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約 聖經의 難題: 왕상 13 장 (1)
“What amazes me most is to see that everyone is not amazed at his own weakness, i.e. ignorance.”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자기 자신의 연약함, 곧 자신이 무지(無知)하다는 것에 놀라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Blaise Pascal,『팡세』(Pensées) 에서)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성경 해석은 문자(文字), 문법(文法), 문학(文學)에 의한 해석 방법임을 몇 차례에 걸쳐 논했다. 마지막으로 다루어야 할 문맥(文脈)에 관한 주제는, 성경 본문을 직접 다루면서 간단히 설명하고 차후 필요한 때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성경 해석이란 이것을 기초로 해서, 이 외에도 다양한 성경 해석 방법을 통하여 “진리의 말씀을 옳게 나누는 일”(ὀρθοτομοῦντα, 딤후 2:15), 바로 이 귀한(previous)일을 주를 경외함으로 하는 것이다.
문맥(文脈, context)의 중요함
우리 말, 문맥이란 한문 “文脈”에서 왔다.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문맥을 이렇게 정의했다: “글(문장)에 표현된 의미의 앞 뒤 연결, 글의 성분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 한문 “맥”(脈)은 줄기 맥이다. 문맥은 문장의 줄기요 글을 이해하는 중요한 핵심이 된다.
영어는 context, 컨텍스트(context)란 “텍스트가 서로 연결되었다”는 말이다. 문장이 서로 다 연관이 되어 매듭이 지어져 있다는 말이다. 서로 연결이 되어 있고 연관이 있으므로 글을 읽을 때는 전-후 문맥이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다.
한 단어 안에서도 “잘했다”와 “잘 했다”는 전혀 다른 뉴앙스를 가지고 있다. 하물며 사람의 말도 그러거니와 성경도 문맥은 매우 중요하고 앞 뒤를 무시하고 뚝 잘라서 결코 말할 수 없다. 심지어는 단어 하나에도, “아”, “어” 감(感)은 물론이거니와 히브리어에는 악센트(accent) 만 달라도 해석이 달라진다. 특히 히브리어는 독특한 문장 어순(word order)을 가지고 있어 문맥이 너무 중요하다. 따라서 성경은 정말 단어 하나 하나를 짚어 가며 살펴서 읽을 필요가 있다.
“보라!”(הִנֵּה, hinneh, behold)
예를 들어, 히브리어 감탄사에 해당하는 단어 “보라”(behold)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문맥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강조 언어다. 히브리 단어 “הִנֵּה”(힌네!) 인데, “보라”(רְאֵה see)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의 명령형과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중요한 히브리 단어다. 해석은 동일하게 “보라”로 할 수 있지만 문맥이 흘러가는 뉘앙스와 의미는 전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후자(רְאֵה, see)는 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라는 의미이고, 전자(הִנֵּה, behold)는 눈을 뜨고 보고 있는데도 영안이 어두워져 보지 못하니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제발 정신차리고 눈을 크게 뜨고 잘 보라는, 볼 것을 보라는 말이다. 하나는 동사(רְאֵה, see)이고 하나는 감탄사(הִנֵּה, behold)에 해당한다.
그런데 참으로 어찌된 일인지 우리 성경은 이 중요한 단어를 많은 부분에서 번역을 빠트리고 말았다. 누가 이 단어 하나만 정리해서 문맥이 어떻게 흘러가는가 정리를 해도 한국 교회에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열왕기상 3장을 보면 기브온에서 하나님께서 밤에 꿈가운데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물었다. “내가 무엇을 줄까 너는 구하라”(3:5) 솔로몬이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듣는 마음”(לב שומע , 레브 쇼메아)을,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는 내용이 나온다(3:9). 듣는 마음을 구한 솔로몬의 마음을 흡족히 여기시고(3:10)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왕상 3:11-15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이 단락에는 문맥의 흐름에 아주 중요한 히브리 단어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위에서 언급한 감탄사 “הִנֵּה”(힌네, behold!)이다. 무려 3번이나 기록되어 있는데(3:12 두 번, 15 한 번) 번역을 아예 하지 않았고 또 다른 단어는 빼먹고 부분적으로 번역을 했다.
만약 어느 누가, 여러분이 한 말을, 그 말이 그냥 말이 아니고 중요한 말을 빼먹고 거기서 강조해야 할 말이 아닌데도 다른 곳에서 붙여 했다면 어떻겠는가? 분명 잠을 못 잘 것이다! 당장 가서 따질 것이다. 중요한 법적 문제라면 소송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는 정작…? 참으로 아이러니(irony)다!
