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고통이 시작되었던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줄곧 나를 시편으로 이끄셨다 ”
나는 삶을 영적으로 결부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종교나 믿음에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거부해야 할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나의 세계에는 종교나 믿음 같은 범주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최근에야 이를 가리키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은 바로 무신론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은 내게 하나의 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가볍게 내뱉던 하나의 이름, 사람들이 승리하거나 패배할 때 외치는 하나의 이름 정도로 말이다. 그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에게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이라 믿으며 살았다. 내가 아는 한 가장 실제적인 것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 나이 스물다섯일 때 남편 텔이 이라크에서 죽고 말았다. 당시 내 딸 에이바는 5개월이었고, 나는 이제 막 엄마가 된 때였다. 그 소식은 빠져나갈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현관문 안쪽에 서 있던 군인들을 붙잡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굳기 시작했다.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애원하는 내 목소리만 들려왔다.
조문 편지와 시편
그날 이후,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책을 급하게 넘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성경책이 어떻게 내 집에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받은 조문 편지마다 가득 적혀 있는 성경 구절들을 찾으려고 성경책을 뒤적였다.
그러다가 시편 139편에 가닿았다. 조문 편지에 들어 있던 말씀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7-8).
이 말씀을 보는 즉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러한 것을 몰랐다. 나는 단지 그 말씀이 사랑하는 남편 텔에 대한 것이길 바랐다. 나는 남편이 거기에 있다고 믿고 싶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싶었다.
고통이 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던 그때, 이 생소한 성경 구절이 무신론자이자 불신자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그렇게 내 슬픔의 샘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주었다.
혹시 텔과 더 가까이 있게 해 줄 다른 지점은 없는지, 나는 날마다 시편을 읽었다. 내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눈이 아파올 때까지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시편 40편과 18편, 30편, 27편 말씀에 사로잡혔다. 이 말씀은 비탄에 잠겨 울부짖는 내 현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만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차이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편을 쓴 이들은 자신의 울부짖음을 누군가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물은 바람에 그냥 흩어져 버리지 않았다. 자신을 짓누르는 시련이 극심한 고통으로 치닫고 있을 때, 그들은 누군가에게 울부짖었고, 그 누군가가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알았다.
슬픔과 결합되어 있는 강렬한 감정들을 느끼는 사람들을 내치지 않으신다는 것을 성경말씀에서 찾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시편의 이 구절들에서 고통 가운데 탄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희망을 상실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이 하나님은 누구신가?
당신을 나타내셨다
시편 기자들이 절망 속에서 부르짖었던 그 크신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 계시며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성경구절 속에서 텔을 찾던 나에게서 차츰 빠져 나오고, 슬픔에 빠져 있는 나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더 많이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에서 좋아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 그 지점과 거기에서 어떻게 우리를 만나야 할지를 정확하게 아신다. 내 고통이 시작되었던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줄곧 나를 시편으로 이끄셨다.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을 지나쳐 버리거나 하나님에게서 나를 숨기지 못하게 하셨다. 절망에 빠져 있는 나에게 찾아오시고 죽고 싶은 마음뿐인 나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 주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엡 2:1).
나의 죄가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때까지 나는 예수님에 관해 들어본 것이 별로 없었다. 나의 죄 때문에 내가 죽어야 마땅한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더 없이 크신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롬 3:21; 8:32; 요 3:16).
텔을 잃은 슬픔이 이전처럼 자주 나를 삼키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만 알았다. 막 가족을 이루고서 함께 꾸었던 꿈이 산산조각 나버렸다는 절망감, 아무도 텔처럼 나를 사랑해 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상실감, 홀로된 두려움, 이런 고통이 옅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새로운 소망을 갖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알고 싶었지만, 그런 삶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새 생명
그렇지만 주님은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내게 주신 믿음의 목표 곧 내 영혼의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 가실 것인지 정확히 아셨다(벧전 1:9). 주님은 로도스라는 한 남자를 내 삶에 보내 주셨다. 이라크에서 돌아온 텔의 부대 동료들과 가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로도스는 텔을 알고 있었고, 또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겸손함과 자상함에 나는 호감을 느꼈다. 그는 여러 면에서 텔과 비슷했지만, 그에게는 나에게 새로운 것을 비추는 어떤 빛이 있었다. 나는 평소 내 성격과 달리 과감하게 그에게 다가가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내게는 없는, 내가 원하는 무엇가가 있었다. 그것은 평화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로도스는 나의 우정의 마음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수많은 질문을 받아 주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씨름하는 동안, 그는 자상하게 곁을 지켜주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마침내 내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게 될 때 그는 나와 함께 기뻐해 주었다. 내가 세례를 받을 때도 그는 그 자리에 함께 했으며, 텔을 잃은 슬픔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내 딸 에이바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뻐했다. 에이바가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도 느끼지 않도록 그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이런 그와 결혼한 지 어느덧 12년이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당신의 이야기를 쓰고 계시며 그 은혜로 우리를 두르고 계신다. 내 인생의 범주에 없었던 하나님은 스스로 위대한 하나님이심을 내게 나타내 보이셨으며, 하나의 범주에 속할 수 없는 분이심을 날마다 내게 보여 주신다. 내 관심 밖에 있던 하나님이 이제는 나의 전부이시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복음기도신문]
“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당신의 이야기를 쓰고 계시며 그 은혜로 우리를 두르고 계신다 ”
제시카 그레이 로버츠 (Jessica Gray Roberts) |제시카 그레이 로버츠는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Brook Hills 교회를 섬기며, 교회의 ESL 책임자로서, ESL 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 모임을 인도하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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