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아쉬웠던 신앙생활. 만족함이 없던 목회의 삶. 어떤 때는 굉장한 만족과 뿌듯함을 누렸다가 어느 순간은 의문과 허무감에 휩싸였다.
목마름이 내면에서 깊어질때 하나님은 나를 복음 앞에 세우셨다. 그리고 후회함이나 머뭇거림 없이 선교사로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셨다. 선교사훈련 기간 중 정말 전심으로 반응했고 충성으로 순종해 나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전심의 반응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그 이상의 것, 더욱 깊은 내면이 반응하기를 원하셨다. 훈련받는 시간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의 현장이었다.
내게 진리가 결론이 되도록 계속 말씀하셨다. 나의 99% 최선과 성실이라는 옛 습관에 젖어 100% 진리로 결론내지 못한 믿음 없는 부분을 드러내 주셨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영광,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에 대해 알려주셨다.
‘사랑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더니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지체를 보여주셨다. ‘믿음으로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더니 한 푼의 재정도 허락지 않으시고 장거리를 가라고 도전하셨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배하겠습니다.’라고 결단했더니 녹초가 된 내 몸과 마음의 지독한 어려움을 허락하셨다.
‘생명이 주께 있습니다.’라고 고백했더니 딸 아이에게 무서운 고열과,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뱃속의 아이와 산모가 다 죽는다는 의사의 위협소리를 듣게 하셨다.
언제 어디서든 항상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복음이면 충분하다는 나의 고백이 실제가 아님을 보여주셨다.
그러다가 문득 ‘이젠 웬만하면 하나님께 고백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산 존재로 이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 외에 다른 고백을 할 수가 없었다.
또 하나의 벽이 있었다. ‘왜 저렇게 비효율적으로 일을 할까? 한마디면 되는데 왜 30분이나 말할까? 왜 시간을 안지킬까?’ 지체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렇게 판단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어디서 온 것인지 무섭도록 보여주셨다.
강퍅함! 정말 무서운 이 단어가 내게도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밝혀주실 때 탄식하며 그분의 긍휼과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예배는 좀 힘드네요!’라는 고백에는 뭔가 모순이 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무진장 힘쓰고 애쓰는 나! 어떻게 하면 예배를 잘 드릴까 고민하는 나! 무엇이 문제인가?
주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예배자이지 예배드리려고 힘쓰는 자가 아니다! 너는 율법을 지키는 자이지 지키려고 애쓰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은 나의 열심과 애씀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함에 있었다. 믿음으로 순종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었다. 내 존재의 구석구석을 주님이 사시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었다.
새끼손가락 하나도 내가 주장하며 움직일 수 없는 존재, 오직 주님이 사시는 것, 모든 부분에서 주님의 주권이 실제화 된 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모든 것은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며, 믿음으로 영화롭게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다하셨고, 다 하신다는 사실! 변개치 못할 진리였다.
다시 한 번, ‘다 이루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취한다. 주님의 모든 것을 실제로 경험케 하시며 그분의 완전한 형상에 이르기까지 내게 일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동일하게 지체들과 교회와 열방의 영혼들에게 행하실 주님을 찬양한다. 할렐루야![GNPNEWS]
김도승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