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주의의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 운동은 현재 이 순간에 정의될 수 없고 또 정의되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헌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역에 대한 초점, 전도 사역에 쏟은 열심, 그리고 각종 사회적 활동으로 이름을 알린 수많은 형제 자매들의 연결선상에 있다 ”
‘복음주의’라는 이름은 미국에서 특히 논쟁의 중심에 있는데, 선거철을 맞아 ‘복음주의 투표’의 의미와 중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는 무엇인가? 그 활동 상태는 어떤가? 최근에 나온 책들은 백인 복음주의자들을 가짜 기독교 민족주의와 연결시킬 뿐 아니라 당파적으로 치우친 정치에 지나치게 관여하거나 가부장제를 드러내는 지나친 표현들과도 연결시키고 있다.
데이터는 다르지만 다양한 설문 조사는 흥미로운 질문들을 제기한다.
– (주로 소수 민족 교회에서) 복음적 신앙을 고수하면서도 ‘복음주의 정체성’은 (아마도 이 용어가 주는 정치적 의미 때문에) 주장하지 않는 많은 기독교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이와 반대로,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표현하지만 교회에 거의 출석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핵심적인 복음주의 교리를 고수하지도 않는 수많은 미국인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 지난 세기 중반에 시작된 리뉴얼 프로젝트(분리주의 근본주의자와 사회적 복음을 주장하는 자유주의에 대응하려는 운동)가 이제 미국에서 사실상 사회-정치적 관점과 동의어가 되어버린 지금 상황에서 ‘복음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 우파, 좌파와 관계없이, 기독교인 스스로가 궁극적인 권위로 옹호하는 성경보다 오히려 문화적 배경과 정치 철학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 상황에서 복음주의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이 많은 사실이 내포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 폴라 화이트(Paula White)에서 팀 켈러(Tim Keller), 그리고 존 파이퍼(John Piper)에서 로버트 제프리스(Robert Jeffress)에 이르기까지 ‘브랜드’가 중요한 시대에 ‘복음주의’라는 이름에 굳이 연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상황은 일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복음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조롱하게 만들고 있다. 왜 이 이름을 생략하지 않는가? 왜 우리 자신을 그냥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가? 그게 아니면, 복음의 사람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물려받은 문화 간, 교파 간 리뉴얼 무브먼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다른 좋은 용어를 찾을 수는 없을까?
그러나 더 나은 방법은 ‘복음주의’ 정체성을 벗기기 위해 너무 빨리 서두르기보다는 그 전에 한 발 물러서서 시간적 관점과 지리적 관점에서 이 모든 상황을 관찰하는 것이다.
시간적 관점
먼저 역사적 관점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자.
‘누가 복음주의자인가?(Who Is An Evangelical?)’를 쓴 토마스 키드(Thomas Kidd)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당파적, 민족적’ 정의가 ‘역사적으로 독특하다’고 믿는다. 복음주의는 처음부터 다 민족적이었다. 백인만이 ‘정상적인’ 복음주의자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최근 수십 년간 드러난 운동의 정치적 요소가 복음주의적 정체성의 핵심을 정의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주의의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 운동은 현재 이 순간에 정의될 수 없고 또 정의되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헌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역에 대한 초점, 전도 사역에 쏟은 열심, 그리고 각종 사회적 활동으로 이름을 알린 수많은 형제 자매들의 연결선상에 있다. 우리는 여러 세대에 걸친 풍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심지어 미국의 신 복음주의 운동보다도 앞서는). 이런 역사 모두를 다 너무도 성급하게 ‘복음주의’라는 용어로 깎아내리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실한 기독교의 모범을 보였던 과거의 사람들과 단절하게 만들 수도 있다.
지리적 관점
이제 전 세계를 향해 시야를 넓혀보자. 최근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는 현재의 복음주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는 북쪽에서 시작해 ‘전 세계의 남쪽’으로 진행되는 기독교 전파의 지리적 변화를 지적한다.
오늘날 세계의 종교 지도를 살펴보면 20세기 초의 상황과 21세기 초의 상황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발견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선교 학자 앤드류 월스(Andrew Walls)는 “기독교 세계의 무게 중심이 남쪽으로 크게 이동했다”고 설명했다.
