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TGC 칼럼] 전례없던 복음 전도를 다시 이루려면

ⓒ 안호성

“복음을 단단히 붙잡지 못할 때, 기쁨을 잃고 두려움에 빠질 뿐 아니라 우리는 은혜까지 잃고 교만에 빠지게 된다… 아니, 교회도 믿지 않는 복음을 왜 이 세상이 믿어야 하는가? ”

기독교인이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기보다 도리어 해가 된다고 여기는 새로운 시대로 우리는 지금 진입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문화는 점점 더 신앙에 대해서 적대적이 되어가고, 그럴수록 하나님, 진리, 죄 그리고 사후의 삶에 대한 믿음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현대 문화는 기독교를 공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제 교회 지도자는 아예 교회에 올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나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새로운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달라도 너무 달라진 문화 환경 속에서 교회가 그들을 어떻게 기독교인으로 양육하고 만들어가야 할지를 찾아야 한다. 이런 노력을 서구 문화와의 선교적 접촉(missionary encounter) 위한 ‘밖을 향한 움직임’(Outward Move)과 ‘안을 향한 움직임’(Inward Move)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이 개념을 좀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겠다. 지금 말하는 선교적 접촉이 결코 문화로부터 후퇴해 기존의 사회와 거의 관계를 갖지 않는 고립된 공동체로 숨어들어 가자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전혀 기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서 강제로 기독교적 기준과 믿음을 강요하자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세상과 연관성을 맺어 지금 문화에 완전히 적응함으로 아예 그 문화에 동화되자는 것도 아니다.

선교적 접촉

선교적 접촉은 후퇴 전략과 달리 연결하는 것이고 동시에 동화 전략과 달리 대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정치적 인수 전략을 포함한 다른 모든 전략과 달리,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회심시키자는 것이다. 선교적 접촉을 하는 교회라면 후퇴 전략이 지향하는 고유성, 그러니까 세상과 다른 교회만의 특별함을 유지해야 할 뿐 아니라, 동화 전략이 요구하는 관련성, 그러니까 이웃을 인정하고 섬기는 면까지 함께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는 정치적 영향력을 활용한 접근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회개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지금 서구 문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비기독교인(non-Christian)이라는 호칭 보다는 탈 기독교인(post-Christian)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하기에, 이제는 선교적 접촉 방식 또한 교회가 과거에 했던 식으로 해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서구 문화를 상대하는 선교적 접촉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다섯 가지 요소를 소개하고자 한다.

1. 기독교 고등 이론

문화를 향해 복음을 설명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복음에 비춰서 문화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그동안 변증론은 기독교의 진실에 대한 논증과 증거 제시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논증의 경우, 변증론이 향하는 곳은 신약 성경(고전 15장)이었다. 그러나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부터 어거스틴(Augustine)에 이르는 초창기 기독교 변증가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 관습과 믿음이 이교도 문화가 지향하는 표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이교도 문화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개발함으로 어떻게 이교도 문화가 그들 스스로가 가진 표준에 비춰 보더라도 이미 실패했는가를 드러냈다.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에서 어거스틴은 오늘날 고등 이론(High Theory)이라고 부르는 방식을 개발했다. 그는 복음을 사용해서 당시의 만연한 문화를 비판했다.

오늘날 성경적 또는 기독교적 고등 이론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세속적 문화가 요구하는 합리적 기준에 부응하는 대신 오히려 그 기준을 거부하는 동시에 그 속에 담긴 중립성, 객관성 및 보편성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기독교적 고등 이론은 후기 근대의 세속적 세계관을 제대로 분석함으로 그 세계관이 지향하는 신념 체계에 근거할 때 생기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 세계관이 기본으로 삼는 주장(narratives)이 어떻게 인간 본성 및 직관과 맞지 않는지를 보여줄 수 있고, 그 결과 복음을 거기에 대한 반론 또는 대안(counterpoint)으로 선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아를 완전히 해방시킨다는 미명 하에 현대의 세속적 사고의 틀이 어떻게 우리를 지금의 상태로 만들었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사고의 틀은 다음과 같다.