넓은 문맥을 항상 염두 해 두어야 함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항상 앞 뒤 전 후로, 때로는 저 멀리 넓은 문맥까지 염두 해 두고 있어야 한다. 작게는 읽는 본문의 말씀이 앞, 뒤 장(chapter), 전 후 단락(paragraph)에 연결되어 있고 더 나아가 크게는 열왕기를 읽을 때, 열왕기를 기록한 사가(史家)의 저자의 의도까지 문맥을 염두 해 두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저자의 의도를 놓치지 않고 끄집어 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열왕기 사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열왕기 사가는 신명기 역사(The Deuteronomistic History)라는 역사관을 가지고 열왕기를 써 내려갔다. 신명기 역사란 신 28장에 근거한 사관을 말한다.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이요 불순종하면 저주와 멸망을 가져온다는 역사 방식이다. 열왕기를 읽을 때는 항상 이러한 역사관을 가지고 역사를 쓴, 사가의 마음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우리가 다루게 될 본문은 선지직(先知職), 선지자와도 관련이 있어, 저 앞으로 열왕기가 아닌 신명기 본문까지 염두를 해 두고 본문을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짧은 문맥에서만 보면 혼동이 올 수 있다.
열왕기상 13장 본문(text)
이제 문제를 제기했던 열왕기상 13장 본문으로 가 보자. 긴 시간을 기다려 주고 함께 글을 읽으면서 문제를 지적해주고 의견을 나누어 주며 기도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말씀도 성경의 난해 본문 가운데 하나여서 여러 문맥을 꿰뚫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아무리 문자, 문법, 문학적인 해석을 잘 시도했어도 그게 문맥에 맞지 않으면 올바른 해석이 될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다소 글이 길어져도 인내함으로 기도하면서 꼭 정독(精讀)을 해주시길 바란다.
먼저 성경을 펴고 본문 전체를 3번을 읽도록 하라. 성경 묵상과 해석은 올바른 성경 읽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올바른 성경 해석이란 성경을 자세히 읽는 것(close reading) 이다.
인간 이성으로 아무렇게 성경을 다루어도 되나?
열왕기상 13장은 구약의 난제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본문들 가운데 하나이다. 독자 여러분도 말씀을 볼 때 마다 궁금증을 많이 가졌을 것이다. 본문은 의문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또한 몇 설교 동영상을 주의 깊게 들은 분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저렇게 성경을 해석해도 되나? 씁쓸함만 남을 뿐, 목마름은 더해 갔을 것이다. 안들은 것만 못하고 씁쓸함이 떠나지 않고 남는 것은, 성경이 침묵한 내용들을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무리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부분을 부패한 인간 이성으로 짐작하여 아무렇게나 성경을 다루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성경 해석의 원리 가운데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는데, 성경이 가는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어야 한다. 선을 넘으면 좋은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이미 성경 해석학 글을 올리면서 몇 차례 강조했지만 성경은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드러나는 법이어서 그 사람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가 가지고 있는 성경관을 알 수 있다. 그 무엇보다 성경관은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신학이 중요하고 신학의 기본 지침(指針)이 되는 성경관을 먼저 잘 배우고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배우지 않으면 속아 넘어간다. 왕상 13:18에 나온 그 선지자처럼 말이다.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כִּחֵשׁ)이라”
시원한, 더 이상 묻고 싶지 않는 히브리 텍스트
물론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늘 강조하지만 히브리어 텍스트를 아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하다. 히브리어!? 운명으로 필자를 만난 독자들은 내게 수없이 히브리어의 중요성을 들었을 것이다.
