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계획과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깨닫고 누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말씀을 통해 어떤 이는 가슴을 치게 될 것입니다. “아, 이것이 문제였구나!” “나에게서 이것을 거두어 가시려고 하셨구나!”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가 깨달아져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이 심령 가운데 들어을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열기를 바랍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9)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이 있지만, 우리는 예비하신 모든 것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것을 받지도 못하고 일생을 마칠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면 애틋해집니다. 자녀가 어긋나서 잘못된 길이라도 가면 부모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픕니다. 그래서 자녀를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자녀를 아무리 잘 훈육한다고 해도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삶을 마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목사와 성도가 있다 하더라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교회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 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 2:10-14)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 두 가지 영이 나옵니다 세상의 영이나 하나님의 영은 모두 ‘받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영을 받으면 성령의 일들이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럽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성령의 일을 알 수도 없게 됩니다. 세상의 영이 우리에게 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보내는 실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영에 대한 개념이 분명히 해야 세상의 영이 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의 영이 올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막아내고 퇴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실제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실제적입니다. 실제로 보는 것이고 실제로 아는 것이고 실제로 느끼는 것이고 실제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실재가 되지 못하는 믿음은 관념입니다. 믿음은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써야 능력이 드러납니다. 믿음을 써야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믿음을 써야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실재가 되지 못한 믿음은 관념일 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으면 은혜를 보게 됩니다. 쥘 수도 있고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게 됩니다. 반대로 세상의 영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을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신다는 것을 알기는 하는데 그것은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임에도 그 일에 뛰어들지 않고 행하지도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를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는 실제로 구원과 생명의 방주였습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노아의 가족들에게 손가락질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아? 하나님은 꼭 그렇게만 역사하시는 분이야?”
그러나 하나님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은 방주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지 않은 사람은 방주 만드는 것을 미련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마음도 폭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시지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영이 깃들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미련하다고 여기지 않고, 예! 그 길밖에 없습니다! 하는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아니면,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됩니까?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주님과 잘 소통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잘 알아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왼쪽! 하시면 왼쪽으로 가고, 멈춰! 하시면 멈추셔야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이 갈 때 함께 갔습니다. 구름기둥이 멈출 때 백성들도 멈췄습니다.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입니다 몸과 마음이 피곤해도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우리도 움직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20여 년 전 신학과 상담을 공부할 때 필독서였습니다. 화성의 남자가 망원경으로 금성의 여자를 발견합니다. 화성 남자는 금성 여자에게 반해서 금성으로 갔고, 함께 지구에서 살기로 합니다. 그런데 지구로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해서 기억력이 손상됩니다. 지구에서 살면서 둘은 서로 다른 종족이라는 사실을 잊고 싸웁니다. 한 사람은 화성인, 한 사람은 금성인인데 둘이 지구에서 같이 사니까 한 종족인 줄 알고 싸우는 것입니다.
책의 요지는 남녀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문제가 생기면 동굴로 들어갑니다. 깊이 생각하며 해답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문제가 생기면 친구를 찾아갑니다. 여자는 공감이 필요하기에 밖에 나가서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가 들어간 동굴 앞에서 언제 나올 거냐고 묻습니다. 책은 “여자의 말을 읽어주라 남자는 기다려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은 그런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 속은 무엇을 보충하거나 개선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잘 소통하는 것은 우리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고 하나님의 영, 성령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속마음이 바뀌어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속마음이 바뀌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1-3)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입니다. 우리는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습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 사는 욕구가 강할수록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와 가깝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탄입니다.
‘공중’은 무엇입니까? 우리 앞에 있는 이 공간입니까? ‘공중’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사탄이 공중의 권세를 잡았다는 말은 곧 사탄이 우리 마음을 잡았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이 우리 육신 안에만 머물러 있습니까? 아닙니다. 마음은 소우주입니다. 우리 마음은 어디든 갑니다. 미국에 자녀가 있으면 우리 마음은 미국까지 갑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을 붙잡아 부립니다. 그래서 세상 풍조를 따라가게 합니다. “이것 있어야 네가 힘이 있고, 이것 있어야 네가 낙오되지 않고, 이것은 갖춰야 네가 편히 살게 돼!” 사탄은 우리를 이렇게 속이며 자기 마음대로 우리를 부립니다.