·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
· 모든 관계는 거래이다.
· 모든 정체성은 지극히 취약하다.
· 그리고 성취의 모든 근원은 실망스럽다.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객관적으로 봐도 자유롭지 않다. 지역 공동체와 가정이 쇠락함에 따라 주관적으로 봐도 자유롭지 않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내적 외로움과 치명적인 중독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결국 학계를 포함해서 후기 근대성이 가진 치명적인 결함을 알고 있는 비기독교인 학자와 사상가의 도움을 받은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금의 문화 속에서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 절제되지 않는 개인주의와 상대주의가 초래하는 문제점에 주목하고 있다.

2. 진정한 탈 기독교 왕국 복음주의의 역동성

서구 문명은 다양한 전도 방법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은 한 가지 전제 위에서 만들어졌는데, 그건 비 기독교인이 여전히 하나님, 진리, 죄, 그리고 사후세계의 기본 개념을 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를 찾고 있으며 또한 복음에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문화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제 초대 교회가 가졌던 복음적 역동성을 오늘날에 맞는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게 필요하다. 오늘날과 비슷하게 복음에 적대적이고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 속에서도 초대 교회는 회심을 통해 성장을 이뤄냈다.

그런 역동성 안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의 요소가 들어있다.

① 의도성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초대 교회 시절 80% 또는 그 보다 더 많은 비율의 사람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성직자 또는 전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이코스(oikos)라고 불리는 개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친척 또는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한 평범한 기독교인에 의해서라고 추정했다. 누구나 자기가 잘 아는 사람, 함께 일하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복음을 설명하면 귀를 기울이게 된다.

② 대안이 되는 대답

구원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비 기독교인이 깨닫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서) 그들이 이미 갖고 있는 답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여기서 ‘그들이 갖고 있는 답’(people’s answers)의 의미는 삶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서 그들 나름대로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의미, 만족, 자유, 정체성, 용서하고 용서받는 방법, 도덕적 질문에 대한 해결 방법,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 그 누구도 이런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지금의 문화가 제시하는 답은 결코 만족을 줄 수 없다. 그렇기에 (의도성을 통해) 그들의 관심을 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적절한 시간이 되었을 때 기독교가 제시하는, 그 무엇도 능가할 수 없는 만족함을 제시할 수 있다.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것을 제공한다.

· 고난으로 사라지지 않는 삶의 의미, 오히려 고난으로 더 깊어지는 삶의 의미
· 환경에 지배 받지 않은 만족
· 공동체와 사랑의 관계를 얄팍한 거래로 바꾸지 않는 자유
· 업적에 근거하지 않고 왕따(exclusion)에도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정체성
· 죄책감을 이기는 방법, 쓴 뿌리 또는 수치심 없이 용서하는 방법
· 스스로를 괴롭히는 압제자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정의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기초
· 미래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침착함과 평안으로 대하도록 하는 방법

다시 말해서, 그들의 방법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이런 욕망과 필요의 정체가 그들 속에서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필요라는 사실을 그들이 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③ 복음

후기 근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설명해야 한다.

복음은 다름 아니라 “주로부터 오는 구원”(요 2:9)이다. 복음을 소개하는 것은 언제나 다음 두 가지 포인트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 나쁜 소식: 당신은 지금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하고 있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 좋은 소식: 당신은 노력이 아닌, 오로지 그리스도 한 분만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

전통적 문화에서는 “삶의 의미는 착하게 사는 것”이라는 말이 통했지만, 이제 후기 근대 문화에서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달라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생의 의미는 자유로워지는 것”이 되었다.

3. 카테고리를 규정하기 힘든 사회 프로젝트

‘신들의 파괴자(Destroyer of the gods)’에서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는 로마에서 기독교가 가장 박해받는 종교일 뿐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당하는 불이익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허타도가 찾아낸 것은 아주 독특한 기독교 사회 프로젝트였다. 일종의 독특한 인간 공동체인데 너무 독특해서 당시에는 어떤 카테고리에 넣을 수가 없었고, 그 사실은 오늘날도 바뀌지 않았다. 그것은 적어도 다섯 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요소를 더 길게 설명할 수 있지만, 또한 그 모든 요소가 모여서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대 교회가 수행한 사회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다.

