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편집인 칼럼] 바보 의사가 그립다

사진: Unsplash의Luis Melendez

“우리 의사들의 직업은 목사와 같은 성직이다. 나는 교회가 목사를 임명하는 것과 똑같이 의사도 임명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우리가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우리의 직업에 몸을 바치는 것도 바로 이 신념 때문이다.”

스위스의 심리 침료사이자 작가인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 1898-1986)가 한 말이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대화와 교감을 통한 치유의 중요성을 강조한 투르니에는 환자를 인간으로 바라보는 전인적 의학을 주장,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관점을 제시했다.

우리나라 의료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의사들의 파업은 2000년에도 있었다. 의약분업 실시를 앞두고, ‘선 보완 후 실시’를 주장하는 의사들이 집단행동에 돌입했다. 동네 병원들은 문을 닫고, 대학병원의 인턴, 전공의, 교수들도 가운을 벗고 모두 병원을 떠났다. 의사들과 정부가 이처럼 원칙론으로 격렬하게 대치하는 가운데 환자의 신음은 커져만 갔다. 당시 초속 35m가 넘는 강풍이 몰아치는 빗속에서도 의사들은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국민들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파업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그동안 많은 의료 전문가들이 우리나라 의료계에서 필수의료 인력이 부족하고 이대로 가다가는 의료계가 내려앉을 것이라는 진단과 예측을 끊임없이 내놨다. 의대 정원 확충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올바른 방향 정립이 필요하다는 주장. 왜곡된 의료수가 체계를 이미 바로잡아야 했으나 그 시기를 놓쳤다는 전문가들의 지적. 이런 필요성과 절박성에도 불구, 의료진들과 의료정책을 제시하는 정부 실무자간의 대화는 지난 수십년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모양이다. 또 큰 방향을 트는 정부의 정책이 제시되면 의사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외형적으로는 정부가 한발 물러서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당장 발등의 불이 떨어져 당황해하는 국민들 앞에서 정부는 의료계의 요구에 굴복하는 듯한 모습으로 논란이 정리됐다.

하지만 2000년 당시 기독교 신념에 따라 파업에 반대한 의사들도 있었고, 대세에 따라 파업에 동참했지만 몰래 병원에 들어와 자기 환자들을 돌보거나 전화로 오더를 내리는 의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치겠다고 히포크라테스 선서까지 한 의사라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

이때 레지던트 2년차였던 한 젊은 의사는 드러내놓고 병원에 남았다. 혼자 튀어 볼 셈이냐고 그의 선택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럴 지 모르겠다. 환자 곁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지만, 한 평생 함께 살아야 하는 동료 의사들의 선택에 나만 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사직계를 내고 흰 가운을 벗고 정부의 대책을 아쉬워하는 의료진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당시 드러내 놓고 동료들의 결정과는 다른 선택을 한 의사도 있었다. 훗날 ‘바보 의사’라는 명칭으로 그의 짧은 삶을 기록한 책으로 알려진 젊은 의사 안수현. 그는 누구보다도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 충분히 돌봄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병원에 남기로 했다. 평소 주일 성수를 위해 어떤 댓가를 지불하는지, 환자들을 위해 어떤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지, 그를 알고 있던 동료들은 그가 병원에 남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학과 성적이 뛰어난 의대생은 아니었다는 그는 본과 4학년 때 유급을 한번 당할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인턴의 자리에서 빛이 났다고 했다. 그가 레지던트 1년차 때 돌봤던 한 난소암 말기 할머니는 “이 어린 의사가 날 살렸다.”며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고. 그가 작고한 이후 한 작가에 의해 집필된 ‘바보 의사 안수현’의 책에는 그의 생애가 남아 있었다.

헨리 나우웬의 말대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안아주었던 의사. 환자들의 손을 잡아 주고 격려의 말을 해주며, 때로는 더 이상 도울 능력이 없다는 말로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했던 의사. 의사란 환자와 깊은 대화를 통해 진정한 만남의 ‘번쩍임’을 경험해야 하며, 그 신성한 빛 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다는 폴 투르니에의 말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인 의사.

그러다 사단 의무대 군의관으로 활동하다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돼 만 33세의 나이로 주님 품에 안긴 의사 안수현. 그의 영정 사진이 걸린 장례식장은 물밀듯 밀려오는 조문객으로 들어설 곳조차 없었다고 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 병원 직원들과 군인들. 병원 청소하시는 분과 식당 아줌마. 침대 미는 도우미, 매점 앞에서 구두 닦는 분까지. 수현 형제가 은밀하게 베푼 사랑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은 발길이 장례식장을 가득 채웠다고 했다.

옳은 길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옳은 길을 선택한 사람의 헌신으로 이 땅의 각 분야는 바로 세워지며 개혁이 이뤄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옳은 선택으로 인해 생기는 빈 자리를 누가 메워야할까?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렇게 생사를 넘나드는 현장을 지키고 있을 이름 없는 증인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눈과 평가를 무서워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주신 ‘마음의 귀’로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보 의사 안수현 같은 믿음의 의사들이 오늘 더욱 그립다. [복음기도신문]

김강호 | 본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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