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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성경은 노예제를 지지하는가?

사진 : Unsplash의 Hussain-badshah

회의론자와 무신론자에게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함을 설명하려고 할 때면 그들이 들이대는 시급한 문제가 하나 있다. “성경이 노예제도를 옹호하는가?” 결코 쉬운 질문이 아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대답이 미흡하면 상황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급하게 성경과 교회 역사를 변호함으로써 악한 행위를 뒷받침하는 데 말씀이 어떤 식으로 악용되었는지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도 위험은 여전하다. 성경에 현대적이고 서구적인 가정들을 덧입힘으로써 성경을 역사 맥락에서 읽지 못하는 비평가들이 있다. 이 경우에는 사실상 성경이 형성한 서구 문명과 문제가 되는 성경 구절 사이에 얼마나 인과관계가 있는지 혼동하게 된다.

나는 성경이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평등,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를 허무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네 가지 논제를 제안한다.

1.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교리를 통해 인간 평등에 독특하게 이바지한다.

성경을 읽다가 노예제도에 관한 구절을 발견하는 현대인이 분개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일단 두 가지를 염두에 두는 게 중요하다. 첫째, 노예제도는 고대 세계 어디에서나 존재했다. 글리슨 아처(Gleason Archer)의 지적이다. “노예제도는… 우리가 현재 역사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모든 고대인의 관습이었다.… 그것은 상업, 세금, 성전 봉사와 마찬가지로 고대 문화의 필수 부분이었다.”

둘째, 노예제도는 모든 곳에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서 허용되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이 명백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노예가 되기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물론 몇 가지 예외가 있지만 그게 대부분 전근대인의 생각이었다. 노예제도는 종종 빈곤, 슬프지만 피할 수 없는 (심지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여겨졌다.

이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면 대화는 처음부터 바뀔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노예제도에 대한 우려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특정 가치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런 가치는 대부분 인류 문화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고대 근동에서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기록은 그 자체가 가진 역사 맥락에서 당시의 다른 창조 이야기보다 인간에게 훨씬 큰 존엄성을 부여했다. 고대 근동의 다른 창조 기록에서는 오로지 왕권을 가진 사람들만이 신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다. 이와 달리 창세기 1장은 아무리 가난하고 무력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선포한다.

오늘날 인간 존엄성에 대한 보편성은 당연한 생각이지만, 고대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볼 때 창세기의 사고는 급진적이었다. 초대 교회를 비판한 이교도인 켈수스는 기독교가 인간에 대해서 지나치게 높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유대교와 기독교 사고의 근본 오류는 그것이 인간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신이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지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조금도 분명하지 않다.… 신의 눈에 사람이 개미 또는 벌보다 더 나은 건 전혀 없다.

켈수스의 견해는 오늘날 물질주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벌레와 같다. 인간에게는 특별한 가치가 없다.

이런 개념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왜 틀렸는지를 아는 건 쉽지 않다. 물론, 당신이 창세기 1장과 같은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말이다.

역사가 톰 홀랜드는 창세기의 세계관이 결국에는 서구 문명을 형성했고, 현대인이 직관적으로 더 이상 노예제도를 용납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리게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생명, 자유, 행복 추구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은 전혀 자명한 진리가 아니었다.… 미국 공화국의 가장 참되고 궁극적인 모판은… 창세기였다.”

2. 구약의 율법은 고대 근동 지역의 노예제도를 크게 개선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서 3장을 지나서 타락 이후의 세계로 빨리 감기를 하면, 성경에 나오는 많은 “영웅들”에게 종이나 노예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에서 노예제도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했음도 발견한다. 구체적인 율법을 다루기 전에, 이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모세의 율법에는 본질적으로 낡은 것이 들어있었다. 율법 자체의 증언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장차 올 더 큰 율법보다 열등하고 그것의 예고편에 불과했다(예 31:31-34).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에다가 시대를 초월한 의미를 두는 것은 실수이다. 노예제도에 관한 일부 법률은 개별사례법이다. (즉, 특정 상황을 다루는 판례법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사례들에서는 율법이 규제하는 어떤 행위를 반드시 승인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오늘날 도박에 관한 규정이 있다고 해서 법이 도박이라는 행위를 승인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똑같다. 출애굽기 22:1이 도둑질을 승인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그것을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는 소 다섯 마리로, 양 한 마리에는 양 네 마리로 갚아야 한다.”

개별사례법이 아닌 율법조차도 특정한 역사 맥락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신명기 24:1에 나오는 모세의 이혼 규정이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서”(마 19:8) 허용되었다고 가르쳤다. 그 점을 인식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성경의 권위를 경시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단지 역사 상황에 비추어서 해석했을 뿐이다. 성경에는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법이 있다. 그런 허용 법률(permissive laws)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마음이 아니라 당시 인간들의 죄의 본성을 반영했다.

