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들과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웃고 이야기하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나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아웃리치팀 리더로부터 말씀 한 절이 적힌 쪽지를 받았다.
에스겔 24:16~17절, 아내를 잃은 에스겔에게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라는 말씀이었다. 마음 한복판에서 ‘아멘’하는 심정으로 경례가 터져나왔다. ‘충성!’ 감사했다.
아웃리치 현장에서 러시아어 복음학교가 진행되는 동안 주님은 하나부터 열까지 당신을 드러내 주셨다. 쏟아지는 모든 기도제목들이 기도만 하면 바로 바로 응답되는 것이다. 신이 났다.
기도하는 우리를 흥분케 하고 이런 하나님의 영광에 끼워주신 것에 신바람이 났다. 강사님을 비롯한 모든 섬김이와 훈련생들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영광, 은혜에 흠뻑 젖어들었다. 우리 주님, 나의 주님이셨다.
아웃리치가 끝나고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렸다. 허락된 잠깐의 시간에 각자의 묵상을 나누게 하셨다. 맹인과 열매 맺는 나무 비유(눅 6:39~45)의 말씀을 보게 하셨다. 사실 그날 아침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나를 책망하는 듯한 한 통의 메시지를 받고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 돌아가면 나는 어떤 말을 나누어야 하나. 오직 나는 맹인이고 내 안엔 선한 열매를 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주님으로 충만히 채워지면 바로 그것이 선한 열매를 맺는 능력이 되는 것이었다. 주님이 내 안에 충만한 그것으로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와 형님과 남동생 가족들과 교회 집사님들을 만나고 여기저기 인사를 건넸다. 혼자 빈소를 지키며 힘들었을 동생에게 인간적인 위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서 나온 것은 하나님이 러시아에서 일하신 역사였다. 듣기 힘이 들었을 것 같다.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근사한 장례식을 원했으면 내가 왔겠지.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건 주님이 엄마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셨다는 거야.”
주님이 열어주신 천국환송잔치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러시아 땅에서 주님과 함께 치른 장례식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 쏟아내었다. 그런 나의 말에 어려워하는 동생에게 결국 나는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모든 화를 나한테 쏟아. 내가 다 받을게. 그러나 제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아니라고는 하지 말아줘!”
내가 본 어마어마한 영광을 모든 사람들이 같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각자 볼 수 있는 만큼만 보는 것이었다. 안타까움이 있었지만 그 일들을 통해 기다림을 배우게 되었다. 믿음의 길을 걷는 모든 지체들의 현재를 인정하고 눈높이를 맞추는 일,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고 기다려 주는 것이 충만한 자의 일임을 알게 해 주셨다.
러시아로 떠나기 전부터 다녀온 이후까지 한 달여간의 시간을 숨가쁘게 보냈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지치고 우울했다. 그 큰 영광을 보았는데 현실의 나는 너무나 초라했다. 산 위에서의 영광과 산 아래에서의 전쟁. 전쟁의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라는 것. 이제는 알겠다.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어려울까? 십자가를 지는 삶! 그 십자가를 싫어하는 내가 보였다. 또 어떤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 십자가가 영광이고 승리임을 알게 된 것이 감사하고 그 십자가의 자리를 고대했었는데…. 정작 다시 십자가 지는 일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 십자가는 주님과 함께 지는 십자가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시 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그렇다! 그 어떠한 사랑! 그 사랑 하나면 된다. 아멘! (끝)
[GNPNEWS]
송현주 사모(평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