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은 구속사에서 어떻게 부활이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는지 보여준다 ”
사람들이 사도행전을 읽는 이유는 보통 초대 교회에 관해서 알기 위해서지만, 만약 그게 사도행전이 전하는 내용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누가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 즉 예수님에 대한 메시지를 놓치게 된다. 사도행전 도입부에 이미 하늘로 승천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사도행전 내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이 그리는 예수님은 부활하고 승천해서, 이제는 영광스런 왕중의 왕으로 그의 교회를 인도하고 성령을 부어주시며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서 사도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선교의 사명을 맡은 사도들은 이제 예수 부활의 산 증인이 되어야 했다(행 1:21-22). 사도들은 그리스도 사역의 많은 부분을 전파해야 했지만, 만약에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성패가 달린 핵심이 되는 것,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활이었다.
누가는 또한 부활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을 때 모든 것이 변했다. 동시에 성경 말씀이 다 이뤄졌는데, 다른 말로 하면 부활은 결코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기다리던 목표이기도 했다는 의미다.
사도행전 속 부활이 가진 다섯 가지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부활과 성령님의 시대
사도행전은 구속사에서 어떻게 부활이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는지 보여준다. 100여 년 전에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는 부활의 시대는 다름 아닌 성령의 시대라고 말했다. 이 둘은 나란히 간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한 부활의 시대는,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규정할 수 있는 시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사도행전은 다른 어떤 성경보다도 성령의 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을 자세히 서술한다. 비록 우리가 최종적인 성취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지만, 부활의 시대는 죽음에서 살아난 첫 열매인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서 역사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동시에 우리는 지금 성령이 풍성하게 부어주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성령은 예수님의 부활 전에도 이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성령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사역했다(예를 들어, 마리아, 엘리자베스, 사가랴, 시므온), 또한 선지자의 시대에도 성령은 활동했다(행 7:51), 모세 시대에도 그것은 다르지 않았고(민 11:17, 25; 참조, 신 32:11) 심지어 세상이 창조될 때에도 성령은 활동했다(창 1:2). 그러나 부활과 함께 과거와는 뭔가 다른 역사가 시작되었다. 성령은 보다 더 풍성하게 부어졌고, 이제 성령은 모든 인간들이 다 풍성하게 체험하는 존재가 되었다.
2. 부활과 전 세계적인 운동
부활의 시대는 또한 열방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으는 시대이기도 하다. 부활해서 승천한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의 주다(행 10:36).
하나님의 언약이 주는 축복은 유대 민족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유입되는 엄청난 숫자의 이방인 문제는 1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질문을 불러 일으켰지만, 그럼에도 이 사실은 사도행전 속 로마 백부장 고넬료(행 10-11; 참조, 갈 3:13-14)를 통해서 여실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서, 수천 년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징표인 할례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 이 문제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다뤄졌다. 이 장면을 통해서 어떻게 해야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존하면서 같은 공동체 속에서 함께 번영할 수 있을지를 놓고 고민하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할까? 그들도 전통적인 유대인 음식법을 지켜야 하는 걸까?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핵심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영을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모두 다 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차별은 전혀 없었다(행 15:8-9). 그렇기에 할례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영향을 받은 사도들의 편지에 이제 할례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공의회 서한에서는 특정 음식을 금지하는 것과 관련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 있지만, 그런 모호함은 바울 서신서를 통해서 깨끗하게 정리된다. 즉, 음식에도 어떤 구분을 할 필요가 없고, 또 누가 어떤 음식을 먹는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 점은 베드로가 내린 결론과도 일치한다(행 10:34-35; 15:9-11).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방인이 초대 교회 공동체에 유입되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게 다 바뀐 것은 아니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성적 부도덕함과 관련해서는 구약의 율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사도들은 구약의 율법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비추어서, 특히 그의 부활과 관련해서 구약의 율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3. 부활과 칭의
그리스도의 부활이 종종 사도들의 설교를 이해하는 논리적인 핵심이 되지만, 그들의 설교는 보통 회개하라는 권고로 끝이 난다. 회개하라는 외침은 뜬금없는 메시지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부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다 회개해야 한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고, 이제는 부활해서 살아있으며, 앞으로 모든 민족을 다 심판하는 권한을 받았기 때문이다(참조, 2:36-39; 13:38–41; 17:30–31).
