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이아침 칼럼] 새 사람만이 기쁘시게 한다

ⓒ 안호성

성령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성령을 근심하게 할 것인가! 성령께서 근심하는 상황이 우리 삶에서 발견되면 즉시 십자가로 달려가 예수님과 연합해 죽어야 합니다. 말씀에 근거해 성령을 순하게 따라가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7절에서 24절까지 말씀이 이루어지면,25절에서 32절까지의 결과가 나옵니다. 30절은 결과를 아우르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는 말씀은 반대로 성령을 기쁘시게 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 성령을 가장 근심시킬까요? 성령을 인정하지 않을 때입니다. 내 생각, 내 뜻, 내 감정대로 살면 성령님을 무시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되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근심케하는 것, 성령을 인정하지 않을 때

최근 5년 동안에는 제가 성도들 부부싸움 현장에 불려간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새벽 2시에 부부싸움 현장에 불려간 적도 있습니다. 이혼서류를 제가 찢은 적도 있습니다. 만약 부부싸움 현장에 목사님이 가면 일단 싸움을 멈추셔야 합니다. 목사님이 갔는데도 계속 부부싸움을 한다면 목사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상처받습니다. 목사님 앞에서 계속 부부싸움을 이어간다면 자신의 감정이 1등 된 것입니다.

성령님을 근심시킨다는 것도 똑같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내 감정대로 내 생각대로 행하며, 다른 것이 개입할 때 방어하고 화를 내고 성을 쌓는다면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

구원의 날이 있습니다. 구원의 그 날까지 성령님과 동행하고, 무 엇이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지 분별하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신앙은 완주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며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신앙을 완주하기 위해 서는 성령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 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엡 4:17)

‘그러므로’는 앞서 나온 말씀들을 받는 접속부사인데 15, 16절과 직접 연결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5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일, 모든 것,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성숙해 졌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생겼고 선한 영향력을 끼 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비롯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 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 4:16)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려면 예수님과 연결되어 예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힘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방인처럼 살면 안됩니다. 이방인처럼 살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예수님으로부터 충족되어야 합니다. 이방인처럼 살면 마음이 허망하게 됩니다. 성도들 가운데 허망한 마음을 갖고 선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법을 어기지 않고, 합법적으로 열심을 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마음을 채우려고 해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것, 그것이 허망함입니다. 마음이 허망하면 수단이 목적 됩니다. 행복이 목적이라면, 행복을 위해 돈과 건강 사회적 위치 등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허망하면 돈과 건강, 사회적 위치가 목적이 됩니다. 수단이 목적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면 허망해집니다

대형 교회 출석하는 성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성숙하고 큰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수만 명 앞에서 떡 다 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사람들게 나눠 주게 하십니다. 받아먹는 사람들은 당연한 마음으로 그것을 먹었을까요? 아닙니다.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본 백성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열망이 생깁니다. 왕 되어 달라고 예수님께 부르짖습니다. 정말 간절하게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뿌리치십니다.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수만 명의 사람들은 성도가 아니었습니다. 교회 성도의 계산법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양적인 숫자로 계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도의 수는 그렇게 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숫자의 허망함으로 무너집니다. 마음이 하늘 보좌 우편에 가 있지 않고 수단이 목적 되면 망합니다 수단이 목적 되는 허망한 삶은 이방인들의 것입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 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엡 4:18)

허망한 인생들이 어두워졌습니다. 총명의 ‘총’(聰) 자는 ‘귀가 밝아진다’는 뜻입니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져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 4:19)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고 합니다 재벌 2세가 두 달에 한 번씩 차를 바꾸고, 한 달에 한 번씩 여자를 바꾼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불쌍하다고 여겨지십니까? 불쌍하게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속마음으로는 부럽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으면 불쌍하게 여겨야 할 것을 오히려 부러워합니다

어떤 사람의 자녀가 믿음은 하나도 없는데 명문대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불쌍한 일입니까, 부러운 일입니까? 믿음이 하나도 없는 남편이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면 불쌍한 일입니까, 부러운 일입니까? 불쌍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것이 부러운 일이 됐습니다. 영적으로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부러워해야 할 것과 불쌍하 게 여겨야 할 것이 섞여 있습니다 불쌍하게 여겨야 할 것을 오히려 부러워하며 주님 앞에 나와 간절히 부르짖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발견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지금 이방인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 인정되십니까? 인정하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래야 고쳐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인정하고 긍휼을 구해야 삽니다.

