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처음 비행기를 탔다.
당시 국제구호단체를 통해 후원하고 있던 잠비아에 사는 후원 아동을 만나기 위해 떠난 여정이 내 생에 첫 해외여행이었다.
하지만 첫 해외여행의 감동은 후원 아동이 사는 열악한 환경에 얼마 가지 못했다. 후원자가 없는 아이들의 상황은 더 열악했다. 아이들의 미래가 후원자가 보내주는 몇만 원에 결정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참담했다. 만나는 아이마다 ‘기브 미 원 달러’를 외치며 손을 뻗었다.
일 달러뿐 아니라 백 달러라도 손에 쥐여주고 싶었지만, 단체의 허락 없이는 어떤 구호 활동을 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아이들의 희망이 일 달러가 될까 봐 걱정되었다.
간단한 선물을 나눠주기 위해 마을 공터로 동네 아이들을 모았는데, 수백 명의 아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몰려들었다. 선물은 금세 동이 났고, 아이들을 빈손으로 보낼 수 없어 아이들에게 한국의 강강술래를 가르쳐 주면서 신나게 놀았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아이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찌그러진 냄비뚜껑으로 꽹과리를 대신했지만, 아이들을 웃게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뮤지컬 공연을 앞두고 있었던 나는 언젠가 아프리카 아이들과도 함께 뮤지컬 공연을 하고 싶다는 희망이 생겼다. 사탕보다 더 달콤하고 빵보다 더 배부르게 할 희망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내가 쓴 대본과 내가 만든 노래로 무대 위에서 희망을 노래할 아이들을 상상하면서 나는 행복해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잠비아에서 꾸었던 꿈을 품고 살기엔, 벅차고 숨이 가빴다. 신경 쓰고, 기억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과 챙기고, 배려해야 할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잠비아에서 꾸었던 꿈을 까맣게 잊었다.
그곳에서 십 년이 훌쩍 지나 시에라리온에서 인형극용 인형을 발견하기까지, 그날의 꿈은 이 땅의 삶이 다 할 때까지 봉인되어 있었을 것이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흑인 인형을 보자마자 그날의 꿈이 떠올랐다.
‘왜 이것이 지금 나의 눈에 띄었을까?’
나는 직감했다. 이 인형들이 우연히 내 눈에 띈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선교사님은 인형을 이용해서 아이들과 다가올 부활절 공연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고, 나는 1초의 망설임 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계셨다. 10여 년 전, 연극을 통해 아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싶었던 그 꿈이 이제는 복음만이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할 ‘다시 꾸는 꿈’이 되었다.
내가 쓴 대본과 내가 만든 노래가 희망의 씨앗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세상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었다. 잠비아에서 꾸었던 꿈을 까맣게 잊고 지낸 10여 년은 이 사실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봉인된 나의 꿈을 해제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지, 생각만 해도 벅찼다.
오래간만에 노트북을 열었다. 시에라리온 오지 마을에서 또다시 대본을 쓰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10년을 넘게 드라마와 기획안을 써왔는데, 마치 공모전 마감을 준비하는 지망생처럼 긴장되었다. 내가 이것을 위해 이곳까지 온 것 같다는 확신까지 들었다. 하룻밤 만에 대본을 썼다.
예전에는 작가들이 흔히 말하는 그분, 영감(靈感)이라는 분이 오셨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이제는 성령의 감동함이었다.
제목은 [앞둘의 부활절]
<예수님이 살았던 시대. 예수와 믿는 자를 박해했던 최고의 의사였던 압둘이 죽을병에 걸린 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이 된다> 는 조금은 뻔한 내용이었지만, 감동은 쉬운 곳에서 오고 진리는 단순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었다.
한국어로 쓴 대본을 영어로 번역하고, 마침내 아이들에게 공연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은 나의 예상과 달랐다. 어떤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본 인형이 무섭다며 도망치고, 어떤 아이들은 우리가 인형극을? 라며 믿지 않았고, 말도 안 된다며 따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줄 알았던 나는 기가 꺾였다. 하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아이들에게 공연의 의도를 전하고 설득했다. 그렇게 겨우 아이들의 마음을 돌렸는데, 영어와 부족어인 팀니어가 가능한 아이들이 의외로 적다는 문제가 생겼다.
주민들 대부분이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팀니어로 공연해야 했는데, 내가 팀니어를 못하기 때문에 영어로 소통이 되는 아이들이 꼭 필요했다. 겨우 영어와 팀니어가 가능한 10명의 아이를 뽑았다.
생전 처음으로 대본이라는 글을 접한 아이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막막이었다. 그제야 나는 현타가 왔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을뿐더러 거의 문맹에 가까운 아이들과 연극을 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시도인지 그제야 현실로 다가왔다.
어떻게 전할 것인가?
하지만 무엇보다 ‘연극이라는 건 말이야. 대본은 말이야. 인물의 감정은 말이야…….’ 라는 것을 가르치기 전, 내가 먼저 아이들을 알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배역을 정하고 리딩을 하는 동안 10명의 아이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몇몇 아이들이 제대로 읽지 못했다. 무슬림 이름을 가진 아이도 있었다. 저녁마다 장사를 나가는 아이,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하는 아이, 엄마와 나이 차이가 15살밖에 나지 않는 상처 많은 미혼모의 아이도 있었다.
겨우 열 살이 넘은 아이들의 상처와 아픔은 100년이 된 우물만큼이나 깊어 보였고, 아이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는 마치, 열댓 명의 자녀를 부양해야 할 가장만큼이나 무거워 보였다.
그 깊고 무거운 삶을 짊어진 아이들은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슬픔. 기쁨. 아픔. 분노 등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자유롭게 표현을 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극 중의 인물이 왜 화를 내는지, 왜 기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연기력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먼저 아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아이들이 극 중 인물을 연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공연을 올리는 것보다 먼저 아이들의 마음을 만져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한국의 교회학교 아이들과 하는 부활절 공연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그동안 아이들이 경험한 아픔과 슬픔이 내 어깨로 올라온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자신이 없다는 생각에 발을 빼고 싶었다. 인형극, 해도, 안 해도 그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슬림 아이 핫산을 보니 포기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이 한 영혼 때문에 하나님이 기획한 공연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작지만 피어있는 꽃들>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김봄 | 기록하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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