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 논구 시리즈>
율법 전통을 깨뜨리면서 그 정신을 구현한 분
IV. 가장 개방적인 인물
나사렛 예수는 역사 속에서 가장 영속적인 인물이다. 십자가의 처형이 그의 복음 사역을 멈추지 못했다. 죽음의 권세도 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 나셨다. 그는 제도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 일정한 거처없이 이동하면서 복음을 전파한 방랑 설교가로서 가장 자유롭게 사신 분이다. 나사렛 예수는 제도나 종교의 틀에 매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시면서 가장 개방적으로 사셨다. “개방적”이라고 해서 자의적으로 제멋대로 사는 무예절(無禮節)의 행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지니면서 책임감 있게 사명에 충실하며,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으로,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이웃 중심적으로 사셨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예수의 개방적 삶은 오늘날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자들인 푸코(M. Foucault)나 데리다(J. Derrida)나 로타르(F. Loytard)가 말하는 전통의 해체, 자기 상실, 의미 상실, 끝없는 방황, 허무로의 진입 등 같은 부정적 허무주의나 해체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예수는 유대 전통을 해체하신 분이 아니라 유대전통의 정신을 새롭게 해석하고 완성하신 분이시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그는 율법은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그는 ‘율법의 자그마한 계명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예수는 복음을 영접한 자는 그 의가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기독교 신자의 삶이 유대교 지도자들의 삶보다 더 나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치신다.
예수는 자기 실현의 목적을 가지시고 오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가지시고 오신 분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는 가장 자유롭게 사셨지마는 오늘날의 히피(hippie)나 마피아(Mafia)처럼 무법자로 사시지 아니하셨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셨고, 모든 법의 법인 사랑의 지고한 법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수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심으로 사랑의 법을 실천하셨다.
예수는 품행에 문제가 있는 자유분방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친근하게 나아가 말을 거셨다. 이러한 예수의 행동은 그 시대의 관습으로 볼 때는 유대인 남자가, 특히 랍비가 여인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좋지 못한 일로 여겨졌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요 4:27). 예수는 삶의 의미와 생수에 대한 갈증을 지닌 그 여인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해 주신다. 예수는 남편 다섯을 가진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녀가 남편이 없다는 고백을 이끌어내시고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허락하신다. 예수를 만난 후 이 여인은 자기와 대화한 이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삶이 변하고 메시아에 대한 증언자가 된다.
V. 자기 헌신적인 존재
예수는 병자와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사셨다. 그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 이들은 사회에서 멸시받는 자들이었고, 경건한 종교인들에 의하여 기피받는 자들이었다. 예수가 이들의 친구가 된 것은 이들에 동화(同化) 되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죄와 불법에서 구출해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메시아 사명을 충분히 자각하였다. 그가 각성한 메시아 사명이란 영광의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의 종이었다. 영광의 메시아란 다윗왕권을 가지고 점령자인 로마군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해방하고 세상의 통치자가 되는 메시아였다. 예수는 이러한 메시아 사명을 거부하였다.
