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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칼럼] 발할라와 천국을 향한 믿음의 비교

사진: Steinar Engeland on unsplash

바이킹의 천국 발할라

서양에서 만든 드라마 중에서 흥미롭게 본 것은 바이킹(Viking)에 관한 것이다. 그중 히스토리 채널에서 만든 바이킹 드라마가 인상 깊게 다가온다. 내용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바이킹들이 어쩌면 그렇게 용맹하게 싸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피해를 당하는 중세 영국의 왕국들과 프랑크 왕국들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객관적으로 그들의 행위를 볼 때에 그 용맹함에 대해서 어떤 경우에는 감탄하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그들로 하여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수 있는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드라마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그들은 죽음에 이르러서는 발할라(Valhalla; 瓦尔哈拉)로 간다고 외쳤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발할라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겼다. 또 어떤 사람은 조직의 수장에게 부탁하기를 이대로 가다가는 나는 전투하다가 죽지 못하고 늙어 죽게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발할라에 못 들어갈 것 같은데 다음에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에 자신을 꼭 데리고 가서 싸우다가 죽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드라마의 내용이 이 정도로 흘러가니 나는 발할라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다. 인터넷을 통해 발할라에 대해 살펴보았다. 발할라는 바이킹 전사들이 죽으면 바로 가는 곳으로, 그들의 최고 신인 오딘(Odin)과 그의 아들(Thor)등 여러 신들이 연회를 베풀어주며, 용사들은 이 연회에 참석하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용사들끼리 전투놀이를 하며 즐기는 곳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있을 거인들과의 전쟁에서 신들을 도와 전투를 위한 휴식의 장소였다. 하여간 바이킹, 이 사람들의 생각은 지상에서도 싸우고 저 세상에서도 싸움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

용맹은 발할라에 들어가는 조건

그런데 발할라에 대한 신앙에서 한 가지 독특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이킹들 가운데 서로 음모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 때에 전사인 바이킹들은 과연 발할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 때 바이킹들은 가장 잔혹한 처형을 한다. 그것은 사형 집행장에서 등뼈를 부러뜨리고 갈비뼈도 하나씩 잘라서 펼쳐놓는다. 그 다음에 허파를 꺼내서 어깨 위에 올려놓는데 이와 같은 처형을 진행할 때에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는다면 비록 배신자이지만 발할라에 들어갈 용맹을 가진 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얄 보그(Jarl Borg; 雅尔 柏格) 백작이 주인공 라그나 로스브로크(Ragnar Lothbrok; 拉格纳·洛斯布洛克)를 배반하여 이와 같은 처형을 당하는데 그는 발할라에 들어가기 위해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고 죽었다.

바이킹들의 생각은, 비록 지상에서는 어떤 이유들로 인하여 배신하고 싸울 수 있지만 진정한 용맹을 가진 바이킹이라면 그 용맹함으로 바이킹들의 천국인 발할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비록 배신하고 배반당하는 관계였다고 할지라도 용맹을 가진 바이킹들은 지상의 모든 것은 훨훨 털고 발할라에서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발할라 vs 천국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떠한가? 우리에게도 바이킹들의 발할라와 같은 곳이 있는가? 싸우다가 칼이 내 몸을 찔러 들어오고 도끼가 내 팔을 자르며 적의 화살이 내 가슴에 박힐 때에 신들과 또 위대한 바이킹의 전사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술잔을 기울이는 그 발할라를 믿고 용사로서 죽어가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바라고 기뻐하여 웃으며 죽을 수 있는 그 장소가 있는가? 있다. 진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말씀하신 성경에 분명히 그 장소가 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를 어떻게 가는가? 바이킹들이 발할라에 가기 위한 조건인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용맹함에 해당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에게는 과연 무엇인가? 이것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믿음’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즉 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희생시킨 그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죄에서 용서받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의 삶이 곧 믿음이다. 이 믿음은 두 가지 결과의 모습으로 증명된다. 그것은 계시록 20장 4절에 기록되어 있다.

(계 20:4, 개역)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계 20:4, NKJV) And I saw thrones, and they sat on them, and judgment was committed to them. Then I saw the souls of those who had been beheaded for their witness to Jesus and for the word of God, who had not worshiped the beast or his image, and had not received his mark on their foreheads or on their hands. And they lived and reigned with Christ for a thousand years.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바이킹의 발할라에 참석하는 용사들과 비교할만한 기독교 신자의 신앙은 곧 순교하는 신앙과 이 세상의 어떤 협박과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으며 삶이 죽을 만큼 힘들어도 그것을 이겨내는 믿음이 여기에 해당한다.

새털처럼 가벼운 말과 글이 담긴 요란한 소리

이교도의 신앙과 비교하며 이 글을 쓰면서, 참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날 우리의 신앙이 너무 관념화 된 것 같기 때문이다. 소련이나 중국이나 북한의 기독교처럼 목숨을 걸고 믿는 상황이 이 한국 땅에서 사라져서 그런가? 말과 글은 무성한데 아무리 육체의 생명을 잃을 위기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님을 향한 말과 글을 행함에는 목숨을 거는 마음이 담겨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 무게의 깊이를 느끼지 못하겠고 새털처럼 가볍고 기껏해야 지중해 헬라 철학을 되풀이한 것에 진리와 생명이 담긴 듯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것이 이 시대에는 자유주의 신학이고 공산주의, 사회주의, 진보주의의 사상체계이다. [복음기도신문]

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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