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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거리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손은식 목사(프레이포유 교회)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며 노숙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손은식 목사를 만났다. 그에게 노숙인은 아버님, 어머님이다. 그는 거리에 나와 노숙인들과 손잡고 기도하고 눈물을 흘릴 때, 주님이 안아주시는 느낌이 든다고 고백한다. 사람들이 “많이 힘들지? 수고한다.”라는 인사를 할 때 그는 속으로 웃는다. 그는 노숙인과 이야기하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좋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기도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어떻게 노숙인 사역을 시작하게 되셨어요?

“제가 처음 거리에 나왔을 때는 노숙인 사역을 하러 나온 게 아니었어요. 단지 복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아버지는 서른 살에 장로가 되실 만큼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는 일꾼이셨어요. 그래서 저도 교회가 친숙했고,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을 보면서 말씀 선포하는 자리에 나도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죠.”

– 결국 꿈이 이루어진 거네요?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난 이후에, 언젠간 목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학은 관광경영학과를 나와서 여행인솔자 일을 하고 있었어요. 세계 20여 개국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문화, 언어, 역사들을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섬기는 게 좋았어요. 그때 제 달란트를 발견한 거 같아요. 여행지를 소개하고 다른 사람이 기뻐할 때, 제가 너무 기뻤어요. 2년 정도 지난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내가 하게 해줘서 네가 좋아하는 일 했지?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일 하지 않겠니?’ 이 마음이 지워지지 않는 거예요.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이라면 당연히 목회라고 생각하고 다음 날 신학대학교에 무작정 찾아갔어요. 학교에서 내려오는 학생을 붙잡고 “여기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라고 물었어요. 마침 학교 앞에 학원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공부하면 된다고 알려주더군요. 그렇게 학원에 등록해서 2007년에 신대원에 들어갔어요.”

언젠가는 목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 아주 단순하게 순종하셨네요.

“그때는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되고 싶은 열정이 넘쳤어요. 신대원에 입학하기도 전에 사역지를 구해서 교육전도사부터 교육목사, 부목사까지 10년 동안 사역을 했어요. 주님께서 저에게 시키신 특별한 사역을 하기 위해 빨리 배우고 싶었어요. 그런데 목사 안수받기 1년 전부터 기도하면서 부담이 있었어요. 제가 설교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부목사, 담임목사로 가는 길이 펼쳐져 있는데, 그게 내가 갈 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주님께서 나에게만 주신 길이 있다는 확신을 오래전부터 가졌거든요.”

– 주님이 주신 길을 어떻게 찾게 되셨나요?

“무조건 ‘주님, 어딥니까?’ 기도하면서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어요. 거리에서 무작정 기도하던 어느 날 ‘이제 네가 좋아하는 거 하면 되지 않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게 뭐에요?’ 저는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못하는 것들을 이야기했는데, 주님이 ‘기도하는 거 좋아하지 않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 따라서 기도하러 가는 것을 좋아했어요. ‘하나님을 모르고, 교회는 찾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4000만 명 있는데, 그들에게 나가서 기도해주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그래서 프레이포유(Pray For You)가 생겨나게 됐어요.”

– 노숙인 사역이 아니라 기도를 해주는 사역이었군요?

“2014년 1월 1일에 사역을 처음 시작했는데요, 지인들 몇 분이 모여서 서울 중구에 있는 공원 옆에서 예배를 드리고 사역이 시작됐어요. ‘기도가 필요한 사람 언제든지 연락주세요.’라는 명함을 만들어서 나눠줬어요. 거리에 있는 분들에게 ‘저는 손은식입니다. 기도가 필요한 분들 연락주세요.’라면서 돌아다녔어요. 기도가 필요한 분들에게 주님이 저를 보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았고, 전도지나 명함을 줘도 저를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이 없었어요. 저는 막상 거리에 나오면 기도할 때 병이 낫고, 모든 고민과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요. 저 혼자 무거운 짐을 지고 한두 달이 지나니까 ‘내가 여기 왜 나왔지.’ 생각하게 됐어요.”

기도를 하겠다고 거리에 나왔지만

– 위기가 찾아왔군요.

“집에는 아내와 아들, 갓 태어난 딸이 있었어요. 부목사 직을 내려놓고 재정이 공급될 곳도 없었어요. 걱정하시는 부모님에게는 2년 동안 열심히 해보겠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막상 앞이 캄캄했어요. 힘든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을지로입구역에 있는 공연 무대에 6~7분 정도가 누워있는 게 보였어요. 거의 매일 누워 계시던 분들이었어요. 전 목사였지만 걸인들을 만나면 1000원을 줄까, 말까 고민하던 수준의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보실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날은 저분들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슨 사연이 있을까. 나도 힘드니까 이심전심이었던 것 같아요. 뭐라도 좀 드리고 싶은 생각에 빵을 사서 다가갔어요. “기도하는 목산데 기도를 해드려도 될까요?” 했더니 갑자기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거예요. 그렇게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났는데 주님이 마음속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은식아, 고맙다. 내가 여기에 이들과 함께 있다. 찾아와 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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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등포 거리 사역에서 기도하는 모습. 제공: 프레이포유

– 그렇게 처음 노숙인들을 만나게 되셨군요? 이후 어떻게 됐나요?

