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이셨던 할아버지와 장로님이신 아버지에게 신앙 훈련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의 서원에 의해 선교사로 바쳐졌다. 이후 십자가 복음을 만난 후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그를 진정한 선교사로 세워 가시는 경험을 하게 됐다. 짧은 기간이지만 선교 현장의 경험을 통해 교회의 영광을 더욱 사모하게 되어 현재 국내 교회를 섬기고 있는 이준동 전도사(총신대 신대원 3년)를 만났다.
– 아버지의 서원으로 선교사가 되셨군요.
“장로님이신 아버지께서 저를 선교사로 드리기로 하나님께 서원하셨어요. 자라면서 저는 이 사실을 알고 거부했어요. 그러다 중학교 2학년 수련회 때 제가 죄인인 것과 그런 저를 주님이 구원하셨음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저를 하나님께 드렸어요. 그러나 카투사로 군 생활을 하면서 음란, 인터넷 중독 등 마음껏 죄의 꽃을 피웠어요.
제대 후 선교사로 준비하는 중에도 그런 음란의 문제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렇게 변하지 않는 저의 문제로 고민하다 마침내 선교사를 포기하기로 했어요. 그러다가 외할아버지의 소천과 익사사고로 죽은 사촌동생의 무덤 앞에서 자기연민 할 때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왔어요. 부끄럽지만 다시 선교사로 헌신하게 됐어요.”
아버지의 서원으로 선교사 헌신
– 우리는 죽음 앞에서 비로소 겸손해지게 되나 봅니다.
“네. 그래요. 그 후에 한 선교단체에 소속되어 바로 단기선교를 준비했어요. 그렇게 선교사 훈련 중이었는데, 주님은 정말로 저에게 십자가 복음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셨어요. 총체적인 복음 앞에 선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어디에 있을까? 아뜩해요. 요한 웨슬리와 같은 회심을 그 때 경험했어요.
저는 선교사 훈련을 받는 중에도 여전히 음란영상을 보고 있는 비참한 죄인이었어요. 홀로 있을 때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면 진노를 받고 영원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죄 된 나의 실존이 인정되고 나니 정말 죽을 것만 같았어요. 하루는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내일 아침에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그 밤에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매달렸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었어요. 이런 시간을 통과하며 십자가 앞에서 저의 죄 된 실존을 직면하게 되었어요. 그때 비로소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되었어요.
– 어떤 부분에서 내면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나요?
“선교사로 나가는 절차를 밟는 중 저의 정직하지 못했던 태도를 주님이 깨닫게 해주셨어요. 관련 서류를 제가 임의로 만들어서 통과되었는데 주님이 그 사실을 직면하게 해주신거죠.
주말에 집으로 돌아가 주일 새벽기도에 다녀오신 부모님 앞에서 제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그런 죄인 된 저를 주님이 어떻게 용서해 주시고 십자가를 통해 구원해 주셨는지 말씀드렸어요. 이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복음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죠. 동일한 내용을 주일 오후에 청년들에게도 나눴어요. 그리고 담임 목사님과 소속단체 대표 선교사님께 나누면서 선교사를 내려놓겠다고 말씀드렸어요.”
–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셨군요.
“두려웠어요. 사실을 정직하게 말하면 족보에서 파내고 당장 쫒겨나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예상과는 반대로 ‘이제 십자가 복음을 깨달았구나.’라며 담임 목사님께서 꼭 안아 주셨어요.
마치 주님이 저를 안아주시는 것 같았죠. “준동아, 그래도 너 하나님이 가야된다고 하시면 가야되고, 하나님이 안보내시면 못가.”라고 하셨어요. 그때 제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아멘!이 터져 나왔어요.”
– 정말로 죽음의 터널을 지나 부활의 영광을 보는 느낌이었겠군요.
“아직 한 가지 과정이 남아 있었어요. 제가 가기로 결정된 케냐 나이로비 복음주의 신학대학원과의 관계였어요. 그 학교 지원과정 중에 학부교수의 추천서가 있는데, 그것을 제가 썼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했어요. 이 사실을 정직하게 말씀드리고 학교의 처분을 달게 받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죠. 드디어 답신이 왔어요.