신약의 4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돈을 사랑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까? 예수님께서 돈을 너무 좋아하셔서 우리에게 풍요를 주시고 경제 부흥을 주시려고 선민들을 인도하셨습니까?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왜 세상 사람들은 돈을 그렇게도 좋아할까요? 돈맛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까요? 공중 잡은 권세가 우리 마음에 돈을 심어 줬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보다 돈이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 떨어졌다고 마음이 아프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떨어졌다고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돈 떨어지면 어떻게 표현합니까? 돈 떨어지면 죽겠다고 말합니다. 우리 삶을 보면 돈이 훨씬 더 강력합니다. 믿음 떨어지면 혼자 아파하는데, 돈 떨어지면 주변을 다 아프게 합니다.
“화나게 하지마, 건드리지 마!” 이런 말을 종종 들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믿음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화가 나지 않게 하는 어떤 조건이 갖춰지면 화를 내지 않게 됩니다. 크리스천이 자주 빠지는 함정은 화가 안나게 하는 조건을 갖추려고 매우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속입니다. “이 조건을 갖춰야 네가 화가 안나고, 네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거야!”
이 속삭임에 넘어가면 하나님의 일들은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속에 화가 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화를 참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속에 이미 화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근본인 속사람을 바꾸어 날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인 줄 몰랐습니다. 십자가가 그렇게 큰 능력이 있는지 몰랐 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가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것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실제 일상을 보면, 유일한 길인 십자가로 달려가지 않고 다른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님의 능력을 끌어당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을 받지 않고 세상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이 아니라 성경의 진술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되면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이 있습니다. 회개 기도를 뜨겁게 해서, 방언으로 열심히 기도해서, 40일간 작정해 기도한 뒤에 받았다고 말하는 성령은 의심해 봐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속을 바꾸어놓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만 실제 구원자로 오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위로부터 오셨습니다(요한복음 2장).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하나님이 참이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은 원래 하늘에 계셔야 하고, 당신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선한 일을 하면 상 주시고 나쁜 짓을 하면 벌 주시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내려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참이라는 것을 계속 증언하십니다. “네 설교가 참이냐 내가 참이냐? 네 자녀가 참이냐 내가 참이냐?” 이렇게 계속 간섭하십니다.
예수님은 온갖 지혜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생애 기간 동안 민족의 해방, 재정의 성공 자아실현에 지혜와 능력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사신 뒤에 십자가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십자가로 데리고 가서, 세상에 대해 자아가 죽는 비밀을 가르쳐주십니다. 세상에 대해 마음 쏟은 자아는 죽어야 한다는 하늘의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십니다. 부활하신 뒤에는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가십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돌이키게 한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 보좌까지 우리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이 땅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먼저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하늘에 다 써버리면 마음은 텅 비어버립니다. 그래서 텅 빈 마음에 보혜사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영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내 마음이 내 것인 줄 알고 마음을 도둑질 했습니다. 하나님! 내 마음대로 하고 내 욕심대로 합니다! 마음에 쌓아두고 싶은 것 많습니다! 하나님! 제가 도둑놈입니다, 저를 살려주세요!”
세상의 영을 받으면 부모는 자녀들에게도 욕심을 투사시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욕되게 되면 안된다면서 돈 많이 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어려운 때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게 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한다는 말씀이 우리 심장에 박혀 툭 튀어나오는 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마음을 들켜야 합니다. 십자가 예수 외에 다른 것을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까? 아니면 성공하는 법, 취직하는 법, 남들보다 떵떵거리며 사는 법, 투자하는 법을 더 알기로 작정했습니까? 믿음은 속일 수 없습니다. 진리와 부닥쳤을 때 실제로 어디로 엎어지는지를 보면 압니다. 예수 외에 다른 것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지만 삶에서 다른 것들이 다가왔을 때 어디로 엎어지는가? 이 학원이 좋은가, 저 학원이 좋은가? 돈벌이가 여기가 좋은가, 저기가 좋은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여러분은 부족함이 있으신지요? 만일 부족함이 있다면 하나님이 목자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 되게 해달라고 얼마나 많이 기도하셨습니까?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헌신하고 노력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러분의 삶을 보면 부족함 투성이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면 내가 부족함이 없는 것이 참입니다. 그런데 왜 실제 삶은 그토록 부족함이 많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면 나는 양입니다. 나는 호랑이나 뱀이나 늑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시 23:2). 늑대는 푸른 풀밭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풀밭에서 개미 잡아먹지 않습니다. 늑대는 풀밭에서 우아하게 눕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족하다면 우리는 양이 아닌 것입니다 부족함은 호랑이나 늑대가 느낍니다. 호랑이와 늑대는 무엇을 잡아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양의 목자입니다. 푸른 풀밭에서는 오직 양만이 만족합니다.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양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리 가운데로 가면 잡아 먹힙니다 목자가 있어야 양은 삽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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