따라서 노예제도에 관한 구약의 규정은 결코 지속되어야 하는 하나의 이상으로 의도된 게 아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창세기 1-2장의 타락 이전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주의 사항을 다 무시하더라도, 노예제도에 관한 구약의 법은 주변 문화의 법과 비교할 때 훨씬 더 인도적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노예제도는 인종차별이나 인간 절도(출 21:6 참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고려에 기초를 두었다. 생계형 경제 사회에서는 빚을 갚지 못하면 하인이 되는 것도 살아남는 방법의 하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대로 노예를 대할 수 없었으며(욥 31:13-15 참조), 주인도 종과 함께 일하는 게 보통이었다(종이 주인을 위해서 전적으로 일하도록 하지 않았다). 노예는 흔히 “재산”으로 불렸지만, 이 표현이 노예의 권리나 가치가 없음을 반영하는 건 아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노예를 학대로부터 보호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당시 다른 나라에 있었던 내용보다 훨씬 더 노예를 보호하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다른 지역의 고대 법전에는 고작해야 타인의 종에 대한 가해를 금지하는 조항이 있었지만, 구약에는 자기 종에게 해를 끼쳤다면 그 주인을 처벌하도록 했다(출 21:26-27).

유대인 학자 나훔 사르나(Nahum Sarna)는 “주인의 학대로부터 노예를 보호하는 이 법은 기존의 고대 근동 법률 전체를 뒤져보아도 결코 찾아볼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타인의 노예에게 가해진 피해와는 별개로) 주인이 자기 노예의 대우에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률은 그 어떤 고대 근동의 법률에서도 찾을 수 없다. 도망친 노예에 관한 보편적인 법은 그들을 주인에게 돌려보내야 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엄중한 처벌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인용문의 뒷부분에서 라이트는 도망친 외국 노예를 보호하는 이스라엘의 특이한 법을 언급한다(신 23:15-16). 하나님의 백성이 이 법을 시행했다면, 이스라엘은 당시의 세상에서 도망친 노예에게 유일한 피난처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 또 다른 예가 있다. 주인이 노예를 죽인 경우에, 죽은 노예는 “원수를 갚아야” 한다(출 21:20-21). 여기서 “복수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마도 사형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노예가 살아남는 경우에 아무런 형벌이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우리는 이미 26-27절에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오히려, 그런 경우에 범죄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으므로 더 무거운 처벌은 불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법은 당시에 만연하던 관습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노예 보호에 중점을 두고 있다. 마크 메이널(Mark Meynell)의 지적이다. “유죄가 밝혀지면 주인은 처벌받아야 하며,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이와 가장 비슷한 법적 조항이 타인의 노예에 대한 폭행만을 언급하던 시기에 이런 조항은 참으로 전례가 없었다.”

레위기 25:44-46은 이스라엘의 외국 노예 취득을 허용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획득하다’라는 표현이 도둑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외국인 노예를 획득하는 근거도 인종, 문화 우월성 때문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경제 문제 때문이었다. 본문을 조금만 더 읽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조차도 얼마든지 자기네들 가운데 사는 외국인들의 종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47-48절).

이스라엘 종과 외국인 노예를 대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히브리 종은 희년 기간 칠 년마다 자유를 얻었다(신 15:12-15). 외국인 노예도 때때로 해방을 맞았지만, 희년과 같은 수준의 보호를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외국인 노예도 안식일 휴식, 이삭줍기법, 신체 상해로부터의 보호와 같은 다양한 보호의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출 21:26-27 참조).

고대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은 시대를 초월한 이상이 아니지만 취약한 이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한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들도 이집트에서 나그네였으니,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외부인을 존중하라고 거듭해서 명하셨다(출 22:21; 레 19:33-34).

3. 신약의 복음 선포는 결국 노예제도를 허무는 토대를 마련했다.

신약에서 우리는 구약의 경제적으로 규제된 종의 신분과는 전혀 다른 노예제도를 접한다. 로마제국은 근대 이전 역사에서 가장 광범위한 노예제도를 갖고 있었다. 로마 인구의 엄청난 비율이 노예였다. 카일 하퍼(Kyle Harper)는 “로마인은 서구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진정한 노예 사회’ 중 하나를 세웠다”라고 지적한다. 로마의 노예제도는 가혹했으며,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력은 말 그대로 절대 권력이었다.

마치 사실인 것처럼 흔히 주장되는 것과는 달리, 신약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노예제도를 지지하지 않는다. 죄를 나열하면서 바울은 율법이 정죄하는 죄의 예로 “사람을 유괴하는 자”를 포함시켰다(딤전 1:10). 더욱이 바울은 사람들이 노예가 되거나 노예로 남아야 한다고는 결단코 조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종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 자유를 누리도록 격려한다(고전 7:21).

