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믿음의 영웅 중 한 명인 존 스토트는 “이중 경청”이라는 개념을 대중화했다. 그는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의 진리에 따라 형성되고 또한 현대 세계의 현실에 완전히 몰입한” 기독교인의 지성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스토트는 “이중 거부”라는 맥락에서 이중 경청이 필요하다는 프레임을 만들었다.
이중 거부
첫째, 우리는 세상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성경 공부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말씀이 세상과 별개로 존재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둘째, 우리는 세상을 따르기를 거부한다. 그렇기에 주변의 사건과 경향, 또는 이론에 너무 매료되어 이 세상을 말씀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또는 더 나쁘게는 세상의 기준으로 말씀을 판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이중 거부가 의미하는 바는 현실도피적 후퇴의 길과 혼합주의적 순응의 길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스토트의 비전은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이 옹호하는 “선교적 만남”과 유사하다. 선교와 만남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중요하다. 세상에 순응하는 것은 선교적 접점이 없는 만남이라는 결과를 만들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면 순결이라는 환상에는 이를지 몰라도, 우리가 다가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은 만날 수 없다.
이중 경청의 필요성
스토트는 이중 경청을 이중 거부가 가진 긍정적인 측면에서 설명한다.
우리는 기대와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혼란스럽고 원하지 않는 말씀을 주실 수도 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주변 세계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먼저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그들에게 말씀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고 노력한다. 스토트의 설명이다.
우리는 겸손한 경외심으로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이해하기를 열망한다. 그리고 이해하게 된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비판적 예민함으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을 이해하기를 열망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을 믿고 순종한다는 건 아니다. 단지 세상과 공감하고 복음이 세상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발견하기 위해 은혜를 구하겠다고 결심한다.
팀 켈러는 이중 경청에 있어서 최고의 모델이다. 성경에 뿌리를 두고, 청교도에 대한 독서와 더 폭넓은 개혁 전통에 참여하면서 신학적 성찰에 흠뻑 젖었던 이가 켈러이다. 그는 또한 사회 동향에 대해 늘 호기심이 많았으며, 비그리스도인의 문헌과 분석에도 정통했다. 그랬기에 켈러는 현대의 우상 숭배가 성경의 진리와 접촉하도록, 그것도 가슴을 찌르는 방식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켈러를 그토록 효과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이중 경청이다. 즉 말씀에 주의 깊은 관심을 기울임과 동시에 말씀에 비추어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분석하는 자세이다.
존 웹스터의 중요한 상기
이중 경청에 대한 스토트의 제안에 대해 내가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그건 스토트 때문이 아니라 그 표현이 오용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말씀을 듣고 세상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말씀을 듣고 적용하는 방법을 알기 전에 세상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먼저 해야 한다는 관념으로 쉽게 바뀔 수 있다. 스토트의 비전은 말씀에서 시작하여 그 말씀을 세상에 적용하려는 노력이다. 그에 반해서 이중 경청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목사나 교사가 우선 성경에 깊이 빠졌다가 나중에 때가 되면 세상의 문화를 분석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야 세상이 더 집중해서 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 웹스터(John Webster)가 “제자도와 부르심”이라는 강의에서 주는 중요한 교훈이 바로 그 부분이다. 그는 사실상 스토트의 말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임무가 항상 세상이 아닌 말씀에서 시작하고 계속해서 말씀이 강조되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실한 교회는 세상의 리듬을 따라가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흥분되고 불안정한 교회는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으며, 안정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이고 인내심 있는 관심, 그리고 과도한 자극을 피하는 데서 비롯된다.
교회가 주변의 변화하는 문화만큼 유행에 빠지고 흥분한다면, 교회는 참으로 독특한 무엇인가, 즉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서 나오는 안정된 확고함을 제공하는 능력을 잃을 것이다. 마치 스토트의 “이중 거부”가 피하려고 하는 또 다른 함정을 예상이라도 하듯이 웹스터가 말한다.
물론 교회는 세상이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질 것이다. 정중하고 진심으로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자기중심적이고 반응이 없는 일종의 긴장증에 빠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도피주의자의 후퇴란 있을 수 없다! 웹스터의 요점은 신실한 교회가 세상의 말을 들을 때 “세상이 떠드는 내용에 매료되거나 압도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복음은 우리를 매료시키고 우리를 모든 것으로 채워 준다.
예수에 집중하기
웹스터의 말이다.
복음은 언제나 세상을 능가한다. 예수님 자신은 세상보다 더 권위 있고, 합법적이며, 승리적이고 또 흥미롭게 말씀하신다. 교회가 정말로 세상을 사랑한다면, 교회는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적 표현을 듣기 위해 마음을 기울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복음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복음을 잘 듣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을 돕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이중 경청이 끝없이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말씀을 다 들었으니까 이제는 세상과 소통하면 되겠구나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쉬지 않고 말씀으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말씀을 배워야 하고 또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향해서 진리를 드러내는 길이다.
어쩌면 세상은 후기 현대, 포스트모던, 후기 자본주의, 세계화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는 우리가 지금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고백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그분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와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곳에 머물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우리에게 이미 성취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제시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분은 자신에게는 마땅한 권리이자 우리에게는 성취가 되는 순종을 기대하신다.
세상은 변한다. 그러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가볍고 찰나이다. 그러나 말씀은 무겁고 영원하다.
이중 경청이 가능하려면 말씀에 일시적인 우선순위를 두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꾸준히 말씀을 파고 또 파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바라본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 참여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말씀을 가져간다는 의미이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A Crucial Reminder for ‘Double Listening’
트레빈 왁스 Trevin Wax |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이다.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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