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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TGC 칼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놀라운 긴장

▲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 사진: 유튜브 채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캡처

그는 풍랑을 잔잔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의 제자들이 그를 깨워야 할 만큼 피곤을 느끼기도 했다  

그들은 물에 빠져 죽을까봐 두려웠다. 내가 그들 처지였다면, 발목까지 찬 물이 점점 더 올라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면, 그래서 조만간 배가 무서운 풍랑에 침몰될 거 같다면, 나는 아마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미처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그들을 생각할 거 같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하다, 죄로 물든 인간이라면 그건 더더욱 그렇다(히 2:15). 

단 풍랑이 치는 내내 잠을 자고 있던 그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배에 물이 차고 배를 뒤집을 것처럼 바람이 세차게 부는 무서운 자연의 재앙을 그는 자느라고 전혀 몰랐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낮잠이 이 사람의 낮잠처럼 엄청난 능력을 드러냈던가? 이 세상에 그 어떤 잠이 이 사람의 잠처럼 아름답게 빛났던가?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얼마든지 쉴 수 있었다. 사실, 나중에 제자들이 알게 된 것처럼, 그는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그는 너무 피곤해서 풍랑을 지나면서 잠을 자는 정도가 아니라 풍랑 속에서도 얼마든지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풍랑을 잔잔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의 제자들이 그를 깨워야 할 만큼 피곤을 느끼기도 했다.

단 두 마디, “잠잠하라 고요하라”에 물결은 잔잔해지고 바람은 물러갔다. 제자들을 한번 상상해보자,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떨던 그들은 그 다음 순간, 하늘이 그들 앞에서 항복한다고 백기를 흔드는 광경을 목격했다. 세상 어디에서도 만난 적 없는 능력과 또 약함, 즉 그의 하나님되심(Godness)과 인간됨을 동시에 목격한 그들은 우리 중 누구라도 생각했을 바로 그 질문을 던졌다.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

제자들이 바다에서 만난 그날 밤은 분명 말할 수 없이 웅장했겠지만, 그런 밤 조차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로부터 30년 전 어느날 밤에 비하면 초라해질 수 밖에 없다. 베들레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기 전에 수도 없이 많은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아이의 태어남은 완전히 그리고 영광스럽게 달랐다. 하나님의 아들, 온 우주를 손에 쥐고 있는 존재(히 1:3; 골 1:17)가 지금 연악한 아기의 모습으로 누군가의 팔에 안겨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우주 속 모든 은하계의 구석구석을 다스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놀랍게도 글을, 색깔을 그리고 동물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하나씩 배워야 했다.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도 그는 이미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사 9:6)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하나 더 생겼다. “태어난(newborn)”이다. 놀라운 십자가 아래에서 또 그가 부활하고 남긴 빈 무덤 앞에서 우리는 늘 찬양하곤 하지만, 그리스도의 위엄이 주는 신비함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그의 어린 시절이 더 짜릿하지 않은가? 어떻게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으로서의 존재를 멈추지 않고 평범한 여자의 자궁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요 1:18), 그럼에도 일개 인간이 그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고?

그리스도가 누구인가(christology)가 주는 신비함이 너무도 깊고 어렵다는 이유로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고 포기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의 놀라움이 가진 깊이와 무게를 제대로 알 수 없다. 바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엡 3:8)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실은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가 실제로 누구였는가라는 문제 속에 담겨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일수록, 그것들을 제대로 보게 될 때 그는 우리의 필요와 상처 그리고 갈망을 더 잘 채워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

무슨 우주항공 기술에서나 나올 것 같이 들리는 이 위격적 연합이라는 말은 사실상 놀라울 정도로, 아니 너무 밀접할 정도로 친밀(personal)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가지고 있고, 그 둘은 결코 나눠질 수 없는 한 인격(person) 속에 온전하게 들어있었다.

초대 교회에서 논쟁을 하던 당시, 그리스어 단어 하이포스타시스(hypostasis)는 신성과 인성이 각기 가진 본성(물리, physis)과 구별되는 신격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쓰였다. 그렇기에 이 위격적 연합은 한 사람 안에 두 가지 본성, 신성과 인성이 다 들어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처럼 한 가지 본성만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사실 논쟁을 할 필요도 없고 혼란을 느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성경은 너무도 분명하게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이 다 그의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만나는 이 매혹적인 긴장(tension)을 묘사하기 위해서 위격적 연합이라는 단어가 필요하다. 그는 진짜 하나님인가? 그는 진짜 사람인가? 우리는 성경이 분명하게 역사 속에 존재한 예수에 관해서 말하는, 하나님이자 또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최소한 이름을 붙이는 방식으로라도 답을 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긴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진짜 긴장이 아니다. 대신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또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본성이 한 사람 안에 거하는, 완전한 조화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는 하나님이 아닌 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고, 우리처럼 인간이 아닌 적이 없었다. 위격적 연합은 단지(또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의 두 가지 본성, 하나님되심(Godness)과 인간되심(manness)이 놀라운 한 사람 안에서 신비롭고, 분리할 수 없고 또 완전하게 구현된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그가 잉태된 날 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원한 존재(eternal  person) 위에 완벽한 인성을 덧입혔을 뿐이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격인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었다. 그럼으로 그는 상처와 고통, 유혹 그리고 죽음 앞에서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신성을 포기하지 않았고 또 다른 이의 몸을 빌린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진정한 하나님이었고, 또 그렇기에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십자가에서 죽은 그가 누구이던지간에,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은 아니고, 그가 흘린 피가 하나님의 피가 아니라면 그 어떤 다른 피도 우리의 죄를 사하지 못한다(히 10:4). 또한 예수님이 “모든 면에서” 진정한 인간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물이 될 수 없다(히 2:17).

