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화 속으로’』
‘전쟁’의 한 면은 아픔이다. 찢겨진 산하, 위태로운 생명, 그리고 전쟁후유증…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이 크다. 그러나 적의 공격을 받거나 포로로 억압돼 있는 사람들에게 전쟁은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님은 이미 승리한 전쟁을 우리에게 주셨다. 실제 역사가 말하고 있는 2천 여 년 전의 십자가가 우리의 승리의 시작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보장하고 있다. 다만, 이미 승리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게릴라들의 완전한 소탕을 위해 하나님은 지금도 그의 아들을 믿는 모든 증인들을 이 땅에 남겨두셨다.
주님이 당하셨던 대로 믿음으로 스스로 결박당하여 열방이라는 전쟁터 가운데 뛰어들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성벽에서 나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기도’의 자리이다.
영화 ‘포화 속으로’는 6.25전쟁에 이 나라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바치며 끝까지 싸웠던 71명의 학도의용군의 실화를 담고 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진격을 거듭하고, 남한군의 패색은 짙어져만 간다. UN은 엄청난 수의 연합군을 대한민국에 파병하지만 이미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남한은 연합군의 합세를 기다리며 낙동강 사수에 모든 것을 내걸고 남은 전력을 그곳으로 총집결 시킨다.
여느 전쟁영화와 다를 바 없는 이 영화는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주의 군사된 우리에게 좀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지금 열방에서 들리는 소식은 어떠한가.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이유만으로 고통 받고 죽어가며, 다음 세대들은 온갖 창궐하는 죄로 신음한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를 알리는 처처의 기근과 재해와 전쟁의 소식들… 어느 것 하나도 그저 흘려버릴 수 많은 없는 현실이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나라의 성벽이라는 경계에 서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전쟁과 상관없는 평화주의자요.’라면서 넋 놓고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주님은 가기 힘들지만 가야했던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셨듯이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모든 현장이 전쟁터임을 알고 머리가 깨지고 살이 찢겨지며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그 상황에서도 ‘포화 속으로’ 돌진해야만 한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볼 후반부의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아직 어른 흉내 내는 것도 어설픈 학도병들의 고군분투는 영화가 보여주는 스케일보다 장렬하다. 이 진지를 지켜내기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바친다. 갑자기 나타난 탱크를 막기 위해 수류탄을 통째로 들고 탱크 안으로 뛰어든다. 포탄 하나라도 더 챙겨서 조달하려던 통신병은 뛰어가다가 사살된다. 전쟁이 무서워 도망하던 중 포로로 잡혔다가 겨우 다시 돌아온 한 학도병은 중대장 일행을 자기 몸으로 막다가 죽는다. 이 전쟁은 자기를 위해 싸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처음 강석대(김승우 扮) 대위가 학도병을 소집하고 외친 마지막 말에 그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엉겹결에 중대장이 되어 마지막 전투에까지 참전하게 된 오장범(최승현(T.O.P.) 扮)이 던진 똑같은 질문에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힘껏 대답한다. ‘학도병은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 ‘군인이다!’
지금 성벽이 무너지고 있다면 누가 나가서 싸워야 하겠는가.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쟁기와 병기를 들라 종용하며 너희 가족과 친척들을 위해 싸우라고 울부짖었던 느헤미야의 고백이 오장범의 목소리로 들린다. 지금 이 시간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인은?” 라고 묻는다면, 이 외침에 “군인이다!”라고 대답할 것인가. 만약 아무 대답도 못한다면 그는 과연 하나님 나라의 군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느4:23)
(포화 속으로 | 이재한 감독 | 12세 관람가 | 120분 | 2010)
<글.문화행동 아트리 공동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