야망, 삶에 대한 환상과 꿈을 다 버려 버리십시오. 모두 뒤로 제쳐 버리십시오. 모두 무의미합니다. 이것은 유혹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잊어버리고 오직 아내의 필요와 걱정과 마음을 아는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며 아내를 위해 당신의 삶을 희생하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비칠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그러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 사랑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이러한 엄청난 사랑을 만드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절에 보면 “저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거듭난 자들에게만 있는 사랑입니다. 세상은 로맨틱한 사랑을 할 수 있는 한 오래 붙잡으려 하지만, 결국 종소리가 그치면 폭죽놀이도 끝나며 삶은 지루하게 바뀌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며 결혼생활 밖에 있는 무엇인가가 더 좋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새로운 성품이 없기 때문에 이 사랑을 유지하며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듭난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준 꺼지지 않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진정하고 강렬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삶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아내 사랑하기를 우리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기도신문]

존 맥아더 (John MacArthurn)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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