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버니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게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17-26)
오늘 또 이 땅에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핼러윈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이태원에 모인 수 많은 젊은이들이 인파에 몰려 압사하고 만 것이다. 내 아들과 비슷한 연령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현실 앞에 가슴이 먹먹하다. 그러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현실을 마주할 그들의 부모들은 또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겪게 될까? 가늠해 볼 수도 없다. 세월호 참사로 생때같은 우리의 자녀들을 떠나보낸 슬픔을 겪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와 같은 비극이 또 이 땅에 일어나게 되었을까?
인간의 역사는 비극적인 죽음의 사건들로 점철되어 왔다. 지금 이 순간도 세상 어딘가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읽고 있는 당신도 언젠가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죽어가는 자들을 보시고 슬퍼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기 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영혼들을 살리시기 위해 그 아들도 아끼지 않으실 만큼 이 세상을 사랑하신 분임을 우린 잊어선 안된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 땅에서도 발생한 적이 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의 사람들이 죽게 된 사건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라 여기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누가복음 13:4-5)
주님 말씀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 날에 우리가 남들보다 더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여기는 한(회개치 않는 한)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만물의 창조주요 하늘의 하나님이신 주님이 죽을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 오늘 우리에게 닥친 이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 생명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빠인 나사로가 병들어 위독하자 주님께 급히 사람을 보내어 소식을 전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서둘러 오셔서 오빠를 고쳐주시기를 바랬다. 소식을 전해 들으신 주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1:4)
주님은 서둘러 나사로에게 가지 않으시고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계셨다. 마치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오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 마르다는 서둘러 와서 오빠를 고쳐주지 않으신 예수님께 원망을 내비친다. 그러자 주님은 마르다에게 복음을 전해 주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도 주님을 만나자 울며 주님을 원망한다. 그 때 주님도 함께 울음을 터뜨리신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33-35)
주님의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주님은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마치 그가 죽기를 기다리듯이 시간을 지체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 결론을 알고 있듯이 잠시 후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런데 왜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우셨던 것일까? 주님은 나사로의 육신의 죽음 때문에 비통해 하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의 비통함은 육신의 죽음 앞에 그토록 슬퍼 하면서도 정작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 진실로 죽어 있는 자기의 모습에는 슬퍼할 수 없는 죄인들이 불쌍하여 비통히 여기신 것이었다.
주님은 그렇게 슬퍼하시며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시듯 포효하신다.
“나사로야 나오라”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신 하나님이시다. 오직 주님만이 부활이며 생명이시다. 나사로의 이름을 불러 그를 살리신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우리를 살리셨다. 이제 우리 안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다. 이제 우리도 우리가 맞이한 이 비참한 사건 속에서 주님의 비통함을 구할 때이다. 그리고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자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서둘러 전해야 할 때이다.
사랑하는 아버지
우리는 오늘도 비참한 죽음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죽음도 이토록 슬픈 일이라면 영원한 죽음을 볼 수 없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비통함을 저희에게 허락하십시오. 죽어가는 죄인들을 살리시려고 그 아들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어 주신 아버지의 마음을 저희에게 부어 주십시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사 자기 몸을 깨뜨려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죄와 죽음이 가득한 이 땅의 현실 앞에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선포할 능력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채정한 | 다음세대에 대한 부르심으로 충남 서산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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