예수는 인류의 대속을 위하여 그가 져야할 십자가의 죽음과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예수가 받을 세례란 죽음의 세례이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신이 희생하는 죽음의 세례를 말한다. 예수는 이것이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인류 대속을 위해 자기 자신을 주는 헌신적인 삶을 사셨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구하였을 때에 예수께서 이들에게 영광에는 먼저 고통과 헌신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이 구절에서 “내가 마시는 잔,” “내가 받는 세례”란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과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에게는 이러한 명료한 메시아 의식이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섬기고 대속물로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끌려 가실 때 자기를 따르는 여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손을 위하여 울라”(눅 23:28). 예수는 인간의 동정을 바라지 않았다. 인간 그 자신과 그 후손들에게 진리와 양심을 지켜야 하는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인간 자신에 대한 성찰이요, 인간들이 하나님과 진리와 양심의 소리를 경청하면서 사는 것이었다. 오늘도 우리는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우리 자신이 해체주의 물결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고 우리 후손들이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의 물결(성문란, 동성애, 종교혼합 등)에서 자신들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VI. 철저히 이웃을 위하여 사신 분
예수는 소외되고 그늘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그의 전 삶을 드리면서 사셨다. 그는 철저히 이웃, 특히 타자를 위하여 사신 분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30-37)는 곧 나사렛 예수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주신 비유이기도 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혈인이며, 민족의 정체성을 팔아 먹은 자들로 여겨 멸시하고 상종하지 아니하였다. 예수 자신은 유대사회에서는 나사렛이라는 자그만 시골 동리에서 온 낫선 이방인처럼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당시 유대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척받은 병든 자, 가난한 자, 고아, 과부의 편에 섰던 것이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바로 당시 종교 권력자로부터는 소외된 예수 자신을 지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이웃을 배려하는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들 사이에 평화를 주셨다. 그는 사랑을 통한 진정한 평화를 이 땅에 주기 위해 오셨다. 참 평화의 본질은 상대방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다. 로마가 이룩한 평화는 제국주의 평화였고, 겉으로는 평온하나 속으로는 항상 노예와 식민지의 반란과 저항이 있는 안보긴장과 불안의 평화였다. 그것은 반란을 진압하는 군사력으로 유지되는 평화였다. 그 평화는 지배 계층인 로마 시민들에게는 만족을 주었으나 피지배계층인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수탈당하는 원한(怨恨)을 야기시키는 평화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로마의 평화는 안보가 불안할 때는 항상 깨어지는 불안한 평화였다.
이에 반하여 예수가 가르치는 평화는 사랑의 평화였다. 이것은 사랑과 정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평화였다. 그는 악한 자에 대해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교의 율법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의 윤리였다. 예수는 원수 사랑의 윤리를 가르치신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예수가 가르치신 윤리는 평범한 인간으로는 행할 수 없는 불가능한 윤리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삶을 사셨고,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의 사랑의 윤리를 최종적으로 실천하였다.
나사렛 예수는 우리들이 사랑의 윤리와 평화 심는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 자신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귀감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고 화해(reconciliation)를 가져오셨다. 그가 가져다 주신 사랑의 평화(Friede der Liebe)란 자기 중심이 아니라 이웃중심의 삶과 윤리에 입각한 것이다. 그는 신자들이 이러한 사랑의 윤리를 실천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 이유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온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된 신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VII. 탁월하신 존재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44-45).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메시아인 것을 알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 예수는 인간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청결한 후에 유대인들이 “네가 무슨 표적을 보일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하였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 일으키리라”(요 2:19). 당시 유대인들은 이것이 무슨 의미인줄 알지 못했다. 이에 대하여 복음서 저자 요한은 해석해준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8)고 말씀하신다.
빌립은 예수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요청한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예수는 이 요청에 대하여 다음 같이 말씀하신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예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기록은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까지 하였다. 1세기 성경 기록자들은 예수를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신 분”(막 1:1; 눅 3:22), “하나님이 인간의 형태로 오신 분”(빌 2:6-8),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요 1:14)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예수는 단지 지나간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그분은 오늘도 교회와 선교현장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성령 안에서 우리 가운데 현재하시는 분이시다. 포스트모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분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 전통과 인습을 개혁하고 그 전통이 가진 아름다운 정신과 보고(寶庫)를 살아나게 하게 하시는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true postmodernist)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의 길, 하나의 진리, 하나의 생명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유일한 길(ή όδὸς, The Way), 유일한 진리(ή άλήθεια, The Truth), 유일한 생명(ή ζωή, The Life)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Έγώ έίμι ή όδὸς και ή άλήθεια και ή ζωή,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는 하나님에게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이며, 그분을 통해서 영생을 얻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역사에 나타난 어떠한 종교의 창시자가 나는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라고 한 적이 있었는가? 붓다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현세를 버리고 득도(得道)를 하였으나, 자신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라고 말하지는 아니했다. 공자나 소크라데스나 마호멧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인류의 위대한 등불이었다. 이들은 위대한 성현들로서 유일한 빛과 진리를 가리킨 자들이었다. 이들은 죽었다. 사망에 삼킴을 당했다. 그러나 예수는 죽었으나 다시 죄와 사망을 권세를 깨뜨리고 살아나셨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는 탁월한 존재다. 이 탁월한 존재는 명상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믿음의 대상이다. 우리의 지성이 그분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신앙적 지성으로만 그분을 이해할 수 있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영한 |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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