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이라는 단어는 형과 동생 사이에 일어나는 깊은 애정, 신뢰, 헌신, 희생, 가르침 모두를 의미한다 ”
오늘 이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은 나를 그들의 어깨 위에 세워 준 형들 덕분이다. 지나온 53년의 내 인생에서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은 나를 가르치고 사랑해 준 지혜롭고 경건한 여러 형들에게서 거의 전부 비롯되었다. 그러니 지금 나누려는 PCA(미국장로교) 교단의 미래에 대한 나의 짧은 생각들은 나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들의 어깨를 내어준 형들에게서 빌려 온 것임을 알아주길 바란다.
여기서 ‘형’이라는 단어는 사회 계층이나 나이 차이 이상의 것을 표현한다. 특히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형과 동생 사이에 일어나는 깊은 애정, 신뢰, 헌신, 희생, 가르침 모두를 의미한다.
러셀 무어(Russell Moore)는 존 스토트(John Stott)를 기리는 최근 글에서 스토트가 사역을 하면서 겪은 문화적 도전에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스토트는 교리와 선교 모두에서 진실성(integrity)을 강조했다. 이런 이유에서 스토트는 성경이 ‘둘 중 하나’라 한 것을 ‘둘 다’라고 하는 것을 거부했다. 여호와와 바알, 하나님과 맘몬, 예수와 가이사 둘 다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 성경이 ‘둘 다’라고 한 것을 ‘둘 중 하나’라고 하는 것도 거부했다. 은혜와 진리, 해석과 적용, 전도와 정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책임과 자비, 확신과 존중, 지성과 감성, 교단에 뿌리를 두는 자세와 글로벌하게 연결되는 자세, 여기서 우리는 ‘둘 다’여야 한다.
다양한 이슈와 아이디어가 우리를 사방팔방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바로 지금, 이러한 접근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바람직한 균형을 잡아 준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것은 상당한 지혜를, 여러 형님들의 지혜와 균형을 요구한다. 사실은, 내가 주장하는 지혜는 우리 모두의 지혜다. 우리에는 서로의 지혜가 필요하다.
여기서 미리 언급할 것은 우리가 PCA의 미래를 구상할 때,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이 정확하게 말했듯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우리 교단의 근본적인 정체성과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 무오한(inerrant) 성경은 신앙과 삶의 유일하고 정확한(infallible) 규범이며,
•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에 요약된 위대한 개혁주의 교리는 참되며,
• 지상 명령은 우리 교회의 소명이다.
이것에 더하여,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다가가서 가르쳐야 하는 것은 막중한 책임이요 특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지역사회에서 전도와 제자훈련은 필수적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앞을 걸어간, 나에게 어깨를 내어 준 이들에게 내가 빚진 이유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막중하고 두렵지만,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 많은 디도서 2장의 우리 ‘형’들의 은사 덕분에, 우리의 미래는 밝다.
나는 우리에게 많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이제 PCA의 미래에 대한 내 생각에 영향과 도움을 준 두 형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형, 돈 카슨
돈 카슨은 내가 박사과정에 있을 때 지도교수들 중 한 분이었을 뿐 아니라, 지역 교회의 목자들이 양떼를 잘 먹이고 보호하려면 얼마나 성경적, 역사적, 세계적이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 분이다.
카슨 박사는 신약성경의 세심한 학문적 업적과 가르침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전도와 세계 교회에 대한 그의 열정도 알고 있다. 특히 주석과 성경 신학 분야에서 학자로서 쌓은 성과와 더불어, 그는 국내외를 순회하며 특정 단체를 확장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복음 중심의 ‘운동’을 육성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편향적 이슈를 조장하는 편협한 조직이 아닌, 복음 중심의 글로벌 운동을 육성하는 아이디어는 탐구할 가치가 있다.
TGC의 글로벌 비전에 대해 카슨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TGC는 해외 그룹들이 미국의 통제를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일종의 새로운 전 세계 선교라는 식으로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고, 효과적이고 서로를 격려하는 친교를 전 세계에 이루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그가 한 말을 눈여겨보자. 여기서도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그는 일종의 미국 교구가 세계 교회에 권위를 행사한다는 식의 생각이 아니라, 목회자와 지도자로서 우리의 소명에는 같은 생각을 가진 전 세계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함께하는 동역이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미국 기독교가 아니라 세계 기독교를 촉진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겸손하게 인정할 때 많은 혜택과 축복이 온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통계에 익숙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볼 때, 지난 100년은 “교회”의 구성 요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세계 기독교의 지도가 바뀌었다. 예를 들어, 1900년이 시작되는 시점에는 세계 기독교 인구의 90퍼센트가 미국과 유럽에 거주했고 10퍼센트만 비서구권(Global South와 Global East)에 살았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2000년에는 세계 기독교 인구의 단 30퍼센트만이 미국과 유럽에 살았고, 거의 70퍼센트는 비서구권에 거주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성공회 인구가 영국과 미국의 성공회 인구를 합한 것보다 더 많다. 공산 국가 중국의 기독교 인구가 유럽 전체 기독교 인구보다 많다.
