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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아름다운 차이: 교회의 사명을 위하여

ⓒ 김현의

“ 아담에서 시작해서 레위 제사장, 이스라엘의 왕, 열두 사도 및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해로부터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든 사람은 남자이다 ”

* ‘아름다운 차이: 가정과 교회 안에서‘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아버지와 형제들

장로 자격이란 것이 사실상 성경이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것 보다 훨씬 더 막중한 사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감독자가 남자인 것이 당연시되고 또한 실제로 “한 아내의 남편”(딤전 3:2)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게 아니다. 이것은 성 중립을 따질 사항이 아니다. 교회는 아버지와 어머니(딤전 5:1-2)가 있어야 하는 가족이며, 바울은 감독자를 아버지로 바라보았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바울이 여성으로 하여금 그 사명을 금지시켰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바울이 말하는 정확한 의미와 관련해서 이 구절은 사실상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데, 그럼에도 이 구절이 명확하게 연결하는 사실에 관해서는 혼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아버지가 가정을 잘 이끌고 자녀를 복종시켜야 한다는 요건도 마찬가지이다(3:4). 사실상 이건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구절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바울이 감독자와 집사에 대한 자격을 부여한 후 “여자”에 대한 자격을 부여한 것도 사실이다(3:11). 우리는 이것을 여성 집사(나는 그렇게 본다)에 대한 언급으로 보든 아니면 집사의 아내(일부 번역자처럼)에 대한 언급으로 보든, 바울이 “감독자”와 “집사” 그리고 “여성과 아내”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때문에, 바울이 후자를 전자의 하위 집합으로 간주했다고 보는 시각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평등주의 해설자들조차도 이런 구절을 근거로 바울은 “감독자를 남편과 아버지로 제시”(Towner)하고 있고 “주교를 시종일관 남자로서 언급한다”(Wright)는 데에 동의한다. 이 본문에서 최소한 장로직은 결코 성 중립적이지 않다.

교회를 괴롭히는 이단이 주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여성을 노리기 때문에 감독자와 장로는 그런 교회일수록 더더욱 남자여야 하지만, 그 외 다른 교회에서도 남자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에베소서에 언급된 유일한 거짓 선생이 남자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딤전 1:20; 딤후 2:17), 이 주장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섬에 있는 장로들에게도 동일한 요건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딛 1:6). 바울이 말하는 장로의 자격은 에베소의 특정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크레타에서도 거의 동일하며 그 외 다른 모든 곳에서도 다르지 않다. 아담에서 시작해서 레위 제사장, 이스라엘의 왕, 열두 사도 및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온갖 해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모든 사람은 남자이다.

어머니와 자매들

다른 한편으로, 강조해야 할 또 하나의 성경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도는 남자의 씨로 언급되기 훨씬 전에 이미 여자의 씨로 확인되었다(창 3:15). 아담보다 전혀 열등하지 않은 하와(성경에서 ezer 또는 “도우미”라는 단어는 하나님 자신에게 가장 많이 적용된다)는 실제로 다가올 약속과 관련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창 4:1,25). 가부장 시대의 여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또한 종종 어리석은 남편 또는 아들, 어떤 경우에는 두 사람을 다(사라, 하갈, 리브가, 레아, 라헬) 능가한다. 여종 하갈은 성경에서 하나님에게 이름을 붙인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이다(창 16:13).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구속 이야기가 여자로부터 시작한다. 하와, 하갈, 레아, 십브라, 부아, 미리암, 삼손의 어머니, 룻, 한나, 에스더, 엘리자베스, 마리아 등이다. 반면 이스라엘은 어리석거나 악한 사람들에게 압제당하고 있다. 여자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고(드보라) 군사적 승리를 거둔다(야엘). 여자들은 그들의 남편을 구하고(아비가일), 그들의 자녀를 구하며(요게벳), 그들의 도시도 구하고(드고아 여자), 나아가서 나라를 구한다(에스더). 여성이 예언하고(훌다, 빌립의 딸), 성경에 나오는 시편과 노래를 작곡하고(한나, 마리아), 하나님의 말씀을 남성에게 설명하고(브리스길라), 교회를 운영하고(글로에), 사업을 운영하고(루디아), 집사로 봉사하고, 후원자(뵈뵈), 복음에서 바울과 협력(유오디아와 순두게), 그리고 사도로까지 인정받는다(유니아). 그리고 인류 역사상 메시아를 태어나게 한 일에 여자보다 더 큰 책임을 감당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한번 들어보고 싶을 정도이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주인공이 되는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여자로서 섬긴다. 많은 이들이 어머니, 자매 또는 딸로 묘사된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경계는 결코 모호하지 않다. 남자가 하는 일을 여자도 하고, 여자가 하는 일을 남자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때때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마치 2차 페미니즘을 암시하는 구절처럼 쓰이기도 하는데, 그러나 바울은 결코 여기서 남녀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지 않으며 심지어 교회의 리더십 직분과 관련해서도 그런 식의 모호함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바울은 성별, 민족성 또는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가 다 신앙에 기초하여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장은 바울이 쓴 모든 서신서 중에서도 가장 다양한 성별이 표현된 장이다(아들들, 아버지, 예수님,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들, 아바 아버지, 출산의 고뇌, 노예 여인, 자유 여인, 위에 언급된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 바울은 이를 통해서 생물학적 성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비록 단지 생물학적 성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는 것도, 세례를 받는 것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이러한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남자가 도무지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여자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이면,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 융합(conflation)도 아니고 또한 남자만이 모든 중요한 일을 하고 여자는 보조적인 역할만 해야 한다는 식의 성적 왜곡(alterity)도 아니다. 남자는 여자를 필요로 하고 여자는 남자를 필요로 하며, 이 둘이 함께 봉사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내는 진정한 상보성의 비전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를 제거하거나 둘 중 하나의 가치를 줄이는 순간, 우리 모두가 다 피폐해진다. 교회는 가족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와 자매, 아들과 딸 모두가 필요하고, 서로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존중할 때에만 교회라는 가족은 번영한다.

