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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벌레 같은, 그리고 소중한

사진 : Unsplash의 Jonathan Kemper

2011년, 오랫동안 사랑받던 토크쇼 ‘오프라’의 마지막 편을 보면서 나는 오프라 윈프리라는 진행자의 존재와 그녀가 미국 생활에 끼치는 놀라운 영향력을 목격했다. 그날 가장 강하게 내 인상에 남은 장면은 그녀가 시청자와 팬에게 남긴 권고였다. 당신은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말이었다. 그녀는 청중을 향해 계속해서 이 문장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이건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이며, 인스타그램 현장, TV, 영화, 비공개 및 공개된 대화에 쉬지 않고 등장하며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더 강한 자존감의 추진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을 뿐 아니라, 정신 건강과 정서적 안정에 초점을 맞춘 치료 문화의 일부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말을 반복해서 또 충분하게 들을 때면 아마도 당신은 자신이 받는 축복이 과분하다고 느끼는 부적절함을, 또는 여간해서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까지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다. 

소중하거나 아니면 벌레이거나?

신학적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예배와 헌신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선언하는 수많은 찬양에 익숙한 신자라면 쉬지 않고 서로의 “소중함”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은혜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께서 무가치한 자에게 과분한 사랑을 베푸신다는 게 아닌가? 

탕자 비유의 핵심은 자신이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눅 15:21)는 탕자의 고백이다. 또 다른 비유는 충실한 사람들을 “자격 없는 종들”로 묘사한다(눅 7:7-10).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전 15:9)고 주장했다. 공동기도서가 드러내는 우리의 역할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님의 식탁에 다가갈 수 있는, “합당치 않은 죄인”이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많은 찬송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 사이의 깊은 협곡을 강조한다. 존 뉴턴은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를 “감미로운 소리”(sweet sound)라 생각했는데, 그건 은혜가 비참한 자기(a wretch)를 구원했기 때문이다. 이삭 와츠(Isaac Watts)도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라며 감격했다. 그리고 찰스 웨슬리의 위대한 삼위일체 찬송인 “아버지, 아들, 성령”은 신자의 고백 (“나 같이 불쌍한 벌레”)과 거룩함의 영광스러운 부르심(“당신의 큰 영광이 살아나기를 원하나이다”)을 병치시킨다. 

이 찬송은 시편 기자의 절망(시 22:6)과 빌닷이 욥에게 한 연설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인간의 죽음과 유한성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벌레와 구더기를 사용했다(욥기 25장).

인간 죄성의 파라독스 

말씀과 찬양에서 우리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려는 유혹에 대한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가치”에 대한 지나친 강조의 수정이 단지 “벌레 신학”이라고 불리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 반대편에 원죄라는 역설 속에서 힘을 잃도록 만드는, 인류를 타락시키는 또 하나의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길이 있다.

성경은 두 가지 진리를 동시에 가르친다. (1) 우리는 내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엄청나게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이다. (2) 우리는 비천한 죄인이고 따라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인간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은혜는 당연한 결과가 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가치 있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가면 회개가 불필요하다. 당신처럼 가치 있는 존재를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반면에 인간의 타락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은혜가 무력해진다. 벌레에 불과한 나는 결코 결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 방향으로 가면 회개가 불가능하다. 나 같은 놈한테 굳이 하나님이 왜 관심을 가지시겠는가? 

그러나 성경이 드러내는 인간의 초상화는 훨씬 더 설득력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는 인류의 완전한 죄성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까지 모두 다 발견한다. 본문에 충실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진리,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헤아릴 수 없는 소중함과 가치, 그리고 우리를 아예 구원받을 자격이 없도록 만드는 죄의 만연함을 같이 강조해야 한다. 

저주받은 그리고 위대한

오프라 윈프리 버전의 미국 민속 종교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리 죄를 조금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거의 신성한 존재, 우주의 중심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신자들 사이에서 그런 실수에 대한 더 극단적인 반응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 우리 자신을 단지 절망적으로 타락한 존재, 그래서 한동안 이 땅에서 기어다니는 벌레에 불과하다고 상상하게 만든다. 

성경이 그리는 모습은 결코 (하나님이 아닌) 우리를 대단히 가치 있다고 착각하는, 스스로 신격화한 상태에 빠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를 항상 가치 없는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타락한 상태에서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둘 다이다. 우리는 비참하지만 동시에 위대하다. 우리는 미녀와 야수이다.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의 비참함이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위대한 영주의 비참함, 쫓겨난 왕의 비참함이다.”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형이상학적으로는 더 나은 존재지만, 도덕적으로는 더 나쁘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 ‘자신’은 선과 악, 영광과 수치가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 인간이라는 존재(우리 자아 또는 개인의 정체성)는 부분적으로는 창조의 결과(하나님의 형상)이고, 부분적으로는 타락의 결과(훼손된 형상)이다. …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존엄하지만, 타락했고 반항하기에 천성적 죄성을 가진 지킬이요 하이드, 선과 악이 마구 뒤섞인 악동이다. 나는 고귀하면서도 천하고, 아름답지만 추하며, 선하면서도 악하고, 정직하면서도 비뚤어진, 하나님의 형상이자 마귀의 종이다. 나의 진정한 자아는 창조의 형상,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시려고 오신 모습이다. 나의 죄악된 자아는 타락으로 인한, 그리스도께서 멸하러 오신 바로 그 모습이다. 

두 가지 경이로움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첫째, 인간의 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인류에 대한 지나친 긍정으로 모두에게 자기사랑의 세례를 주는 오프라 윈프리의 자기애와 자기 가치에 대한 관점을 기독교 용어로 재구성하려고 시도하는 진술과 말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한 접근 방식은 우리 문화가 드러내는 자존감에 대한 집착을 기독교식 포장으로 위장하는 위험이 있다. 

둘째, 첫 번째 거짓에 맞서는 방법이 단지 “벌레 신학”의 지나친 강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인간의 죄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의 가치와 소중함을 망각시키는 과잉 반응도 함께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영이 보이지 않게 조용히 우리 속에서 고귀함을 향한 열망을 일깨울 것이다. 그리고 회개와 믿음을 통해 죄악된 사슬이 떨어져 나가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걸맞은 더 높은 소명을 향해서 우리 모두 나아갈 수 있다. 

키스와 크리스티 케티(Keith and Kristyn Getty)가 페르난도 오르테가(Fernando Ortega)와 함께 찬양했듯이 말이다. 

내가 고백하는 두 놀라움
나의 가치와 나의 무가치함
내 가치는 고정됐고, 내 몸값은 지불됐어
바로 십자가에서.

원제: Both Worm and Worthy 

트레빈 왁스 Trevin Wax |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이다.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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