“그때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지만 제 마음이 달라졌어요. 이거구나. 매일 전단지를 들고 거리에서 전도를 하고 마지막에는 간식을 사들고 그분들에게 드리면서 교제를 하다가 들어갔어요. 이후 주말에 섬길 수 있는 사역지도 생기면서 재정 공급도 허락해주셨어요. 조금씩 프레이포유 사역을 위해 헌금을 해주시는 분들이 생기면서 이분들에게 간식봉지를 만들어 나눠드렸어요. 아내가 고구마, 감자, 옥수수 같은 것도 쪄주면 담아서 전해주기도 했어요. 그렇게 3년 동안 사역했어요. 이곳, 저곳에서 여러 도움의 손길이 있었어요. 그러나 풀타임으로 함께 섬기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긴 했죠. 그러다 3년째 되던 해에 한 선교단체 간사님께 연락이 왔어요.”

– 좋은 소식이었나요?

“해외에서 선교단체 지부도 설립하고 섬기셨던 분이었는데, 마지막 사역으로 한국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데요. 알아보다가 프레이포유를 알게 되셔서 연락을 주셨어요. 갑자기 3명의 풀타임 사역자가 생겼어요. 대부분의 노숙인 사역은 센터를 세우고 급식사역을 해요. 그러나 그분들에게 찾아가서 간식을 드리면서 기도해주는 사역은 8년 동안 사역해오면서 한 군데도 못 봤어요. 이 사역을 그분들이 전폭적으로 도와주셨어요. 이분들을 만난 건 진짜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 진짜 열매가 뭐죠?

“어느 날 한 공원에서 노숙인 한분을 만났어요. 얼굴이 선하더군요. 저와 교제하고 나서 제가 목사인줄 알고 성경이야기를 물어보면서 자기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대화하면서 이분과 사역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기도하면서 사역을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봤어요. 이렇게 거리에서 한 명의 사역자가 생겼어요. 한 분이 생기니까 며칠 내 또 다른 한 명이 세워졌어요. 그런데 사역을 끝내고 이분들을 다시 거리로 가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선교단체 간사님들이 이분들의 고시원비를 책임져주시기로 했어요. 그리고 또 한 명의 사역자가 생겼어요. 이제 4명이 함께 모여 사역을 하는데 너무 좋았어요.”

노숙인 출신이 노숙인을 위해 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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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등포역 광장에서 기도 중인 무명 집사님. 제공: 프레이포유

– 노숙인이었던 분이 노숙인을 위해 기도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거군요.

“이분들은 이 사역에 준비된 분들이에요. 하루는 을지로입구역에 있는 한 아버님을 찾아갔어요. 그분은 피부병이 있어서 손등이 눈꽃이 핀 것처럼 하얘서 저는 한 번도 그분 손을 못 만졌어요. 병이 옮으면 사역하는 게 어렵기도 해서 갈 때마다 어깨에 손을 올리고 기도했는데, 우리 형제들은 가자마자 손을 붙잡고 기도하는 거예요. 저도 옆에서 기도하는데 얼마나 부끄럽고 눈물이 나던지요. 이게 진짜 프레이포유라고 생각했어요. 가난한 이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져 있으니까 저보다 사역을 훨씬 잘하시는 분들이죠.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어요.”

– 또 어떤 위기가 찾아왔죠?

“선교단체의 여러 사정으로 간사님들이 이분들의 고시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어요. 여러 과정 끝에 선교단체 간사님들은 떠나시고 우리 형제들과 저까지 4명이 남게 됐어요. 막상 고시원비를 어떻게 채울 것이냐가 문제였어요. 게다가 저 혼자 사역하다가 사역자가 4명이 되고 나니 사역비도 4배로 늘어난 상황에 답이 안 나왔어요. 기도하다가 부모님을 찾아갔어요.”

<이상 241호에 게재>

2년 동안 이 사역을 해보다가 열매가 없으면 돌아오겠다고 말씀드린 상황이었는데, 열매가 생겼잖아요. 도와달라고 말씀드렸는데, 부모님도 당황하셨죠. 다른 것보다도 노숙인들이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지원을 해주냐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기쁘게 허락해주셨어요.”

– 한고비 한고비 넘어가는 것 같네요.

“아는 권사님에게 집을 좀 구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어요. 그런데 금액이 너무 적어서 힘들 것 같지만, 일단 알아보신다고는 하셨어요. 2~3시간 후에 구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재개발되면 나간다는 조건으로 집을 구하고 살림 공동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주님이 먼저는 우리를 살리셨고, 이 지역에 있는 분들도 살리는 공동체가 되자고 이름을 ‘살림’으로 지었어요. 결국 프레이포유를 통해 가난한 자들이 살아나게 됐으면 좋겠어요.”

