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으로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
이 내용은 지난 2011년 12월 복음기도동맹 주관으로 열린 다시복음앞에 연합집회의 둘째날 메시지를 요약한 것이다.<편집자>
십자가 복음 앞에 섰으면서도 여전히 ‘나는 아직 안 죽었나보다!’라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죽은 자로 살아지지 않는 것일까?
오늘의 말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히6:1)는 말씀을 주목해보자.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도(道)의 초보는 너무나 중요한 신앙의 기초라는 것을 전제로하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복음의 기초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하지만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 않으면 복음은 실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죽고 예수 사는 복음을 알았다면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게 해야 한다. 지금 그런 관점에서 한국교회를 보자. 한국교회만큼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고, 성경 많이 알고, 기도 많이 하는 교회는 전세계적으로 드물다.
이 모든 현상의 출발점에 1907년의 대부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07년은 이 땅에 기독교 복음의 기초를 놓았다. 그 기초위에 서서 지금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왜 1907년을 구하는가.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한국교회는 1907년의 부흥을 새롭게 구하기보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1907년 대부흥을 다시 주시는 것이 아닌, 이미 알고 있는 道를 살아내는 데 있다.
다시 복음 앞에 서야 하는 이유
알고 있는 데 왜 살아지지 않는가? 복음을 몰라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가 결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옛 사람으로는 안된다. 십자가 복음을 실제로 경험해야 한다. 나의 옛 생명과 옛 삶을 끝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통해 옛 생명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삶이 시작된다.
복음은 삶을 송두리째 바꾼다. 복음은 능력이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했다. 우리가 이번에 다시 복음 앞에 서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이 실제 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르는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주님은 약속하셨다(마28:20). 사명과 임마누엘의 축복을 함께 주셨다. 우리 안에 임마누엘 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갈2:20, 롬15:18).
예수님은 한 때 사셨다가 지금은 하늘 저편에 계신 분이 아니다. 십자가 복음 앞에 서서 십자가를 통과한 자들 안에 영원히 살아 계신다. 이 사실을 믿는 자는 함부로 죄를 지을 수 없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용서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십자가 복음은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진리이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것이 복음이다. 이 복음을 누리는 길은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주로 모셔 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함께 먹는다고 하셨다(계3:20). 예수님과의 동행은 친밀하고 황홀하다. 예수님을 항상 의식하고 살라. 이미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신 것을 인정하라. 이것을 매 순간 의식하라.
하나님이 이 사실을 십자가 복음으로 이미 이루셨다. 말 한 마디, 마음의 감정 한 토막도 정말 예수님을 의식하면서 하라. 내가 죽는 것은 예수로 살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죽는 것은 기쁨 그 자체다.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라
이것은 중요한 훈련이다. 훈련하지 않으면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우리 주님과의 관계, 친밀함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계속 바라볼 때 나도 모르게 믿어지고 누리게 된다.
마음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라.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아무 생각이나, 아무 감정이나 가질 수 없다. 이렇게만 하고 단 한 달만 살아보라. 일 년을 살아보라. 믿음이 뭔지, 하나님의 계획이 뭔지, 하나님의 역사가 뭔지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