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술은 우리가 뭘 사랑하는지 얼마든지 거짓으로 말할 수 있지만,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은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
영혼은 비행으로 측정된다.
어떤 영혼은 낮게 날고 어떤 영혼은 높게 난다.
마음은 그가 즐거워하는 대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기쁨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
존 파이퍼(John Piper)의 ‘하나님의 기쁨(The Pleasures of God)’이 처음 출간된 1991년에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당시 아내와 나는 존 파이퍼가 시무하는 베들레헴 침례교회(Bethlehem Baptist)에 2년째 다니고 있었다. 거기서 존 파이퍼가 쓴 ‘하나님의 기쁨’, 그가 기독교 희락주의(Christian Hedonism)라고 부르는 내용을 자세히 설명한 바로 그 책을 읽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영광스러워진다는 진리의 강조는 우리 부부의 영적인 뼛속까지 강력하게 울렸다.
내가 ‘하나님의 기쁨’ 서문을 읽었을 때 위에서 인용한 시는 내 속에서 기독교 희락주의의 진리를 생생하게 보여주었고, 기독교인의 삶에서 기쁨이 담당하는 역할을 향해 내 마음을 활짝 열었다.
한 문장은 다른 문장을 낳는다
파이퍼는 그가 4년 전에 읽었던,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킨 문장의 주석이라는 의미로 내 삶을 변화시킨 바로 그 문장을 썼다. 사실 파이퍼의 책을 탄생시킨 전체 설교 시리즈는 17세기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라는 스코틀랜드의 젊은 신학 교수가 쓴 한 문장을 깊이 묵상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스쿠걸은 개인적으로 친구에게 보낸 영적 조언을 담은 편지에서 그 문장을 썼는데, 내용이 너무 심오해서 많은 사람이 그 편지 내용을 베껴서 퍼뜨리기 시작했다. 결국 스쿠걸은 1677년에 그 내용을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스쿠걸은 스물여덟 살이 채 되기도 전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파이퍼는 무엇이 그를 그토록 강하게 사로잡았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 문장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 문장은 1987년 초반 내내 나의 생각 전체를 사로잡았고, 약 3개월 동안 묵상의 중심이 되었다. 이 문장에서 스쿠걸이 말한 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보물 상자를 여는 열쇠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그 영혼이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측량된다.”
파이퍼는 이 말이 사람에 대한 것만큼이나 하나님에게도 해당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대상으로 측정된다. 따라서 그 사랑의 대상은 반드시 하나님 자신이어야만 한다. 왜냐면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이퍼는 이전에 ‘하나님의 기쁨’에서 한 장 전체를 자기 자신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행복, 즉 하나님이 가진 하나님 중심성(God-centeredness)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그러나 스쿠걸의 문장은 파이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혼의 탁월함을 측정하는 방법을 숙고하는 과정에서 이 진리가 가진 영광스러운 새로운 차원을 보도록 인도해 주었다. 그리고 파이퍼의 문장은 인간이든 신이든 그 마음은 그가 누리는 기쁨으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묵상하기 시작한 내게 영광스러운 새로운 차원을 열어 주었다.
기쁨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내게 가장 충격을 준 문장은 파이퍼가 쓴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마음은 그가 즐거워하는 대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기쁨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
기쁨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이 구절로 인해 나는 혼란과 자기기만을 관통하여 문제의 핵심, 즉 내 마음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기쁨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이 말은 쾌락으로 여기는 대상이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다 개인적인 경험뿐 아니라 성경의 증거를 통해 이 세상의 수많은 쾌락이 거짓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히 11:25). 사실 이 문장이 말하는 진짜 의미는 기쁨은 마음의 정체를 드러내는 내부 고발자라는 것이다. 기쁨은 우리가 진짜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마음의 방식이다(마 6:21).
사악한 것을 즐기는 경우 쾌락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사랑하는 대상(treasure)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마음속 쾌감 측정기는 원래대로 작동하고 있다. 단지 잘못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사랑하는 대상이다. 입술은 우리가 뭘 사랑하는지 얼마든지 거짓으로 말할 수 있지만,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은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쾌락을 주는 대상이 선이든 악이든, 그것을 결코 오랫동안 숨겨둘 수는 없다. 우리가 진짜 사랑하는 대상은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 밖으로 나와 우리가 말하거나 행동할 때 혹은 표정이나 몸짓을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낸다.