바로 이런 변화 때문에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 같은 선교학자들은 현실(real) 기독교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기본 전제를 버려야 하며, 우리 안에 있는 잠재적 맹목성을 재고하고 서구 기독교가 문화적 우상숭배에 감염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TGC 설립자인 돈 카슨과 팀 켈러(Tim Keller)는, 개혁주의 유산 안에 있는 역사적, 고백적 기독교의 중심을 회복한다는 그들의 목표에 더하여, 복음 중심적이고 복음 주도적인 사역 운동을 통해 공동선을 추구하는 대항문화적 교회들에 속해 있는 같은 생각을 가진 목회자들의 연합을 이루고자 했다.
그리고 이 사역에는 반종교의 위험과 종교의 위험으로부터 양 떼를 보호하는 것도 포함된다. 목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삼가고” 또 “온 양 떼를” 잘 보살피라는 사명을 받았다. 성령은 우리를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사나운 이리들”을 막게 하셨다(행 20:28-29).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하나 됨을 추구하면서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 1:3)는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 됨을 위해서 순결을 희생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다양한 위험 수준을 볼 수 있는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요즘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있다. “( )가 기독교 교회에 큰 위협이다.” 우리는 이 빈 칸을 인종차별, 성차별, 여성우월주의, 근본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전통주의, 실용주의, 개인주의, 또 모든 것을 망라하는 놀라운 단어 ‘깨어있음’(wokeness, 또는 ‘사회정의각성운동’)로 채울 수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런 이념들의 위험성을 좌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실제적이고 현재적인 위협이다. 깨어 있는 목자로서 우리는 양 떼를 삼키려고 위협하는 이리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더 넓은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것들 하나하나의 위치를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광범위한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옛 철학들에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전 세계의 그리고 지난 세대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우리만 독특하게 겪는 것일 수도 있는 위협들에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협들은 그저 새 부대에 들어 있는 묵은 포도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혁명 뒤에 있는 더 큰 위협을 알면 도움이 될 것이다. 칼 투르먼(Carl Trueman)이 잘 설명했듯이, 트랜스젠더 혁명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 세상의 신념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자기표출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alism)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다. 따라서 시야를 넓히면 그 증상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양 떼의 영적 건강을 실제로 위협하는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
신학적 중증도분류
더 크고 넓게 생각하면 목자로서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인 신학적 중증도분류(triage)를 실시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환자의 의학적 응급 상황, 우리의 경우에는 영적 응급 상황에 대한 우선순위를 매기는 방법을 지혜롭게 분별하는 것이다. 병원의 응급실이나 전장의 최전선에서 의료진은 먼저 어떤 환자를 가장 먼저 돌봐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다른 위협보다 더 위험한 위협이 있으므로, 긴급성 판단은 현명한 절차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
나는 이것을 2005년에 앨버트 몰러(Al Mohler)에게서 배웠는데, 그는 생사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지혜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이 의학적 비유를 썼다. 그는 신학적 긴급성을 세 단계로 분류했다.
• 1 단계는 기독교 신앙에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제1 순위 교리를 포함하는데,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 및 인성, 이신칭의, 성경의 권위 같은 것들이다.
• 2 단계, 또는 제2 순위 교리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중대한 경계선들을 설정하기도 하는 것들이다. 몰러는 세례의 의미와 방식, 목회 사역에서 여성의 역할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신념과 실천의 틀을 형성할 신자들 사이에 가장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다.
• 3단계, 또는 제3 순위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친교를 유지하는 것들이다. 종말론 논쟁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나는 몰러의 분류에 대한 장단점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비유에는 허점이 있고 미묘한 뉘앙스를 더 많이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인정한다. 이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를 말하려 하는 것이다.
1. 목자로서 우리의 임무 중 하나는 목회 우선순위라고도 알려진 이 신학적 중증도 분류라는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다.