따라서 진정한 상보성은 여자를 사역의 장애로 보는 게 아니라 여자를 사역 현장에 투입하도록 하는 기초가 된다. 로마서 16장은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도발이다. 로마 교회에서 젊은 여자가 롤 모델이 되는 여자 사역자가 없다는 사실을 한탄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녀는 많은 사람을 후원한 집사 뵈뵈를 모델로 삼을 수도 있다. 브리스길라는 또 어떤가? 그녀는 바울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또한 가정 교회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마리아는? “당신을 위해서 열심히 사역했습니다.” 유니아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혔으며, 사도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주를 위해 헌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와 루포의 어머니를 향해 바울은 “나에게도 어머니였다”라고 말했다. 그 외에도 많은 여자들이 등장한다. 여자들의 이름은 이 장에서 지명된 개인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종종 집사를 임명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서 장로직만을 고집하는 단점 중 하나가 내포하는 사실은 중요한 사역일수록 남자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교회의 리더십 개발 기회, 공식 사역 역할 분담 및 급여에서 까지도 드러나는 문제점이다. 교회가 만약에 이런 식이 남자 중심의 사역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래서 은사가 있는 여자를 단지 사역팀의 순결성 및 또는 공동성에 대한 우려라는 핑계로 무시한다면, 교회는 결국 로마서 16장이 말하는 영광스러운 상보성을 남자 중심의 작업 현장으로 대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리고 여자들이 하는 일이란 결국 아이들을 보거나 찬양 목사 뒤에서 백업 코러스나 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교회가 이런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상황적인 도전

특히 상황적 요인으로 인해 신실하게 사역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그중 하나는 북미 복음주의의 문화적 환경인데, 그게 좋든 나쁘든 대부분의 신학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1950년대에 있었던 이 주제와 관련한 보수적이고 짧은 토론과 1960년대 있었던 진보적이지만 여전히 짧았던 토론은 이제 그 어떤 곳보다 미국에서 점점 더 크게 부상하고 있으며, 그 문제는 이제 기존 전통, 사회 변화, 질서, 인종 관계, 성문제, 총기 문제, 낙태, 경제, 그리고 정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다른 대화와 얽혀있다. 문화적 상황은 이제 누가 장로가 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그치지 않고, 교회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 결정을 내리는 사람, 심지어 누가 가족 차량을 운전하는지에 대한 질문까지도 연결되며, 문화적으로 급변하는 현실이 일상 속으로 제대로 전파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 결과 때때로 교회는 문화적 조류에 맞서야 하는 입장을 너무도 걱정하게 된 나머지, 우리 스스로를 과도하게 수정하게 되고 그 결과 성경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심지어 비 성경적이기도 한) 입장에 서기도 한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전후 중미 상황을 신약 성경 속에서 억지로 읽어내고, 교회의 자매들을 비하하고,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라며 무시하고, 이단적 삼위일체의 견해를 옹호하기까지 한다.

특히 서양에서 발생한 또 다른 문제는 교회를 가족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점점 더 기업 조직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다. 가족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이끌어가는 곳이고 또 때로 아버지가 하는 일이 있고, 어머니가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가정은 궁극적으로 가정을 보호할 책임을 가진 남편이자 아버지가 이끄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건 아내이자 어머니이다. 그러나 비즈니스 또는 기업 환경에서는 존중과 명예가 그런 식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기업은 직위, 직급, 공개된 프로필, 재무 감독, 공식 권한 및 급여를 통해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의 신학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실제로 가족이 아니라 기업처럼 기능하고 있다면(물론 거기에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상보성은 전락하여 결국 누가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고, 누가 누구를 지휘하고, 누가 월급을 얼마를 받고 등등에 따라 모든 결정이 이뤄지는 결과가 될 것이다.

교회는 가정이지 사업장이 아니다

이런 현실이야말로 교회가 가족이라고 설교하는 내용을 교회 내에서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여자 장로를 부정하는 것은 여자가 사장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여자가 아버지가 되는 건 불가능하지만, 남자가 어머니가 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우기는 것과 오히려 더 비슷하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성경적인 사고가 현실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교회가 단지 가족이라고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가족으로 보여야만 한다. 여자가 모든 주요 직책이나 토론에서 배제되는 기업 모델로 교회가 운영되는 대신 가정에서처럼 남자는 아버지로 또 여자는 어머니로 인정받고 존중받는 모습이 교회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지는 문화, 상황, 교회 규모, 그리고 가족 표현 방식 등에 따라 매우 다양할 것이다. 가장 좋은 모범 사례를 수립하려면 남녀 모두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영역은 특히 더 서양에 사는 우리들이 전 세계에 흩어진 형제자매들로부터 많이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차이를 누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여자 장로를 부정하는 것은 여자가 사장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여자가 아버지가 되는 건 불가능하지만, 남자가 어머니가 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우기는 것과 오히려 더 비슷하다 ”

앤드류 윌슨 Andrew Wilson | 영국 런던에 위치한 King’s Church의 교육목사. ‘Echoes of Exodus’를 비롯하여 다수의 책을 공동으로 저술.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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