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이아침 칼럼] 가롯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를 아십니까?

ⓒ 안호성

회개는 죄의 열매를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돌이키는 것입니다. 선한 결심을 하고, 선한 의지를 발휘하더라도 어떤 조건이 갖춰지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죄인인 나를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죄의 나무, 죄의 공장입니다. 존재 자체가 타락했습니다. 내가 곧 죄고 죄가 곧 나입니다. 존재론적인 죄인은 예수님의 사랑때문에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회개 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축복입니다.

죄의 나무, 죄의 공장인 나 곧 죄, 죄 곧 나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눅 22:21)

가롯 유다는 주님을 팔아넘겼고 베드로는 저주하면서까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의 마지막은 달랐습니다. 가롯 유다는 결국 영원한 저주로 끝났고, 베드로는 은혜를 받습니다. 무엇이 다르기에 완전히 다른 결과로 끝났을까요? 주님을 배반한 것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가롯 유다는 왜 저주를 받고 베드로는 끝없는 사랑과 배려를 받을까요?

가롯 유다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제 내일이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십니다.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하는 그때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를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배반하고 팔아넘길 자라고 하십니다. 또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두 장면 사이에는 제자들의 다툼이 나옵니다. 우리는 다툼을 통해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배려, 돌이킴의 본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눅 22:24)

제자들은 서로 자기가 크다며 다투고 있습니다. 얼마나 철이 없는 제자들입니까?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배웠는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누가 큰지를 이야기하며 다투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임 할 때 ‘그 중’에서 다툽니다. 모임 할 때 다투는 우리도 철이 없습니다. 그 철없는 모습이 곧 우리의 실존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눅 22:25-26)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임금들은 집권자로서 대우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그런 대우를 받으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하시며 섬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 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 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 게 하려 하노라” (눅 22:27-30)

예수님께서는 다투는 제자들에게 크게 화를 내셔야 될 것 같은데 오히려 열두 지파를 다스릴 권세까지 주겠다고 하십니다. 가롯 유다나 열한 명의 제자나 대동소이하게 보이는데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는 쏙 빼놓고 다른 제자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드십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십니까? 그 이유가 보일 때 우리 믿음의 목적, 믿음의 빛깔이 보입니다. 열심 있는 믿음, 헌신하는 믿음, 능력 있는 믿음을 믿음으로 여기면 큰일납니다.

예수님이 붙드신 제자들의 믿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눅 22:31-34)

사탄이 제자들을 ‘밀 까부르듯 요구한다’는 말을 원어적으로 보면 ‘체를 치다’, ‘자세히 살펴 구분하다’는 뜻입니다. 사탄이 우리의 연약함도 잘 알고, 우리가 죄 가운데 있다면 그 죄도 정확하게 안다는 말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그것을 내밉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내밉니다.

“네가 이런 상황인데도 설교하며 목사 타이틀을 유지하느냐? 그러고도 거룩한 척할 수 있느냐?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없지 않느냐?” 사탄은 이런 식으로 언제든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안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새 힘이 나는 이유는 주님께서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덕입니다. 누가 여러분의 무엇이 좋다고 인사하면 ‘다 주님의 덕입니다’ 하십시오.

믿음이 떨어지지 않아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떨어지면 1차적으로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없고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힘을 씁니다. 반대로 믿음이 있으면 말씀이 힘이라는 것을 압니다 말씀이 길을 낸다는 것을 압니다.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빛이라는 것을 압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다’는 말을 원어적으로 보면 ‘배반하다, 넘겼다’는 뜻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쓸모없다고 여겨 판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쓸모없다고 여겨졌을까요? 가롯 유다는 인생을 설계할 때, 예수님의 능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과 통찰, 능력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주류세력과 마찰을 빚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류세력을 한 방에 눌러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죄인과 친구라고 하십니다. 나병 환자와 창녀, 세리와 어울리십니다. 가롯 유다가 보기에 예수님은 능력이 있는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쓸모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가져다 쓰는 믿음은 결국 망합니다. 살면서 “이것 있어야 해요, 이것 주셔야 해요, 이것 해결되지 않으면 안 돼요, 주님 능력 필요해요!” 이 믿음은 돌아올 길이 없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어떻게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았을까요? 제자들은 주님의 구도 아래, 주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누가 큰지 다투고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때가 되면 누가 클 것인지를 다투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롯 유다는 자신의 계획을 위해 주님이 필요했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11명의 제자는 부족하고 힘이 없지만 주님의 구도 아래, 주님의 계획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계획, 너무 견고하게 하지 마십시오. 너무 고집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 주님이 계신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하십시오.

저는 죽다 살았습니다. 목회하면서 귀신이 떠나가고 소아마비도 치유하고 수많은 질병도 고쳤습니다. 그러나 모두 저의 목회 구도 아래 있었습니다. 결국 망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이제는 압니다. 주님의 구도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구속한 주만 보인다는 찬양이 깨달아집니다.

구속한 주만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의 심령을 보고 그 상태를 아시고, 그 마음가짐을 눈여겨보셨습니다. 허물이 있고 흠이 있지만, 심령에는 주님 바라보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님과 정(情)이 듭니다. 잘못된 자아가 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어온 다른 것이 있다”며, “나, 주님 사랑해요! 나, 주님 필요해요! 내 안에는 어찌 그리 많은 욕구가 있는지요!” 하고 부르짖는 마음을 주님께서 보십니다. 무엇을 채우고, 더하고, 보충하고, 취하려고 열심을 내고 믿음을 발휘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구도 아래 있는 사람만 회개합니다. 나의 구도 아래 살면서 주님의 능력을 갖다 쓰려는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후회는 할 수 있을 것이고 죄책감이 쌓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못 합니다.

주님께 묶이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때도 우리 계획으로 우리가 힘을 쓰게 될까요? 그때도 우리 고집과 아집이 힘을 발휘할까요? 주님의 구도 아래 있기를 바라고, 주님께 묶이는 인생 되기를 소원하는 인생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도 3년간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 기 구도는 놓지 않았습니다. 자기 계획을 놓지 않는 인생에게는 한 줄기 빛도 주지 않으십니다. 성품으로 보면 베드로가 더 흠이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저주를 해가면서까지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베드로에게 끝없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부족하고 흠이 많지만 주께 묶인 삶 살고 싶다고 했던 죄투성이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중보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셔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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