내 마음도 하나님의 마음처럼 무엇을 기뻐하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나는 이 사실이 놀랍도록 명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내 모든 경험은 그 진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성경 전체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이 진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비참할 때 보이는 기쁨
내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이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비행 높이로 측정된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꾸밈이나 변장 없이 “벌거벗은 거 같이 드러나기”(히 4:13) 마련이다. 아무리 강력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 신학에 근거한 신앙 고백을 하더라도, 내가 가진 은사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 어떤 “살았다 하는 이름”(계 3:1)도,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나의 부족함을 대신 채울 수는 없다. 그리고 애정의 척도에서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파이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미지근한 관심 또는 이를 악문 결심 정도로 영혼의 영광을 판단하지 않는다. 영혼의 비율을 알기 위해서는 영혼의 열정을 알아야 한다. 영혼의 진정한 차원은 영혼이 누리는 기쁨에서 드러난다. 그냥 의무감 정도로 원하는 게 아니라 열정으로 갈구하는 무엇인가가 우리의 탁월함 또는 악함을 드러낸다.
내가 가진 열정을 하나님 영혼의 척도에 놓고 볼 때 나의 부족함은 분명해진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관해서 내게는 여러 종류가 섞여 있다. 시편 63편에서처럼 하나님을 음미할 수 있지만, 시편 51편에서처럼 여전히 죄를 지을 수도 있다. 시편 73편 25-26절처럼 하나님을 소중히 여긴 적도 있었지만, 시편 73편 2-3절처럼 하나님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때로는 시편 23편 1-3절처럼 감미롭게 찬양을 부르기도 하지만, 시편 10편 1절처럼 쓴 마음으로 찬양하기도 한다. 때로는 로마서 7장 24절의 비참함을, 로마서 8장 1절의 경이로움을 예리하게 느끼기도 한다. 나는 시편 119편 105절의 빛과 시편 88편 1-3절의 어두움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로마서 12장 11절의 맹렬함뿐 아니라, 요한계시록 3장 15절의 미지근함도 알고 있다. 이런 나는 마태복음 26장 41절 예수님의 권고가 반복해서 필요하다.
내 마음의 상태와 내 영혼의 가치를 드러내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만을 손에 들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자비로운 비참함이다. 진정한 영적 풍요함을 진지하게 구하려면 먼저 영적 빈곤부터 알아야 한다. 회개하고 다 버리기 전에 우리는 내 속에 자리하고 있는 비참한 우상 숭배를 보아야 한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시 85:6)라고 부르짖기 전에 우리는 영적 죽음을 먼저 느껴야 한다.
이 모두는 다 진리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파이퍼의 문장을 더 오래 숙고할수록 내 영적 빈곤의 파괴적인 노출이야말로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영원한 세계로 가는 문을 의미한다는 것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영원무궁한 기쁨
나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바로 이 사실을 발견했다(막 10:17-22). 예수님이 청년으로 하여금 마음속 진정한 열정을 보도록 하셨을 때(달리 말하면, 그의 영적 가난을 드러냈을 때) 그것은 그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예수님의 주된 목적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기 위해, 그가 “하늘에 있는 보배”를 갈망하길 원하셨다(막 10:21).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하나님을 그의 최고의 보물로 보지 않는 한, 그 청년은 결코 하나님을 얻기 위해 모든 재산을 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마 13:44).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의 폭로라는 파괴적인 방법을 통해서 그의 마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청년은 그 문을 열지 않았고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 문은 그가 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보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행복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기쁨이 우리 안에도 거하고 또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기쁨을 창조하셨다(요 15:11).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보물의 척도로 쾌락을 설계했을 때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그 보물, 바로 하나님(the Treasure) 안에서 최대한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서 경험하는 기쁨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영광스러워진다.
우리가 누릴 영원한 기쁨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 속 가난을 먼저 드러내야 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그분 앞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우편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시 16:11). 그러므로 우리의 기쁨이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때로는 파괴적으로 느껴질지 몰라도 이것은 실로 크나큰 자비이다. [복음기도신문]
“ 진정한 영적 풍요함을 진지하게 구하려면 먼저 영적 빈곤부터 알아야 한다 ”
존 블룸 Jon Bloom | Desiring God의 공동 설립자로 이사장과 작가로 섬기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믿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와 ‘Not by Sight’ 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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