그런데 그 학교 관계자의 대답도 역시 “정말 복음을 깨달으셨군요.”라는 거였어요. 그리고 스스로 공부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다시 오라고 하시더군요. 다시 메일을 보냈어요. 저는 자격이 없는데, 결정해 주시면 따르겠다고 말씀드렸죠. 그때 최종 합격통보를 보내왔어요. 죄인인 저를 용서해 주시고 이제 진짜 선교사로 주님이 저를 인정해 주셨어요. 할렐루야!”
두려운 고백에 용서받은 기쁨
– 정말 복음의 영광을 경험하셨네요.
“네. 그곳 신학대학원에서 1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크리스천의 관점에서 이슬람학을 공부하며 마음껏 복음을 나누었어요. 에티오피아, 헝가리, 독일 친구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나누며 복음으로 깊이 교제하며 울고 웃는 시간이었어요. 아프리카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도 계속 허락해 주셨어요. 그러다가 몸이 좋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어요.”
– 두 분이 어떻게 교제하셨는지도 궁금하네요.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자매를 만나서 결혼하기를 기도했어요. 소개로 만난 자매에게 제가 경험한 복음 훈련과정을 권면했고 자매도 그 복음 앞에 서게 됐어요. 당시 그 훈련과정의 섬김이로 참여했던 저는 자매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십자가 앞에 서기를 간절히 기도했어요.
자매도 복음 앞에서 자신의 주권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저와의 교제도 주님의 뜻에 맡기고 내려놓겠다고 선포했어요. 전심으로 기뻐하며 박수쳤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났어요. ‘결혼은 물 건너갔군요. 주님!’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어요.
그리고 자매는 2주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말레이시아 선교사로 떠났어요. 기약도 없이 자매를 보내고 저는 북부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려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기다리고 있었어요. 전화와 이메일로 교제하는 것은 괜찮겠다는 마음을 서로에게 주셔서 연락을 주고 받았어요.
몇 개월 후에 자매로부터 “결혼합시다”라고 연락이 왔어요. 알고 보니 함께 생활하던 동역자와 얘기하던 중 주님이 만나게 했다면 결혼을 망설이지 말라는 권유를 받았던 것이었어요. 그리고 믿지 않는 자매의 부모님과 저의 부모님의 마음을 주님이 친히 만져주셔서 양가의 결혼 승낙을 받았어요.”
– 정말 주님이 맺어주신 배필을 만나셨군요.
“이제 한 몸 된 선교사로서 어느 선교지로 갈 것인지를 놓고 기도했어요. 아내는 말레이시아, 저는 아프리카로 의견이 팽팽했어요. 그러던 중 2009년 7월 태국에서 열린 1000명의 선교사가 참석한 모임에서 파키스탄의 미전도종족을 같이 섬길 수 있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꽤 오랜 기도 끝에 그 요청에 응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곳에서 우리 부부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연락이 왔어요. 문화가 다른 한국 부부 선교사가 오면 어려워질 것 같다는 이유였어요. 당황스러웠고, 급기야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며 조금 방황하기도 했어요.”
– 그 이후 어떤 과정을 거치셨는지요.
“비통한 심정이었어요. 그러다 한 선교단체의 중보기도학교 훈련을 받게 됐어요. 3주 쯤 지나서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됐죠. 주님이 불러주신 바로 그 자리에서 예배자요, 선교적 존재요, 기도자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왜 선교지로 못 나가서 안달복달했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리고 러시아로 아웃리치를 갔어요.
그곳에서 주님이 한 사건을 통해 저의 실존을 보게 하셨어요. 팀장이었던 제가 팀원 모두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죠. 해프닝 같은 이 사건을 통해 복음과 기도로 선교완성을 이루시는 하나님인 것을 결론 내렸지만 결국 회개하지 않는 제가 하나님께 걸림돌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런 나의 옛 생명이 죽었다는 것을 확증하는 은혜의 시간을 허락해 주셨어요.”
