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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오순절이 없다면 당신은 영적 고아다

ⓒ 현승혁

“ 오순절은 단지 권한 부여의 분수령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위로의 한 형태였다. 오순절은 우리가 이 지상에 영적 고아로 버려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심각한 상실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24시간 내내 뉴스를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이 죽어 나가고 정의는 실종되었으며 존엄성과 희망이 사라진 현실은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내 자신의 삶과 주변만 둘러보아도 이런 현실이 단지 ‘다른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내 자신 속에서 끊임없이 존재하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비극, 질병, 트라우마, 죽음 그 자체가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닥친다. 때때로 우리는 고비를 하나 넘으면 또 다른 고비를 만나 끊임없이 비틀거리는 것처럼 느낀다.

이런 상실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신과 체포로 이어지는 몇 시간 동안 강렬하게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기도 하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을 떠날 것이고 자신이 가는 길에 제자들은 함께 할 수 없다는 폭탄을 떨어뜨렸다. 그것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들은 3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가족과 직장을 버린 제자도 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걸었다.

따라서 그들이 느낀 감정은 오늘날 믿었던 CEO가 회사를 떠난다는 소식에 슬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라고 예수님은 약속하셨다(요 14:18). 이것은 동료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 느끼는 슬픔이 아니다. 이것은 부모를 잃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다. 그들이 느꼈던 두려움은 버림받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분리가 주는 깊은 상실감이었다. 제자들이 그토록 힘들어한 것은 그래서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의 괴로운 마음

우리의 마음도 종종 괴로움에 고통스러워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제자들과 똑같지 않다. 우리는 예수님과 3년 간 동고동락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떠나는 예수님을 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육체적 부재를 의식한다. 이 땅에서 종종 우리는 영적으로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우리는 하나님이 진짜로 계신지 의구심을 가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삶의 어려움은 하나님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도무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버겁게만 느껴진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소중한 약속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떠날 것이다. 그분의 약속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17). 예수님은 성령을 약속하셨다. 아들과의 이별은 성령이 오심으로 이어질 것이다. 오순절은 단지 권한 부여의 분수령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위로의 한 형태였다. 오순절은 우리가 이 지상에 영적 고아로 버려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영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성령이 얼마나 인격적인가 하는 부분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그것(it)’이 아니라 ‘그(he, him)’라고 언급하셨다. 신약 성경의 다른 구절들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성령은 결코 비인격적인 영적 상품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기 위해 성령이 오셨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해도, 우리는 이 놀라운 성령이 얼마나 인격적인가 하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요점은 예수님이 약속하시는 그가 어떤 분(kind)인가이다. 그는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16 절)라고 묘사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예수님이다. 그는 어떤 면에서 예수님을 대신하고 계승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는 정말로 예수님과 동일한 영이다. 바울은 그를 ‘그리스도의 영’(롬 8:9)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성령은 담임 선생님과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과 스타일 그리고 일련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접근하는 대리 교사가 아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바로 이 사실을 설명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와 육체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수단이다.

이 점은 예수님이 강조한 두 번째 포인트로 이어진다.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

성령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임재를 누린다. 예수님은 성령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임재할지를 강조한다.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7절).

성령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혼자일 수 없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바로 성령을 통해서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은 그 자체로 놀랍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많은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성령을 단지 충실한 보안 요원처럼 가까이 두는 게 아니라 아예 우리 안에 거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속에 친히 거하신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23절).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처다(고전 6:19).

하나님의 성전과 우리의 위로

몇 년 전 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헤롯 대왕이 세운 이 벽은 그리스도와 동시대에 있었던 구조물인데 아직까지 남아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면서 기도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제는 사라져버린 성전과 또한 성전 자체가 의미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애도하고 또한 그 복원을 위해서 기도한다. 따라서 이 벽의 오랜 별명은 ‘통곡의 벽’이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깊은 슬픔에 잠겨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근처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 단지 성전을 약속하시는 게 아니라 아예 우리와 하나가 되겠다고 하신 예수님을 묵상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순전히 성령의 은사로 인해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 자신이 진정한 성전이다.

성경은 이 세상이 주는 깊은 상실과 트라우마라는 현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러한 상실로부터 면제가 된다고 약속하지도 않는다. 대신 성경은 이 모든 상실 가운데서도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귀중하고 그 자체로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약속한다. 바로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이다.

성령의 오심으로 우리는 영적 고아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버림받지 않았다. 예수님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신다.

“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순전히 성령의 은사로 인해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 자신이 진정한 성전이다 ”

샘 올베리 Sam Allberry | Ravi Zacharias International Ministries의 국제 강사이자 미국 TGC의 에디터. 저서로 ‘Is God Anti-Gay?’ 등 다수.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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