2. 이러한 중증도 분류는 더 폭넓은 관점에서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을 바라볼 때 현 사회 문제들은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 고려하는 것을, 그리고
3. 이 지혜를 우리만의 특별한 양 떼를 먹이고 지키는 데 적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크게 생각하라, 작게 생각하라
다시 말하면, 우리는 크게 생각하고 작게 생각해야 한다. 크게 생각한다는 것은 위를 보아야 하고 또 아래를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에 하시는 일을 보려면 우리는 글로벌한 시각으로 그리고 역사적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북미 교회가 당면한 몇 가지 문제를 보도록 도울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작게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성경과 우리의 동역 목자들의 집단적 지혜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특별한 양 떼에게 진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 소셜 미디어가 우리나 우리 양 떼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아닌지 훈련하고 왜곡하게 해서는 안 된다. TGC 블로그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 벗어나라. 온라인에서 가장 크게 지르는 소리의 볼륨을 줄여라. 그리고 여러분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보살피는 최선의 길이 어떤 것인지 주의하여 분별하라.” 현명한 조언이다.
둘째 형, 팀 켈러
돈 카슨의 지혜와 더불어, 나는 TGC의 또 다른 설립자인 팀 켈러에게서 배울 수 있는 크나큰 축복을 누렸다. 켈러 목사가 어떻게 설교와 출판 사역을 통해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는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이 세대에 도움이 되는 그의 통찰에 대해 몇 가지를 나누려고 한다.
2017년 켈러 목사는 총회에서 우리 교단에서 발견되는 세 주요 분파, 소위 교리주의, 경건주의, 문화주의가 가하는 다양한 충격들을 상기시키는 연설을 했다. 미국의 개혁주의 교회들의 역사에 대한 조지 마즈든(George Marsden)의 이해에 영향을 받은 켈러 목사는 2010년 쓴 글에서 이런 갈등들을 지적했다.
교리주의자들은 우리 가운데 “정체를 숨긴 자유주의자”가 있고 일부 교회의 사회적 참여 강조가 필시 교리적 타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항상 걱정한다. 사회 정의(문화주의) 분파에 속한 사람들은 우리 교단에 문화적 반동으로 기우는 사람들이 있으며, 사회 참여에 대한 공포증으로 인해, 과거에 보수파들이 (가령 노예제도를 두고) 그랬던 것처럼, 불의에 눈을 감고 있다고 걱정한다. 경건주의 분파는 전도의 열정이 부족한 것을 큰 죄로 여기고 다른 분파들의 영적인 생명력을 의심한다. 이렇게 문제가 발생하고, 억눌린 에너지(공포와 좌절)가 터져 나온다.
각 분파가 저마다 중요한 성경적 통찰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그들에게는 각자 고유한 약점이 있다. 각 분파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정확하다. 켈러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교리주의 분파는 그 순수함을 버리고 교만과 독선을 낳을 수 있다.…경건주의 분파는 매우 실용적이고 결과에 신경을 쓰며, 징계나 신학적 논쟁 과정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한다…문화주의 분파는 현대 학문에 지나치게 매료되고 있다. [더불어 그에 상응하여 정통 신학의 침식을 초래하고 있다.]
이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이 분석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의 대부분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이러한 충격들에 기인한다.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더 복잡하고, 솔직히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장로교 시스템에서 솔직한 대화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셜 미디어에서 우리 대화를 우리가 정치화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지혜롭지 못하며, 이렇게 하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더욱 더 멀어지고 있다.
켈러 목사는 한 교회가 이 분파들 중 하나를 제거하려고 할 때, 또는 한 분파가 너무 낙심하여 교회를 떠나려 할 때, 그 교회는 한 두 세대 안에 젊은 지도자들이 그 떨어져 나간 가지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켈러가 바르게 지적했다고 생각한다. 켈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리차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는 교리주의자들은 믿음을 전파하는 일보다 (이단적인 “감염”에 맞서서) 믿음을 수호하는 일을 더 잘하는, 백혈구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곤 했다. 경건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실용주의 때문에 믿음을 전파하는 일을 더 잘하지만, 종종 교리에 대한 무관심이나 쇠퇴에 문을 열어 준다는 점에서 적혈구와 같다. 적혈구보다 백혈구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백혈병이고, 백혈구보다 적혈구가 지나치게 많은 상태가 에이즈이다. 우리는 서로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편할 수는 없지만 함께 있으면 훨씬 더 견고하고 활력이 넘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모두 더 나은 형들이 되어야 한다. 각 분파는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분파를 필요로 한다. 각 분파에는 저마다 사각지대가 있다. 다시, 켈러 목사의 말이 도움이 된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주제가 인종차별이건 섹슈얼리티이건 상관없이, 우리의 신앙고백을 포기해서도 안 되며, 서로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
인종차별과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한 작금의 대화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지극히 중요한 문제이며 따라서 우리에게도 그렇다. 그러나 켈러 목사가 정당하게 제안한 바와 같이, 온라인에서 논쟁하거나 교회 재판부에 회부하기 전에 필요한 시간을 내어 차이점을 논의하고 서로에게 배워야 한다.
