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개입으로 시작된 장진호 전투가 흥남철수작전으로 이어져
지난 10월 미국의 모건 오테이거스 국무부 대변인이 6.25전쟁과 관련한 중국의 주장을 전면 반박하며 “중국이 남한을 침략한 것”이라고 밝혀, 국내외 언론의 눈길을 끌었다.
오테이거스 대변인은 지난 10월 24일 트위터를 통해 “중국 공산당은 70년 전 (6.25)전쟁이 단순히 발발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마오쩌둥의 지지를 받고 남한을 침략한 것”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오테이거스는 이어 “자유국가들이 (북한의 남침에) 맞서 싸우자, 중국 공산당은 수십만 명의 병사들을 보내 한반도에 참화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저 공산 국가인 북한을 돕기 위해 중국 공산 정권이 6.25전쟁에 참여한 것이 당연한 사실인 듯 여기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우리 입장에서 중국 공산 정권은 우리나라가 통일이 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 이 땅의 분단을 고착화시킨 주역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1950년도 말 한반도를 공산화하려고 남침한 북한은 유엔의 역공에 밀려 한반도에서 이미 괴멸상태에 이르러, 사실상 통일 직전의 순간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난 70년간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 공산 정권은 지금도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부른다. 미국에 맞서 조선을 돕는 전쟁이라는 뜻이다. 중국 공산 정권은 그동안 모든 자국 역사책에 6.25전쟁을 북침으로 기록해왔다. 게다가 한 술 더 뜬다. 6.25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자인 미국이 중국 인민에게 강요한 전쟁이며, 침략에 맞선 ‘위대한 정의의 전쟁’이며 ‘승리의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공산주의 세력은 엄연한 역사적 진실까지도 왜곡시킨다.
하지만 역사는 숨길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재력으로, 힘으로 큰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이 땅에 새겨진 중국과 북한의 공산화 야욕은 곳곳에 버젓이 새겨져 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올해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이곳을 찾아 헌화까지 했다.
미국 대통령의 이곳 방문은 이번 트럼프 대통령이 처음은 아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6.25정전 60주년인 2013년에,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정전 50주년을 맞아 2003년에 이곳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방문했다. 왜 미국의 역대 대통령이 이처럼 방문할 정도로 이곳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을까? 어느 나라 전쟁보다도 한반도에서 벌어진 이 전쟁에서 미국의 젊은이들의 생명이 너무도 많이 희생됐기 때문이다. 그것도 중국 공산 세력의 참전 때문에.
역사의 시계를 돌려 1950년 말로 가보자. 6월 25일 남침 이후 자유 대한민국의 영토는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낙동강 아래까지 밀려났다. 그러나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로 여겨지던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은 남한지역에서 괴멸 상태가 됐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하며 낙오자와 도주행렬이 속출했다. 이를 통일의 기회로 여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한국군이 먼저 38선을 돌파하고 북한 수복작전을 시작하면서 대부분 미군으로 구성된 유엔군 역시 이에 가세했다. 김백일 장군의 지휘로 10월 1일 북진명령을 받고 북한 지역 회복작전이 시작됐다. 국군의 날이 10월 1일인 것도 바로 이날 38선 돌파를 기념하여 지정됐다.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북한은 당혹스러웠다. 당시 북한 땅을 떠나 이미 중국 땅으로 피신한 김일성은 중공군의 참전을 강하게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 18만 명이 총사령관 팽덕화의 지휘 아래 1차로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너 북한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이때부터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당시까지 무려 300만 명의 병력을 한국 땅에 보냈다.
중공군의 참전 사실을 까맣게 모르던 미군은 북진을 계속했다. 미군은 10월 하순께 당시 북한의 임시 수도인 평안북도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함경북도 개마고원에 있는 장진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때 산속에 숨어서 대기하고 있던 중공군 12개 사단이 미군을 포위했다. 전멸할 위기에 처한 미군의 탈출 작전이 시작됐다. 이름하여 장진호 전투다. 이는 그해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장진호에 포위되어 있던 미 10군단이 15일 동안 12만 명의 중공군(10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고 무려 128km에 이르는 흥남 항구까지 성공적으로 철수한 후퇴작전이다.
이처럼 중공군의 예상치 않은 개입으로 6.25전쟁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렇게 중공군의 침략으로 또다시 대한민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와 같은 장진호 전투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며 마침내 작전을 완수했다.
철수과정은 쉽지 않았다. 작전의 마지막 고비였던 12월 7일 고토리 지역에서 교량 파괴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게 됐다. 미군은 좋은 일기와 날씨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던 그날 밤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늘이 맑은 날씨로 변하고 밝고 환한 별이 고토리 상공에 반짝였다. 곧바로 교량 공중투하작전으로 가설된 임시교량을 건너 미군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지형도 모르고 운신하기조차 힘든 고원 산악지대에서, 더구나 밤이면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악천후와 싸웠던 미군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전투중 전사자보다 동상으로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동태처럼 얼어붙은 시신을 짐짝처럼 트럭에 실어 수송하기도 했다. 이때 미 해병 4500명이 전사하고 7500명이 동상을 입었다.
미국의 전쟁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 기록되고, 세계 역사상 3대 동계전투로 알려질 정도의 이 전투에서 미군들의 희생은 엄청났다. 이들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공원이 바로 워싱턴 D.C.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이다. 공원에는 긴장한 채 얼어붙은 얼굴의 미군 19명이 판초를 입고 총이나 무전기 등을 휴대한 채 행군하고 있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이렇게 장진호 전투를 치른 미군이 흥남항구로 철수했고, 또 이들의 활약은 그 역사적인 흥남철수작전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북한주민 9만 8000명도 공산군에게 학살되지 않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군이 중공군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면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은 한국을 포기하고 철수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쟁사가들은 말한다.
중국 공산당 정권은 지금까지 6.25전쟁 참전 이유를 순망치한(脣亡齒寒)때문이라고 한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이다. 북한이 입술이라면, 중국 공산 정권은 치아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은 북한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북한의 몰락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이웃나라로 두기를 원치 않았던데 그 근본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항미원조는 그저 공산주의 세력 결집을 위한 수식어일 뿐이다. [복음기도신문]
김갈렙
<저작권자 ⓒ 내 손 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문의:
[관련기사]
아르메니아를 보며 까레이스키를 떠올리다
세뇌된 대한민국, 깨어나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대한민국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