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중계4] “내 방식대로 믿는 것을 버려야 한다”

다시복음앞에

20171101hadokunP하도균 목사(서울신학대학교 전도학 교수)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내 방식대로 예수를 믿는 것이다. 교회당 열심히 나오는 것, 헌금 잘하는 것, 봉사 열심히 하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일까? 과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구약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과 회복을 반복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방식대로, 익숙한 대로 믿고 살았다. 중요한 믿음의 본질들이 고장 났다. 오직 믿음이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슬로건인가? 믿음의 ‘능력’과 ‘역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외치는 것일까? 왜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을까? 오늘 한국교회는 무엇이 고장 났기에 위기를 맞았을까?

롬 1:17은 복음의 금강석이다. 이 구절에 등장하는 세 단어 복음, 의, 믿음이라는 단어들은 모두 관계적이다. 누구를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만남, 관계가 전제되어야 믿을 수 있다. 복음이 완제품이라면 믿음이라는 것은 완제품이 작동할 수 있도록 ‘플러그 인’하는 것이다. 또한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야 한다. 경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믿음의 대상에 대한 신뢰가 생겨날 수 있다. 믿음을 형성하는 요소 중에서 헌신, 내려놓음은 정말 중요하다. 믿음의 지속, 이것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 믿음의 성장은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포기하게, 내려놓게 한다. 이것이 믿음과 십자가의 관계다.

‘광야’라는 단어는 ‘말씀’이라는 단어에서 왔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믿음을 광야에서 훈련하셨다. 광야 40년 징계는 우리의 부패성, 죄성(罪性)을 아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죄의 뿌리가 드러날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게 된다. 광야의 훈련 없이 믿음의 완성은 없다. 정말 믿음의 사람 되기 원한다면 이 광야는 필연적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전심, 온 마음이다. 광야는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걸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의 순례자다(히 11:13~16). 믿음의 선진들은 나그네, 외국인으로서 살았다. 기독교는 이 땅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광야에서 나그네로 살게 하신다. 집시는 목적지가 없지만, 나그네는 출발점과 목적지가 있다. 나그네는 천국을 바라보며 산다.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힘을 잃어갈까? 구원 받아 출발은 했지만, 도중에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야곱이 나그네 삶을 시작했을 때부터 성경은 그를 주목했다. 벧엘에서 하나님은 그와 언약을 맺었다. 그 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그 후에 세겜에서 나그네 삶을 포기하고 10년간 살았다. 이 기간에 대해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나그네’ 정체성을 포기한 결과는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한 사건이었다. 창 35장에서 성경은 야곱이 ‘세겜’이 아닌 ‘밧단 아람’에서 돌아왔다고 말씀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출발을 했으나 세겜 땅에 주저앉아 있는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바란다.

내 방식대로 예수 믿는 것을 멈춰야 한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점검해 봐야한다. 잘못된 길에 있다면 돌이켜야 한다. 여호수아는 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는 유언을 했을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끊어진 채 말이다. 하나님을 섬기지만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하나님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스라엘의 신앙은 유일신 신앙이 아니었다.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여호수아는 눈물로 호소했다. 오늘 이 신앙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믿음의 어느 부분이 고장 나 있는지 점검해 보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가, 당신의 믿음은 경험되는 믿음인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포기하고 있는가, 내려놓고 있는가. 고장 나지 않은,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광야에 있을지라도 소망을 품게 될 것이다. ‘소망’이라는 단어도 힘이 되거든 하물며 ‘산 소망’이겠는가? 이 ‘산 소망’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살게 한다. [RTTG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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