지난 16개월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이 시대에 목사로 산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PCA를 이토록 위대하게 만드는 것, 곧 믿음과 삶을 위한 유일한 규범으로써 무오한 성경에 충실하겠다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약속,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에 요약된 위대한 개혁주의 교리에 진실하겠다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약속, 지상명령을 완수하겠다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약속에 계속 초점을 맞춘다면, PCA의 미래는 밝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실성을 가지고서 우리를 PCA 되게 하는 일에 전념하듯이, 우리는 또한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간구하시는 하나 됨을 위해 분투해야 하다. 하지만 이 성실성과 이 하나 됨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서로 앞에서 겸손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위대한 구원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 위대한 복음은 우리가 서로를 위해 희생할 때 우리가 하는 일에 지속해서 생기를 불어 넣어 줄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이 성실성과 하나 됨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서로 앞에서 겸손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서로의 어깨 위에 서야 한다.
그리스도의 어깨 위에 서라
이런 희생적인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나의 또 다른 형인 브라이언 채플은 그의 저서 <서로를 위해>(Each for the Other)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두 형제가 강변 모래 둑에서 놀기로 했다. 우리 마을은 이 강에 의지해서 상업을 하기 때문에 준설선이 정기적으로 강바닥에서 모래를 긁어내어 강 옆에 쌓아 큰 언덕을 만든다. 아이들에게는 이 모래 산더미에서 노는 것보다 더 재밌는 것도 없지만, 그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준설선이 강바닥에서 훑어낸 젖은 모래는 강변에 버려진다. 이 모래 더미는 겉만 단단하게 건조되는데 종종 모래에서 빠져나간 물이 그 속에 동굴을 만든다. 아이들이 이런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이 있는 모래 언덕을 오르면 그 표면이 쉽게 동굴 안으로 무너져 내린다. 언덕 위의 모래가 빠르게 빈 공간을 채우고, 아이는 패인 구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두 형제가 그 큰 모래 언덕으로 질주했을 때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났다.
형제가 저녁시간이 되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과 이웃들은 수색에 나섰다. 그들은 동생을 찾았다. 머리와 어깨만 모래더미 위에 남아 있었다. 몸에 가해진 모래의 압력 때문에 정신을 잃은 채 있었다. 수색하던 사람들이 미친 듯이 모래를 파내기 시작했다. 허리까지 모래를 치우자 동생의 의식이 돌아왔다.
“형은 어디 있니?” 그를 구한 사람들이 큰 소리로 물었다. 동생은 대답했다. “제가 지금 형 어깨 위에 서 있어요.”
형이 자기 목숨을 희생하여 동생을 안전하게 떠받쳤던 것이다.
우리를 형제요 자매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히 2:11) 분도 그렇게 하셨다. 우리의 큰 형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방종과 자기중심의 죄에서 우리를 풀어 주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우신 어깨 위에서 하나님 앞에 서고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 예수님은 교회의 평화와 순결과 일치를 추구하라 우리를 부르신다. 서로의 어깨 위에 서는 법을 배우라 부르신다.
나는 PCA의 미래를 이렇게 그린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굳게 잡고 서로를 붙잡아 주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힘을 얻어 모두가 갈망하는 일관성과 겸손과 일치를 이루는 곳이 될 것이다.
우리의 큰 형이신 예수님과 그의 희생을 생각할 때, 나의 기도와 소망은 우리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형이신 예수님을 따라 서로를 어깨에 세우는 것이다.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라도.
“ 크게 생각한다는 것은 위를 보아야 하고 또 아래를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에 하시는 일을 보려면 우리는 글로벌한 시각으로 그리고 역사적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
Julius Kim | 줄리어스 김(MDiv,Westminster Seminary California; PhD,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은 미국 TGC의 대표다. 그는 뉴라이프장로교회(New Life Presbyterian Church)에서 협동목사로,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Seminary California)에서 실천신학 초빙교수로도 사역하고 있으며, 대표 저서로 한국어로 번역된 ‘설교학: 복음 중심적 설교의 설계와 전달’이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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