신약에는 특정 노예들에게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지시가 있다(엡 6:5; 골 3:22; 딤전 6:1-2; 벧전 2:18).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상황화된 법에 관해서 기억해야 한다. 허물어진 구조 아래 사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이 반드시 해당 구조를 승인하는 게 아님을 한번 더 상기하자. 특정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하는 것은 그 상황의 장점을 긍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더욱이 신약은 복음이 노예제도를 가능하게 하는 각종 편견과 가정을 말살함으로써 노예제도를 허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빌레몬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는 좋은 예이다. 바울은 도망친 노예이자 최근 개종한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낸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를 “더 이상 종으로 여기지 말고 종 이상으로 사랑받는 형제로” 영접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이 받았던 것 같이 그를 영접”하라고 명령한다(빌 1:16-17).

도망친 종이 이제는 사도와 동일한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사실상 바울은 지금 한 종류의 관계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다른 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F. F. 브루스의 지적이다. “이 편지는 노예제도가 시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로 우리를 데려간다. … 공식적인 노예 해방은 이제 단지 시점 또는 편의의 문제, 이미 존재하게 된 새로운 관계에 대한 기술적인 확증을 남겨두고 있을 뿐이다.”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종이나 자유인이 없다는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갈 3:28; 골 3:11).

복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핵심 정체성이 바뀐다. 우리에게 가장 진실한 사실은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노예와 주인 사이의 구분은 이제 그들이 공유하는 더 큰 진리의 관점 아래에서 가려진다. 치열한 계층 사회에서 이것은 사실상 문제를 일으키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요구였다.

4. 현대 세계의 노예제도 폐지는 주로 기독교의 영향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노예제도에 대한 오늘날 논쟁을 보면, 양쪽 진영 모두에서 그리스도인을 찾을 수 있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그리스도인은 종종 노예제도에 대해서 그들이 속한 문화의 입장에 적응해 왔다.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우려 사항에 대답하는 게 결코 쉽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정직해야 한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회개해야 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노예제도에 대한 반대가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나타났을 때, 대체로 그 시작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다. 초대 교회에서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는 “고대 전체에서 노예 소유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이라고 불리는 설교를 했다. 그레고리의 설교를 독특하게 만든 것은 그가 노예제도의 남용뿐만 아니라 제도 자체를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비판 근거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노예를 사는 데 얼마를 줬는지 말해보라. 당신이 치른 가격에 맞는 창조물에서 당신이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합리성이라는 문제를 놓고 당신은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앞에 놓고 당신은 얼마만큼의 은화를 그 가치로 여겼는가? 하나님 만든 자연을 몇 주화에 팔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온 땅을 다스리는 자, 하나님께로부터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자에 대하여 말할 때, 도대체 파는 자가 누구며 사는 자가 누구인지 한번 말해보라.… 하나님은 인류를 노예로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가 죄의 종노릇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으로 우리를 불러 자유를 얻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도 자유인을 종으로 삼지 아니하시는데, 누가 감히 자기의 권위를 하나님보다 더 높이 여겨 노예를 부릴 수 있겠는가?

18세기 말,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 발생했다. 여론은 본질적으로 부도덕한 노예제도에 대해 확실히 반대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윌리엄 윌버포스 같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반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알렉 라이리(Alec Ryrie)가 내린 결론이다.

노예폐지론은 처음이자 마지막 종교 운동이었다.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개신교의 주장은 단순했다. 성경이 “인간 절도”를 구체적으로 정죄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소위 황금률, 즉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대접하라”는 것은 사람들을 납치하여 지옥 같은 상황을 겪게 하면서 전 세계로 보내어 영구 노예로 파는 것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노예제도 자체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노예무역에 대해서 기독교적으로 변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종이 된 구주

성경에 나오는 노예제도는 기독교 비평가들이 제기할 수 있는 정당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당신네 입장은 무엇에 근거하는지를 물어봐야 한다. 노예제도가 왜 잘못된 걸일까? 황금률이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인간이라는 사상이 사라진다면, 도대체 인간 평등의 기초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무신론 세계관에서는 이 부분이 불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성경이 특정 상황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했다는 이유로 성급하게 말씀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이 추구하는 점진적인 접근 방식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 노예제도가 아예 상상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오늘날에는 더더욱 눈에 띄는 주제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기독교는 황금률이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이루어진 창조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주장을 선포한다. 아예 종으로 오신 구원자 예수님이다(막 10:45).

기독교의 메시지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 위해 가장 낮은 종이 되셨다는 것이다(빌 2:7-8). 이것이 사실이라면, 비록 우리가 인류 역사에서 그분이 일하시는 모든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면, 평생 탐구하고 고려해 볼 가치가 있는 정말로 아름다운 사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예수님에 관한 이 소식이 사실이라고 확신한다. 정말로 놀랍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종이 되셨다니, 누가 그런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을까? [복음기도신문]

원제 : Is the Bible Pro-Slavery?

게빈 오트런드 Gavin Ortlund | First Baptist Church of Ojai(Ojai, California)의 담임목사로 Fuller Theological Seminary(PhD)를 졸업했으며, 저서로는 Theological Retrieval for Evangelicals와 Finding the Right Hills to Die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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