참으로 사도행전을 보면 부활은 칭의 및 죄 용서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정복한 의로운 존재다(참조, 3:14–15, 20–23; 26; 5:30–31; 13:38–39).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칭의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다른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칭의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칭의와 죄 용서도 이미 구약에서 현실로 드러나있다. 그렇기에 바울은 믿음으로 인한 칭의의 사례로 다윗과 아브라함을 들고 있는 것이다(롬 4). 그럼에도 모든 믿는 이를 의롭다하는 역사는, 구약과 신약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4. 부활과 성경
성경 속 가장 흥미로운 구절 중 하나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성경을 열어서 엠마오로 가는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선지자들을 관통하며 예수님은 성경 전체가 어떻게 오로지 자신만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설명한다(눅 24:25-27). 조금 후에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전하는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고난을 당해 죽고, 부활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눅 24:44-47).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런 성경 주해를 듣고 싶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는 종종 예수님이 구약의 어떤 구절들을 사용해서 제자들을 가르쳤는지 알 수 없어서 애통해 한다. 누가는 우리를 그냥 추측만 하도록 남겨둔 것 같다.
그러나 누가가 우리를 추측하도록 남겨놓지 않았다면 어떨까? 만약에 그가 쓴 후속작인 사도행전을 통해서 다 실현이 될, 성경 속 모든 디테일을 다 알려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이게 바로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초기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그들은 특히 부활과 관련해서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을 어떻게 실현했는지에 관해서 아주 자세한 내용을 보여준다. 비록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가 100퍼센트 모든 내용을 다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설교를 보면 성경이 모두 다 예수님과 그의 부활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 더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나는 누가가 사도행전을 쓴 이유 중 하나가 단지 초대 그리스도인과 바울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경말씀을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바울이 재판정에 섰을 때, 그는 일관되게 조상의 전통과 성경을 위반한 적이 없다고 자신을 향한 고소를 강하게 거부한다(24:14; 26:6).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아그리파 왕에게 만약에 당신이 성경을 믿는다면, 당신은 또한 죽은 자의 부활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26:22,27).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성경의 참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그리고 성경 전체가 부활을 드러내고 있다고 믿는 것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길이다.
5. 부활과 초기 기독교 신학
초기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가 몸으로 부활했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었고 단지 고통을 겪는 시늉을 한 것도 아니다. 그는 진짜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았고,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 부활했다.
부활의 실질적인 의미는 초대 교회에게도 중요했다. 초대 교회 교부였던 예루살렘의 시릴(Cyril of Jerusalem)은 부활이야말로 모든 선한 일의 근본이 된다고 말했다. 부활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다 중요하다.
부활은 또한 기독교의 공적 본질을 강조한다. 부활은 공적인 사건이었지 단지 몇 명에게만 알려진 은밀한 사건이 아니었다. 기독교는 전문 지식을 통해 누구나 다 개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일련의 철학적 지식이 아니다.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가 죽었고 그런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한 공적인 인물에 관한 공적인 메시지다.
부활이 사도행전의 중심이라면, 또 사도행전 속 사도들이 행한 설교의 중심이기도 하다면, 부활은 우리가 전하는 기독교 메시지에서도 중심이 되어야 한다.
독특한 메시지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진 중요함이 내게 생생하게 다가온 것은 몇 년 전 어떤 사람이 나와 내 친구에게 도대체 기독교가 무엇이 특별하기에 다른 종교와 다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였다. 그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누구라도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으면 다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부활은 단지 과거에 일어난 한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오늘도 여전히 관련이 있는 사건이다. 부활은 예언되지 않은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성경의 예언을 성취한 사건이며 모든 민족, 모든 장소와 관련성을 가진 사건이다.
“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가 죽었고 그런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한 공적인 인물에 관한 공적인 메시지다 ”
[복음기도신문]
브렌든 크로우(Brandon D. Crowe) |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의 신약학 부교수. ‘The Hope of Israel’과 ‘Every Day Matters’등 저술.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를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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