“당신이 만약 언어를 알았다면 최고의 언어를 배우시오!” 어느 누군가 말했다. 최고의 그 언어? 어떤 언어일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맨 처음 성경이 기록된 “그” 언어라고 말하고 싶다. 배우면 배울수록 그 언어, 아~! 다른 언어가 아닌 히브리어(Hebrew), 어떤 난제를 만났을 때 알고 싶고 그래도 목말라 더 묻고 싶을 때, 히브리 텍스트를 만나면, 더 이상 묻고 싶지 않는, 아 그거면 됐네!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마치 잠언(25:13)에 적힌 말씀처럼 말이다.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은 언어,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언어! 이 잠언 안에는 우리 번역으로는 얼른 감이 오지 않는 매우 중요한 독특한 히브리어 표현이 들어 있다. 어쩌면 오늘 구약 본문 난제를 푸는데 선지자적인 문맥에서 매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언 25:13 히브리 텍스트
열왕기상 본문과는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본문의 난제를 푸는데 중요하기에 잠깐 잠언 25:13절을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잠언 25:13
충성된 사자(צִיר נֶאֱמָן)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대부분 독자들은 히브리어를 모를 경우 이 구절을 “종과 주인”의 “충성”이란 문맥에서 잠언 말씀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충성”(loyal)의 문맥이라기 보다는 히브리어 “נֶאֱמָן”(네에만) 이라는 단어 때문에 “신실함”(נֶאֱמָן)의 문맥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여기서 그를 보낸 이로부터 보냄을 받는 자는 “신실한 사자”요 “신실한 메신저”(faithful messenger) 이다. 마치 나라의 “대사”(외교관)와 같고, 한 마디로 그는 보낸 이의 입, 대변인(spokesman)이다.
보낸 이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메신저로서 사명을 다했을 때, 그는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와 같이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것이다. 그는, 메신저는 예레미야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입이다(렘 1:9).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보내는 자의 말을 하지 않고 자기 말을 하는 날에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끝이다. 생각해 보라. 청와대 대변이나 어떤 정당의 대변인이 자기 말을, 다른 말을, 짐작해서 말을 하고 대답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
잠 25:13에서, 잠언 기자는 의도적으로, 히브리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워드 플레이(word-play, 언어유희, קָצִירצִיר נֶאֱמָן)를 통해 복음의 빛이 발휘해야 할 때, 보냄을 받은 자의 그의 사명이 얼마나 막대하고 중요한지를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어를 아는 자는 잠언 기자가 히브리 문학 기법을 사용하여 본 구절에서 절절하게 말하고 있는 그 의중(意中)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자”(messenger)라고 하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쉬운 히브리 단어가 따로 있지만,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צִיר”(찌르) 라고 하는 독특한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현대 히브리어 번역 성경은 잠 25:13절에서 바로 이 단어, “צִיר”(찌르) 대신 “שָׁלִיחַ”(샬리앜)을 사용함으로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히브리 텍스트를 잘 번역한 NASB와 원문을 보자. 넓은 문맥에서 본문에 들어가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보고 넘어가겠다. 히브리 악센트, “아트나흐”(atnach)는 그를 보낸 자들(לְשֹׁלְחָ֑יו)에게 있다. 본 절에 있어서 히브리 악센트가 있는 단어! 역시, 열왕기상 13장의 난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כְּצִנַּת שֶׁלֶג בְּיוֹם קָצִיר
צִירנֶאֱמָןלְשֹׁלְחָ֑יו
וְנֶפֶשׁ אֲדֹנָיו יָשִׁיב
Like the cold of snow in the time of harvest
Is a faithfulmessenger to those who send him,
For he refreshes the soul of his masters.
영어 성경인 KJV ESV NET 바이블도 “충성된”으로 번역을 하지 않고 NASB 처럼 “신실함”(faithful)으로 번역을 했다. 이 한 단어가 선지서, 선지자라고 하는 크고 넓은 문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를 그대로 닮아 “신실”(נֶאֱמָן) 해야 한다. 이 신실함이 있었다면 열왕기 상에서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교훈이니까 마음에 새겨 두자. “נֶאֱמָן”(네에만, faithful) “נאמנות”(네에만우트, faithfulness) 우리가 잘 아는 “아멘”(אמן, Amen!)하고 어원이 같은 단어다.
히브리 텍스트의 성격: Brevity Clarity Neatness
히브리 텍스트는 보면 볼수록 간결하고 명료하고 깔끔하다. 간결(Brevity) 명료(Clarity) 깔끔(Neatness)! 그 대신 인간의 이성이 들어간 신학은 죄송하지만 지저분하다. 나는 열왕기상 13장의 결론이 어떻게 맺어질지 모르지만(지금 글을 쓰고 있는 중이기에) 히브리 텍스트의 성격을 신뢰 하기에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끝날 것을 믿는다. 히브리어가 가지고 있는 그 속성대로 시원하게! 몇 년 동안 묶었던 찌끼가 확 내려간 것처럼 말이다. 할렐루야!
To be continued
계속됩니다.[복음기도신문]
김명호 | 헤브론선교대학교 성경언어대학 교수. 복음과 기도의 기초 위에 성경의 원어 연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선교완성을 위한 다음세대를 세우는 사역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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