지나 줄로(Gina Zurlo)는 ‘세계의 복음주의’(Evangelicals Around the World)에서 구체적인 수치를 보여준다.
– 복음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브라질,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에 있는 가장 큰 다섯) 교단에 속한 인원을 계산하면, 약 1억 5,060만 명이 된다.
– 복음주의 교파 소속 유무에 관계없이 자기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인식하는 개인을 계산한다면, 1 억 3,490만이다.
– 핵심이 되는 신학적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선교 단체인 Operation World가 사용하는 방법으로) 계산하면, 그 숫자는 5억 4,590만 명이다!
이런 숫자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줄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떻게 정의하는가와 관계없이 복음주의는 분명히 세계적인 운동이다. 복음주의의 발상지인 유럽은 현재 3.8퍼센트로 세계에서 가장 비복음주의적인 대륙이다.”
복음주의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런 현실은 내가 공산주의 이후 동유럽에서 복음주의 교회를 섬기며 보낸 5년의 경험을 통해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미국에서 직면한 특수한 도전과 정치적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복음주의 운동의 한 부분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서 티시 해리슨 워런(Tish Harrison Warren)은 우리의 정체성이 단지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글로벌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강조한다.
기독교 운동의 선봉대는 미국 해안에 있지 않다. 따라서 북미 문화는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 서구의 세속화, 또는 서구의 기독교 주변화가 교회 성장을 제한하는 힘은 허리케인을 막거나 계절을 바꿀 정도로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100년 전까지만 해도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글로벌 기독교의 고유한 성장과 부흥은 우리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일하고 계신다.
글로벌 운동으로서의 복음주의를 고려할 때 북미에서 목격하는 복음주의와 연관된 정치적 의미 때문에 복음주의 자체를 무시하려는 것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 알 수 있다. 워런의 도전은 그래서 일리가 있다.
나는 복음주의자들을 생각할 때 태국에서 교회를 개척하던 싱가포르인, 우간다에서 난민을 섬기던 르완다 가정, 나이지리아 신학생, 또는 남아메리카의 에반젤리코스(evangélicos, 라틴 개신교인을 일컫는 용어)를 떠올린다. 이제 우리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논의에서 이러한 목소리를 최우선에 그리고 중심에 두어야한다. 그들이야말로 지구상 복음주의자들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우리의 미래이자 현재다.
더 큰 질문
이처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시야를 넓힐 때, 적어도 내게 있어서 이 글의 시작 부분에서 나열한 모든 도전적인 질문을 다 덮어버리는 새로운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 우리는 왜 ‘복음주의’ 속에 담긴 미국만의 특징이 ‘복음주의적 정체성’을 인식하는 데 과도한 영향을 미치도록 계속 놔두어야 하는 걸까?
미국인이 복음주의라는 용어의 유일한 주창자도 아니고 또 이제는 핵심적인 주창자도 아니다. 한 국가에서 일어나는 사회 정치적 논쟁이 전 세계적 운동을 정의하게 만드는 것은 세계에 대한 좁은 시각이며 솔직히 말해 미국 중심의 세계관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다음과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글로벌 복음주의자로서 전 세계의 형제 자매들과 마음을 함께 하고 싶다.
(1) 복음주의 전통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선한 것에 감사한다.
(2) 세계적으로 볼 때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교회의 성장에 흥분한다.
(3) 성경의 권위, 복음의 중심성, 전도의 긴급성, 그리고 복음이 가진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에 헌신한다.
(4) 리뉴얼 프로젝트를 갱신함으로써 교회가 복음과 성경에 비추어 계속해서 새로워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런 새로움이 미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도록 헌신한다.
나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표현하거나 또는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마다 나는 그 용어를 어느 한 지역 또는 편향된 정치적 의미를 초월하는,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의미로 말한다는 점을 꼭 명시하곤 한다. 복음주의의 글로벌 운동이 제대로 정착하려면 무엇보다 정치로 인해 종종 왜곡되는 미국 중심의 정의(definition)를 뛰어넘는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물론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가진 세계적인 포괄성을 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전 세계의 삶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알리는 것이다.
“ 100년 전까지만 해도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글로벌 기독교의 고유한 성장과 부흥은 우리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일하고 계신다 ”
Trevin Wax | www.tgckorea.org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협약에 따라 본지에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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