· 다 인종 및 다 민족
·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는 데에 전념
· 용서에 대한 다짐이라는 특징을 가진 보복 금지
· 낙태와 유아 살해에 대한 강력하고 실질적인 거부
· 혁명적인 성 윤리관

초대 교회 공동체는 공격적이면서도 또한 매력적이었다. 로마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겠다는 일종의 전략적인 생각으로 이런 사회 프로젝트를 한 게 아니었다. 이 다섯 가지 요소는 다름 아니라 성경적 권위에 굴복한 결과물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다 성경이 명령하는 것이다. 공격적이면서도 동시에 매력적인 이 다섯 가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디에 포함시켜야 할 지, 그 카테고리가 불분명하다. 처음 두 가지는 “자유주의적”으로 들린다. 그리고 마지막 두 가지는 “보수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세 번째 요소는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는 처음 두 가지 또는 끝의 두 가지 중 하나를 포기하라는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다. 결국 이 네 가지를 다 지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다섯 가지 중 그 어떤 하나라도 포기하는 순간 기독교는 특정 정치 프로그램의 시녀로 전락하게 될 것이고, 선교적 접촉에 필요한 동력을 잃게 될 것이다.

4. 디지털 시대에 맞는 반 교리 교육

“교리 교육”이라고 할 때 지금 아주 엄숙한 질문과 대답으로 이뤄진 교리 문답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교리 문답을 찬성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이 용어를 통해 말하고 싶은 바는 이것이다. 기독교인을 양성할 때 교회는 오로지 성경과 기독교적 가르침을 통해서 그 목표를 이뤄가야지 결코 이 세상 기준에 따라서는 안 된다. 솔직히 말해 오늘날 현실은 교회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교리 교육을 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교리 교육과 관련해서 다음 세 가지를 잊고 있다.

① 교리 교육은 언제나 반 교리 교육이었다

종교 개혁 기간 동안 교리 교육의 폭발이 일어났다. 수백 명의 지도자가 앞다투어 새로운 교리 문답을 썼다. 이것은 단지 교인들에게 개신교의 가르침을 알려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비 개신교인이 되는 유일한 대안인 가톨릭 교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예방 주사 효과도 또 하나의 이유였다. 교리는 개신교인으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당시 지배적 대안이었던 가톨릭 교리를 해체함으로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역할까지 감당했다.

② 교리 교육은 도덕 생태계의 일부이다

수 년 간 교회에서 자라고 배운 수많은 젊은이들이 “아니, 두 사람이 정말 서로 사랑하는데 섹스를 하는 게 뭐가 문제라는 거죠? 난 이해를 못 하겠어요” 라고 말하는 것을 보는 건 하나도 놀랍지 않다. 놀란 부모들이 성경 구절을 들이민다고 효과가 있을 리 없다. 왜 그럴까? 첫 번째로 그건 젊은이들이 가진 섹스관이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하는 데에 근간이 되는 현대 사회의 정체성과 자유 그리고 도덕성에 대한 정체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현대 사회가 지향하는 사고가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에 대한 폭로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③ 교리 교육은 공공 영역에서 드러나는 신실한 기독교인의 존재감을 포함한다

우리는 지금 비기독교적 사고와 주제(이성/과학, 개인주의, 상대주의, 물질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 말은 교회가 기독교인을 훈련시켜서 그들의 믿음이 공적 영역인 직장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기독교인이 제대로 무장될 수만 있다면, 정치적 접근을 통해서 기독교가 더 우월적 힘을 갖는 방식 또는 비록 다른 영역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혼자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는 효과적이며 후퇴적인 방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복음은 오늘날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금과 빛’이 될 것이다.

