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호 / 믿음의 삶]
6개월 동안 선교훈련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첫 발걸음을 내딛던 순간, 마음의 고난이 있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할 일이 있을 때, 사람은 제 발로 하나님 앞으로 나온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얽히고설킨 복잡한 시간을 보내다가 하나님 앞에 서기를 주저 없이 결단했다. 어떤 것도 변명할 여지없이 부르심이 확실하고 당연하기에 군소리 없이 순종했다. 기대가 생겼고, 매시간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말씀 앞에 섰다.
강의를 들으며, ‘복음이 내 삶에 실제 되지 않고서 누군가를 가르치고 선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이 생겼다. 나는 다음세대와 청년들을 자주 만나 교제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복음 앞에 서고 보니 그동안 복음을 잘 알지 못해 외모, 게임, 스포츠 등 쓸데없는 수다로 교제한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교제의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믿는 내가 청년들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이것밖에 없나? 아무리 시간과 물질을 쏟아 부어도 변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상실감만 더해갔다. 나는 왜 이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할 수 없는 걸까?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믿니?”라고 물으면 “왜 믿어야 해요. 하나님은 왜 보이지 않죠? 어떻게 하면 믿음이 생기는데요? 확신을 어떻게 가져요?”등의 되돌아오는 질문에 속 시원히 답할 복음이 내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난 교제는 단순히 함께 하는 것이고 즐기는 정도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도저히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마음의 갈급함이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완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 처음 훈련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기를,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소원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최대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기를 결단하고 모든 일에 이익을 얻기보다 손해 보기를 원했다.
화가 날 때도 최대한 혈기를 내려놓고 살아보려고 결단하며 나아갔다. 보고 듣고 배우는 말씀들을 기록하며,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넌지시 질문을 해보기도 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으면 교제를 하며 친분을 쌓아갔다.
신기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는 소리에 귀 기울여 주었다. 이전에 콧방귀만 뀌던 한 친구가 내가 전하는 복음에 반응하는 것을 보았다. “네가 하는 말씀들을 들으면, 나도 그 말씀 앞에 서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나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네가 이렇게 말씀을 확신 있게 이야기 하는 모습은 처음 봐. 네가 느끼는 하나님을 나도 만나고 싶고 나도 너처럼 경험하고 싶어.”라는 고백을 들었을 때 너무 놀랐다.
‘하나님, 제가 지금 진리로 교제를 하고 있어요! 감사하게 제 안에도 이제 하나님의 마음이 품어졌나 봅니다.’ 진리에 대한 교제가 늘 부담스럽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복음으로 늘 전도하고 싶어 고민했는데, 내 삶 속에서 이것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웠다. 이제 나도 복음 안에서 선교적 존재로 살 수 있음을 고백한다.
약 2주간의 아웃리치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섬세하시고 인자하심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랑인지 누렸다. 한 나라의 백성, 가정의 한 사람인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세우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시고 협력하게 하시는지, 중보자로 세우셔서 완전히 연합케 하시는지…. 모든 환경과 상황을 만든 치밀하신 하나님은 정말 나의 위대한 왕이시다. 그분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벅차고 감격스럽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복음기도신문]
진미정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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