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문장들을 만났고, 또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문장들은 깊고도 또 지속적인 방법으로 나를 도왔다. 주님께 감사한다.
예를 들어, ‘복음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an Evangelical?)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제도(institution)는 그 반대를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4). 수십 년이 지났지만, 이 문장은 여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제도란 무엇인가? 제도는 바람직한 경험이 쉽게 반복하도록 돕는 사회적 메커니즘이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의 제도이고 또한 좋은 일이다. 주일마다 사역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동시에 생명을 주는 제도도 얼마든지 생명을 고갈시키는 것으로 표류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제도가 그 자체로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될 때 심지어 우상이 되는 경우이다. 그 결과 바람직하지 않은 경험이 절대화되고 영속화된다.
그런 끔찍한 배신은 결코 먼 가상에서나 존재하는 가능성이 아니다. 모든 제도는 그 반대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우리 모두 교회에서 이런 경향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보지 않는가?
교회의 맥박을 부여잡고 개혁과 부흥으로 교회를 재정비하자. 동역자들이여, 주님이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나날이 죽어가는 종교 제도나 관리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는가? 진정한 기독교는 부흥 운동이다. 우리가 최종 권위라고 부르는 성경 속에 사도행전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권위에 의지해서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갱신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주의 방식으로 하시는 주님의 사역
내 마음에서 결코 떠나지 않은 또 다른 문장은 프랜시스 쉐퍼가 쓴 ‘작지 않은 사람’(No Little People)에 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주님의 방법으로 해야만 한다.”(74)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세대뿐 아니라 모든 세대가 당면한 결정적인 문제라고 믿는다.
나의 강점과 냉철함, 심지어 포스트모던이 가져다준 아이러니한 자기 조롱으로 주님을 섬긴다면, 그건 결코 주님을 섬기는 게 아니다. 그것은 주님을 섬긴다는 자만에 빠져 사실상 주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방법으로, 오로지 주님의 방법 만을 의지해서 주님의 일을 한다면, 그분께서는 친히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우리 사역에 임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축복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친히 당신의 손으로 감당하신다면, 그것은 훨씬 더 놀라울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겉으로도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세상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처음에는 격변, 그리고 영광
내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문장은 지금 소개한 두 문장이 이미 설정한 궤적을 따른다. 청교도 운동에 관한 책, ‘거룩의 추구’(A Quest for Godliness)에서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썼다.
청교도의 관점에서 모든 교회가 미신 및 영을 그릇 인도하고 소멸시키는 모든 것의 뿌리를 뽑아야만 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도 오로지 이 영광을 위해서였으며, 또한 영적으로 활기가 넘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을 세워가는 이유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39).
사역의 우선순위와 목회적 용기에 관해 강력한 비전을 선포하는 패커의 대담한 문장은 이사야서 40:3-5을 생각나게 한다.
이사야 예언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어떤 것은 예비하고, 어떤 것은 재배치하며 또 어떤 것은 격변을 일으키고, 그 후에야 주의 영광이 나타나리라.” 이 세상은 주님의 영광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너무 많은 교회가 주의 영광을 위해 준비되지 않았다.
역사 속에 드러나는 주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장벽은 세상의 유행하는 혼란과 우리 교회의 형식에 찌든 예배 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완전히 준비된 유일한 분은 오로지 그리스도 자신뿐이다. 패커는 그 점을 이해했다. 교회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권능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신 및 영을 그릇 인도하고 소멸시키는 모든 것의 뿌리를 뽑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는 바로 이해했다.
동역자여, 당신은 패커가 외치는 예언자적 소명을 받아들이겠는가?
우리는 더 적은 것을 갈망할 것인가?
그렇다. 이 신성한 목적을 교회 안에서 추구하는 어리석고도 무모한 방법이 있다.
생명을 고갈시키는 제도화의 모든 산은 낮아져야 하고, 상한 마음과 절망이 빠지는 깊은 계곡은 얕아져야 한다. 주님의 사역은 언제나 겸손하고 끊임없는 기도, 죄와 궁핍에 대한 정직한 고백, 그리고 위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는 살아있는 권능으로 이뤄져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방식이다. 그러면 이 세대와 다음세대에 걸쳐서 주님의 영광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얻는 것이 더 적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러한 확신을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바꾸겠다는 목회자라면 내 아버지의 지혜가 도움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목회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교인보다 한 걸음 앞서가면 리더가 될 것이다. 두 걸음 앞서면 선구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세 걸음 앞서간다면, 너는 순교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지혜의 길은 의도적으로 한 발, 또는 두 발만 앞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 당신도 참을 수 있다. 은혜에 의지해서 그냥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라.
소명은 분명하다
성경이 주는 지혜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인도하라. 교회를 이 높고 거룩하고 즐거운 방향으로 계속 인도해 나아가라. 죄인이 구원받는 것도 오로지 이 영광을 위해서였으며, 또한 영적으로 활기가 넘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을 세워가는 이유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기도해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 사역은 마라톤이다.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 매달 월급만 받으며 은퇴할 때까지 버티는 사역, 편안할지는 몰라도 무감각하기 이를 데 없는 사역으로 교회에 기생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지 않겠는가?
동역자여, 장애물은 현실이다. 나도 안다. 그러나 당신의 소명이 분명하다는 것도 나는 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를 책임지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여러분도 책임질 것을 나는 안다. 우리의 친구 패커의 문장을 다시 보자. 패커는 당신에게 새로운 마음을 넣었다! 주님께서 친히 당신과 함께 하실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레이 오트런드(Ray Ortlund) |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MA), Dallas Theological Seminary(ThM)와 University of Aberdeen, Scotland(PhD)에서 공부했으며, Renewal Ministries의 회장과 TGC의 이사로 섬기고 있다. 테네시주 네슈빌에서 Immanuel Church를 개척했으며, 저서로 ‘The Gospel: How The Church Portrays The Beauty of Christ and Marriage and the Mystery of the Gospel’이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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