저는 인기 있는 연예인들이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인기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이 없으면 무너집니다. 인기는 상대방 마음에 있는 나를 먹고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은 마음에 예수님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인기 있는 연예인들은 예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자신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유명 운동선수나 배우 등이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을 보면 조마조마합니다.

저도 인기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하는 설교가 인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설교를 통해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통해 나도 좀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들어오면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십자가로 달려갑니다. 날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습니다. “하나님! 내 본성이 인기 있는 것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부르짖습니다.

우리가 대기업 회장을 만나면 풍겨 나오는 에너지와 기운을 쉽게 이기지 못합니다. 정치인을 잘 비판하지만, 한 정당의 대표와 자리를 하게 되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지 못합니다. 대통령을 잘 비판하면서도 막상 대통령 앞에 서면 그 후광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합니다. 본질을 보라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 같지만 실상은 부러워하는 우리 마음을 봤다면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3-24)

새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는 까닭은 입으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면 벗은 것이 보입니다 새 사람은 무엇으로 입습니까?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입어야 새 사람입니다.

새 사람이 되지 말고 새 사람을 입으라

거룩은 구별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구별된 것이 거룩 입니다. 그래서 거룩은 마음이 지켜졌다는 뜻입니다. 주님으로 마음이 채워지고 채워질수록 거룩해집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마음이 온통 주님으로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 마음에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마음에 들어 하시지, 저것을 마음에 들어 하시지, 요것도 마음에 들어 하신다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의 종류 가 마음에 많아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알아차려서, 마음에 그것을 가득 채우는 것이 거룩입니다.

옛 사람에게는 거짓의 거룩이 있고 새 사람에게는 진리의 거룩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중요합니다. 회사에 들어가면 석 달에서 여섯 달 정도 평가를 받게 됩니다. 평가받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가하는 사람이 가득합니다. 평가받는 사람 마음에 평가하는 사람이 가득한 것도 거룩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의 거룩 입니다.

신앙은 속사람을 완전히 바꿉니다 내면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거짓된 거룩이 많습니다. 신입사원이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됩니다. 을라갈수록 평가자에게 마음을 더 쓸 것입니다. 올라갈수록 파벌도 심해질 것입니다. 마음을 그것에 계속 쓰는 것이 거짓된 거룩입니다. 자녀가 유치원 졸업하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가면 마음이 끝날까요? 거짓된 거룩은 끝나지 않습니다.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실제입니다. 예수님이 삶에서 1등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무엇을 채우려는 것은 거짓된 거룩 입니다. 2만 5천여 명이 광야에서 오병이어 기적에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숫자가 허수인 것처럼 행하셨습니다. 숫자와 덩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크든 작든 마음에 1등 되신 예수님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우리 마음에 채우려고 하는 진리의 거룩함을 입었을 때 새 사람이 됩니다. 그때 당당해집 니다.

인기 하나 버리지 못하는 실존! 그래서 십자가로 달려갑니다. 돈에 대해 유난히 예민하신 분들, 십자가에서 죽기를 축복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힘들어하고 못 견뎌 하시는 분들, 인정받지 못서 안달하시는 분들!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을 깨닫는다면 성령을 기쁘시게 함으로 구원의 날까지 인치신다는 말씀의 뜻을 깊이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기쁨의 동산에서 또 다른 기쁨을 찾는 것이 인간의 원죄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에덴에 이미 기쁨이 가득했는데도 인간은 또 다른 기쁨을 누리려고 사탄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에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게 뭐가 나쁘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원죄 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하나님이 기준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뒤에는 선과 악이 필요해 졌습니다. 돈이 좋다는 개념을 사탄이 줬습니다. 돈이 좋다는 개념이 마음에 들어오면 돈이 마음에 달라붙게 됩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돈이 좋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자녀가 잘 되어야 좋지, 가정이 이래야 좋지,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는 높은 자리가 좋지!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그것을 다시 되돌려놓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깨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게 되면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옛 사람은 거룩을 흉내 냅니다. 그래서 거짓의 거룩입니다. 자녀, 사업, 관계,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이 마음에 가득한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새 사람의 옷을 입습니까?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옛 사람이 죽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옛 사람이 추구했던 가치 가 죽고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과 하나되기 전까지 안됩니다. 다른 것에 기웃거리는 것을 성령께서는 근심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으로 성령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뭉쳐있던 분노의 감정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수많은 판단의 근거들이 십자가에서 죽고, 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십자가에서 죽고, 자녀가 잘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던 마음도 십자가에서 죽고, 오직 주님으로 살아가는 역사를 맛보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전능자이십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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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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