5. 끝까지 은혜

우리는 복음의 은혜와 종교적 도덕주의의 차이를 똑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 왜 개신교 교회가 끊임없이 자기 의, 지배 그리고 배제라는 유혹에 빠지는가? 왜 교회는 초대 교회의 사회 프로젝트와 같은 성과를 만들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지금 교회는 신앙(faith)의 핵심을 바로 붙잡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도덕적 노력으로 구원받았다는 생각으로 되돌아갈 때, 우리는 교만과 동시에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과 세상이 우리를 칭찬해야 한다는 생각이 주는 교만과 더불어 정말로 제대로 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에 생기는 두려움이다. 그렇기에 오로지 그리스도로 인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존재론적(또는 교리적)으로 제대로 붙잡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기쁨을 잃고 두려움에 빠질 뿐 아니라, 은혜를 잃고 교만에도 빠지게 된다. 교회가 잘못하는 것을 잡아내는 데에 있어서 빨라도 너무 빠른 세상은 자연스럽게 문제 있는 교회가 증거하는 복음을 무시하는 것을 합리화한다. 그렇게 하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교회가 사랑과 봉사가 아닌 지배와 주도의 방향을 계속해서 추구한다면, 그 자체로 교회 스스로가 자기네가 전파하는 복음을 사실상 믿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된다. 아니, 교회도 믿지 않는 복음을 왜 이 세상이 믿어야 하는가?

도전은 만만치 않다. 그러나 복음은 희망을 가져다준다. 복음 없이 희망은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우군(encouragements)이 있다.

① 기독교 교세의 세계적인 증가

20세기와 21세기가 가져다 준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비 서구 지역에서 기독교 교세의 폭발적인 증가이다. 그 대부분이 복음주의 또는 오순절 계통이다. 최소한으로만 잡아도 오늘날 기독교인의 70%는 비서구권에 몰려 있다. 그리고 서구권의 기독교인도 상당수는 비서구권에서 들어온 백인 이외의 인종이다. 가나에는 영국과 미국을 합친 것 보다 많은 숫자의 장로교 신자가 있다. 나이지리아에는 영국과 미국을 합친 것 보다 많은 숫자의 성공회 신자가 있다.

또 하나의 현실은 북미와 유럽의 세속적 인구가 하강 추세에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복음 전도와 출생 덕분에 기독교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또한 이 증가에는 이민과 선교 사업이 한 몫을 담당하고 있고, 서구 여러 지역에서 교회는 계속해서 부흥하고 있다. 그 결과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와 “특정 종교가 없음”이라고 말하는 인구는 앞으로도 점점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② 선택된 종교의 위력

어떤 종교는 자연스럽게 대물림된다. 가족적 배경 또는 국적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종교도 있다.

“당연히 루터교지요, 나이지리아 사람인데요.”
“이탈리안이요, 그러니까 가톨릭이죠.”
“힌두에요, 인도 사람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다. 젊은 사람일수록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교, 가톨릭 그리고 주류 개신교가 급격한 감소세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면에서 복음주의가 표방하는 믿음은 이런 문화적 상황에 잘 맞는다. 복음주의는 무엇보다도 믿음에 대한 개인의 결정과 개인적인 회심 체험을 중요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문화에 잘 접목되는 복음주의 신앙이지만 그와 동시에 올바른 개인적 선택을 하도록 강하게 도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과 별도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삶은 욕망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권위에 복종하는 삶이라고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③ 도시의 문화적 형성력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 성장의 동력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비 백인, 비 서구 사회 젊은이가 주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서구 사회의 큰 도시가 새롭게 성장하는 교회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 도시일수록 인구는 젊고 또 다 민족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현대 사회에서 문화를 형성하는 자궁의 역할을 한다. 도시 근교의 재능까지 하나로 모으는 응집을 통해 새로운 혁신과 창의적인 기업이 생겨나고 또 다른 곳으로 뻗어 나간다. 교회가 도시에서 부흥한다면, 또한 점점 더 늘어나는 도시의 기독교인이 자신의 일터에서, 또 예술과 미디어 및 아카데미 영역에서 신앙과 삶을 조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이 사회에서 소금과 빛이 될 것이다.

④ 전례가 없던 일

1900년까지 비 서구 사회, 기독교가 들어가지 않은 나라에서 빠른 성장의 부흥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부흥이 일어났다. 한국의 부흥과 동 아프리카의 부흥을 보라. 반면 탈 기독교, 세속적 사회에서 그 동안 부흥이 발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위대한 새로운 역사는 언제나 발생하기 전까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수도원주의 부흥 운동은 발생하기 전까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종교개혁도 전례가 없었고, 미국의 대부흥도 발생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게는 이 약속에 만료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복음기도신문]

팀 켈러 | 뉴욕 맨하탄 리디머 장로교회 초대 목사. City to City 회장. The Gospel Coalition 설립자.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를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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