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200여 명이 이기풍을 죽이기로 서약했지만…”

▶ 성경 가두 판매로 전도하는 이기풍 선교사(출처: 한국 기독교회사photohs.co.kr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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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교열전 (22) – 제주도편 | 이기풍 선교사
▶ 성경 가두 판매로 전도하는 이기풍 선교사(출처: 한국 기독교회사photohs.co.kr 캡처)

종교개혁 500주년을 넘긴 2018년,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133주년을 맞았다. 구한말부터 본격화된 개신교 선교 역사는 문화, 교육, 의료 분야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맥을 같이 하며 한반도의 근대화와 함께 진행됐다. 우리나라 곳곳의 선교역사를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겨본다. <편집자>

거칠고 냉랭한 배척으로 시작된 사역

믿음으로 시작한 순종의 발걸음이었지만 제주선교는 그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이기풍은 제주로 가던 중 파선을 당해 표류하게 되었고, 출발한 지 44일 만에 어렵게 제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칠고 냉랭한 배척뿐이었다. 그가 제주로 파송되어 내려오기 4년 전에 있었던 ‘이재수의 난’으로 인해 제주도민들 사이에서는 ‘예수 믿으면 죽는다.’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어 예수의 이름을 듣기조차 거부하고 심지어 돌을 들어 치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게다가 평양 출신 이기풍은 제주 방언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모두 그를 증오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전도하기 위해 말을 걸어도 응대하지 않았다. 이기풍에게 묵을 수 있는 숙소를 내어주는 사람도 없었고, 점점 더 극심한 반대가 일어나 200여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를 죽이기로 도모하고 서약하기까지 했다.

제주 성안에서 계속되는 배척을 받은 이기풍은 선교사역을 위해 먼저 제주의 실정을 파악하기로 하고 성읍에서 빠져나와 한라산을 돌며 주민들과 부딪혀 보기로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와 접촉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산지 중심의 전도여행에 한계를 느끼고 바닷가로 나갔다가 탈진상태로 모래사장에서 쓰러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한 해녀의 집에 옮겨져 있었다. 감사하게도 후에 그 해녀가 이기풍 선교사의 사역의 첫 열매가 되었다.

이기풍이 제주에 온 다음 해인 1909년 5월 어느 날, 개울에 큰 홍수가 났다. 한 여인이 물에 빠져 떠내려가고 있었지만 누구도 무서워서 건져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기풍이 거침없이 물에 뛰어들어 그 여인을 살려냈다. 자기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되면서까지 여인을 살려낸 이기풍을 본 사람들은 “야소교 목사가 나쁜 놈이 아니구나!”하며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기풍 선교사의 전도 일화들은 마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이야기와 같은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제주 성내에서 귀신에 씐 광인을 몇 일간 집에 함께 머물게 하며 기도하고 찬송하니 정신이 온전해졌고, 다리를 다친 사람이 기도를 받고 기적적으로 낫기도 하는 등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다. 이후 환자나 귀신들려 고통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나음을 입고 천국 시민이 되어 자유를 누리곤 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와 같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

하나님께서 이 땅의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베푸신 은혜였다. 워낙 우상숭배와 샤머니즘에 매여 있었기에 그들의 굳어진 생각들을 깨뜨리시고, 이 땅 백성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이었다. 꼭 도마에게 예수님의 손을 만져보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는 일이 많아진 것은 이런 눈에 보이는 기적들 때문이 아니었다. ‘특별히 장례를 치르고 나면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일이 많아졌다.’는 이사례 권사의 간증으로 미뤄보아 진정으로 사람들이 마음을 열게 되었던 것은 이기풍 선교사와 윤함애 사모의 사랑과 헌신적인 섬김 때문이었다.

이기풍 선교사는 선교지인 제주를 자신의 고향처럼 사랑하며 섬겼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어려움과 절망의 시간은 있었다.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며 계속해서 겪게 되는 배척과 핍박에 힘에 겹던 이기풍 선교사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마펫 사무엘 선교사에게 편지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답은 이것이었다.

‘이기풍 목사, 편지는 잘 받았소. 그런데 나는 아직도 당신이 던진 돌에 맞아 다친 턱의 흉터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습니다.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는 분투하고 노력하시오.’ 이기풍은 낙담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대성통곡하며 회개했다. “내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데…” 그는 이전보다 더 전심으로 제주의 영혼들을 섬기게 되었다. [복음기도신문]

김성옥 선교사
참고문헌: 한국교회 첫 선교지 살리는 공동체 100년, 제주 성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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