칼케돈

서기 451년 10월, 교회 교부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이고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 불거진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 함께 모였다. 521명의 참석자는 칼케돈 신조(Chalcedonian Creed)를 작성했고, 그 신조는 그날 이후 하나님-인간(God-man)에 대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이해의 기초(ground zero)가 되었다. 이 신조는 예수님 속에서 어떻게 온전하고 완전한 신성과 인성이 서로 연결되어 함께 있을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어떻게 그 두 본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지도 말이다.

“우리는 이제 거룩한 신앙 선배들을 따라서 지금 한 마음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한 분이자 동일한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완전하고 동일한 하나님이자 또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분: 진정한 하나님이자 진정한 인간으로 고백하도록 가르치려 한다. … 이 두 본성을 인정할 때,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나뉘지 않으며, 서로 떨어질 수도 없으며…”

이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두 본성이 온전한 한 사람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위격적 연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고백은 신성과 인성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 널리 퍼진 네 가지의 잘못된 생각을, 매우 주의깊게 선택한 다음 네 가지 부사를 통해서 바로잡아준다.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나뉘지 않으며, 서로 떨어질 수도 없으며”

첫 번째로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은 한 사람 안에서 아무런 혼란(confusion)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의 신성과 인성이 서로 혼란을 일으켜, 그 결과 세 번째 본성을 만들지 않는다. 신성과 인성은 서로 구분되어 있다. 그의 신성은 진정으로 또 철저하게 신적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이다. 그의 인성은 진정으로 또 철저하게 인간적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인간이다.

두 번째로 그의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육으로나 영으로나 인간의 모든 경험을 다 하면서도 그는 결코 신적 존재가 아닌 적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 아닌 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은 적이 없다. 성육신은 결코 어떤 중단(interruption)이 아니며 동일한 아들의 새로운 발현으로 인한 감소(subtraction)가 아닌 추가(addition)이다. 

세 번째로 두 본성은 서로 구분되지만 그들은 서로 나뉘어있지 않다. 아마도 이 점이 제한적인 인간의 머리로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으로 목공일을 배우면서 동시에 그의 신적 능력으로 이 우주를 주관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어떤 구분이 없다. 그것은 우리 미천한 인간의 경험과 상상을 뛰어넘는 영역이다. 스테판 웰럼(Stephen Wellum)은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의 삶을 볼 때면 이렇게 묻게 된다. 누가 이런 일을 한 거지? 누가 이런 말을 한 거지? 누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은 거지? 그 대답은 언제나 같다. 하나님 아들(God the Son). 왜? 그것은 신성 또는 인성은 결코 그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것은 아들이 된 인간이 신성과 인성 모두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아들이 태어나서 세례를 받고, 시험을 받고, 변화하기도 하며, 배신당하며, 체포되고, 정죄받고, 그리고 죽을 때에만 가능하다. 바로 이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피를 흘렸다. 바로 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요구한 모든 의가 채워졌고 그렇기에 우리의 구원은 결국 하나님으로 인해서 가능했다. 바로 이 아들이 죽음에서 일어나 왕의 왕이 되어서, 주의 주가 되어서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하나님, 성육신한 아들’[God the Son Incarnate], 306-7).

마지막으로 신성과 인성은 그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서로 떨어질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에도 그건 마찬가지였고, 완전한 인간으로 하늘 보좌에 앉아있는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고 언제나 인간이며 언제나 한 위격이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단순하지 않다

인간인 우리 자신도 얼마나 신비하고 복잡한지를 생각해 본다면, 위격적 연합이 너무 어렵게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자신도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무한한 하나님, 하나의 본질에 세 개의 격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어진 존재이니까 말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죽는 존재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우리는 비참한 존재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열정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약하지만 놀라운 일을 꿈꾼다. 우리는 일시적인 존재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영원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의 다양한 탁월함이 결합하여 우리 인간의 복잡함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더 밝게 빛난다”(‘예수님이 복음입니다’[Seeing and Savoring Jesus Christ], 32).

우리가 스스로를 단순한 인간으로 치부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긴장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경이감을 가지고 더 깊은 예배를 체험하게 하는 대신 우리를 그로부터 오히려 더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 속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는 대신 그 근처에서만 머물게 되고, 가장 깊고 은밀하고 복잡한 우리의 영혼을 채우고 치료하는 예수님의 신비함을 결코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데에 있어서 얕은 곳에만 머무르게 되면, 예수님에 관한 진리는 우리 영혼에 아주 피상적이고 사소한 영향만을 미칠 것이고, 그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는 은밀하게 또는 노골적으로 그의 자비함, 그의 공의로움, 그의 주관하심, 그의 겸손, 그의 용기, 그의 자애로움, 그의 하나님되심, 또는 그의 인간되심에 끌리기 마련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인간이 아닌 단지 하나님으로만 본다면, 그는 때때로 너무 멀고 차갑게만 느껴질 것이다. 반면에 너무 그의 인간됨에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그의 초월하심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가 나와 가까이 있고 나와 관련이 있다고 느껴도 그의 거룩함과 존엄함은 조금씩 그리고 비극적으로 그와 관계를 맺으려는 내게 오히려 장애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복잡하고 매혹적인 긴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우리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모든 것이 다 필요하다. 자비로움과 공의로움, 주권과 겸손, 담대함과 자비로움, 인내함과 무서운 진노, 진정한 하나님과 진정한 인간. [복음기도신문]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데에 있어서 얕은 곳에만 머무르게 되면, 예수님에 관한 진리는 우리 영혼에 아주 피상적이고 사소한 영향만을 미칠 것이고, 그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마샬 시걸 Marshall Segal |작가이자 desiringGod.org의 책임 편집자.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당신에게’의 저자.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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