– 지금은 신학교에서 공부하신다고 들었어요.
“선교단체의 위탁으로 케냐에서 이슬람을 공부할 때 복음의 결론은 붙잡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 때 신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주님의 뜻을 구했어요. 신학교 합격과 재정이 공급된다면 주님이 허락해 주셨다는 사인으로 받기로 했어요.
그것을 주님이 허락해주셨고 그렇게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됐어요. 첫아이를 출산할 무렵, 여러 가지 여건상 학교를 휴학하게 됐어요. 그리고 사역지를 찾던 중 학교 게시판을 통해 칠레의 한 한인교회에서 사역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어요. 기도 중 주님의 부르심임을 확증하고 떠났어요.”
– 전혀 예기치 않은 곳으로 가시게 됐군요.
“부르신 교회 현장은 한국교회와 그리 다르지 않더군요. 이민 1.5세, 2세의 다음세대들이 학교와 가정에서 방치되어 있었어요. 부임해서 첫 사역으로,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신 6:7)”는 말씀을 받고 2013년 1월에 복음수련회를 시작했어요.
통역을 세워 복음을 있는 그대로 선포했어요. 14명 중 3명만 자신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정확하게 고백했어요. 나머지 아이들은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어요. 게다가 부모님들도 어려워하셨어요. 급기야는 저에게 사과할 것을 요청했어요.
전해지는 방법에서 미흡한 점은 있었지만 메시지는 타협할 수 없었어요. 그 시간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은혜였고 기도의 힘이었어요. 그 때 알았어요. 복음을 전하면 3000명이 돌아올 수도 있지만 3000개의 돌이 날아 올 수도 있다는 것을요.”
칠레 땅에서 경험한 복음의 능력
–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셨군요.
“그 때 해외 아웃리치로 칠레에 온 지원군과 복음기도동맹군 동역자를 통해 말씀으로 힘을 얻게 하셨고, 더욱 복음만 나누리라 결단하게 됐어요. 칠레를 떠나기 전 청년부를 대상으로 다시 복음수련회를 진행했어요. 전과는 달리 자원자만 받았어요. 6명이 진리 앞에 섰고 전원이 십자가를 통과하는 축복을 누렸어요.
미천하고 자격 없는 자를 통로 삼아 예수생명을 칠레 땅에 심게 해주신 주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한 자매는 ‘왜 사람들이 복음에 올인하는지 이제야 알았다.’는 고백을 했어요. 그리고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선교사로 헌신하는 영광도 보았어요.”
– 귀국 이후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한국으로 돌아와 한 교회의 성도로 출석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갑자기 교회 성도들이 흩어지게 됐어요. 그 때 몇몇 성도들과 함께 분립, 파송 받아 교회개척을 시작했어요. 흩어지고나니 예배 인도자, 찬양 인도자, 성찬 인도자, 말씀기도 인도자 등 성도들이 모두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배로 드려지게 되더군요.
계속 전도하고 또 주님이 주신 은혜에 예배가 얼마나 감격이 있는지 몰라요.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임을 알게 됐어요. 예수생명 가진 자는 주님이 불러주신 그 자리에서 교회로 세워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어요.”
– 마지막으로 기도제목을 나눠주세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으면 복음을 살아낼 수가 없음을 경험하고 있어요. 기도의 자리로 나가면 말씀하시고 은혜 주시고 살게 하세요. 나가지 못하게 하는 요인은 눈에 보이는 걱정, 근심, 재정과 미래에 대한 염려들인데 이것이 쓰나미처럼 확 몰려오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그래도 아침마다 주님 앞에 나가면 또 은혜를 주세요. 히브리서 9장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물과 피가 내 심령 가운데 스며들어 에스겔 성전의 환상처럼 나를 적시고, 가정, 교회, 캠퍼스, 사회, 나라, 열방까지 스며들어 영혼들이 예수생명으로 되살아나기를 기대해요.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부흥되고 선교가 완성되는 것, 그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GNPNEWS]
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