– 공동체 이름도 맞춤이네요.

“시작예배를 드리기 위해 준비하던 중에 한 기독교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우리를 촬영하고 싶다고요. 처음에는 장난전화인줄 알았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사역이 방송에 나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마침 연락을 받은 때가 살림 공동체 시작예배 며칠 전이었어요. 그렇게 2016년 12월 12일에 시작 예배부터 촬영을 해서 방송에 나갔어요. 그 다음부터 주님이 재정을 공급해주시기 시작하셨고, 지금은 살림 공동체가 4호까지 생겼어요.”

– 감사한 일이네요. 그래도 공동체 생활이라는 게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우리 형제들이 프레이포유의 사역자이고 친구처럼 되었지만, 사실은 삶을 포기하고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었어요. 거리에 나오기까지 사업 실패, 은행 채무, 각종 빚, 가족 해체, 주민등록 말소, 신용불량자 등 한 사람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큰 고통과 아픔의 경험이 있어요. 그래서 거리에 나와 자살 시도를 하지 않은 분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고 희망이 생겨 공동체에 들어와도 과거의 삶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해서 여러 어려움들이 발생해요. 어느 날 1호 공동체에서 새벽에 전화가 왔어요. 한 형제가 술 먹고 동네에서 난동을 부린다고요. 또 다른 형제와 싸워서 뼈가 부러진 것 같다는 연락도 와요. 아니면 술 냄새가 풍기는데도 사역한다고 나와서 기도하는 모습도 보죠. 그러나 그 시간은 주님이 나를 훈련시켜주시는 시간이었어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들을 보는 시간이었죠.”

손 목사는 본지 취재팀을 종로에 마련된 프레이포유교회로 초대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교회 개척에는 비전이 없다던 손 목사가 어떻게 교회를 개척하게 됐는지 궁금해 질문을 던졌다.

– 프레이포유 교회는 어떻게 개척하게 되신 건가요?

“노숙인(손목사는 줄곧 ‘거리의 분’으로 불렀다)들을 섬기다보니, 추울 때는 쪽방에 가서 자겠다면서 8000원만 달라고 하는 분들이 계셨어요. 저는 쪽방에 대한 존재 자체를 몰랐으니까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한번 가봤어요. 처음엔 잘 못 찾았어요. 화려한 상가 뒤에 부서질 것 같은 쪽방이 섬처럼 존재하더군요. 이곳에도 내가 와야 되는구나 생각했어요. 그곳에 처음 가서 만났던 분들이 세분의 할머니였어요. 좁은 쪽방촌 골목에 햇살을 받으며 웃으면서 얘기하시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는데, 주님이 나를 환영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분들은 한 많은 세월을 독신으로 살아오신 분들이었어요. 근로정신대도 다녀오시고, 육군 장군 부인도 계셨죠. 그분들을 보려고 매일 방문했어요.”

– 쪽방에서 만난 분들 이야기도 궁금하네요.

“하루는 겨울이 다가오니까 따듯한 옷도 사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백화점에 함께 갔어요. 그런데 보는 것 마다 100만원이 넘는 거예요. “다른 데로 가요.” 하면서 결국은 이월상품전시장에서 옷을 하나씩 사드리고 식사를 했어요. 돌아오는 길에 한 어머님이 종로의 “화신백화점 다녀온 이후에 오늘 처음 백화점 다녀오네.”라고 하시더군요. 이분들이 왕년에는 백화점도 다니시던 분들이었죠. 쪽방촌에 계속 오는 한, 이분들과 여행도 다니고 뭔가를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생애 마지막 여행을 다녔어요. 남이섬, 설악산, 유채꽃이 필 때는 제주도도 다녀왔어요. 알고 보니 우리 형제들도 여행은 처음이었어요. 지금은 두 분이 돌아가시고 한분만 계세요.”

– 할머님들은 정말 행복한 생애 마지막 여행을 하셨군요.

“쪽방촌이나 거리에서 노숙인들을 만나다보면 교회가 어디냐고 물어봐요. 그러나 기존 교회들은 노숙인 급식 사역정도만 하기 때문에 노숙인만을 섬길 수 있는 교회는 없었어요. 저도 교회 개척에 대한 마음은 없는데, 자꾸 교회가 어디냐고 얘기하시니까 부담감은 있었죠. 그래서 교회에 대한 기도제목을 프레이포유 홈페이지에 올려서 기도했어요.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주님이 안하시겠지 생각했어요. 저는 거기에 대한 비전도 없으니까요. 종로에 있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가 봐도 종로에는 교회를 하라고 내주는 건물주도 없다고 했어요. 잘됐다고 생각했죠. 더구나 코로나 때문에 대면예배도 어려워졌는데 더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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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쪽방촌 90세 어머님 네 분과 함께 한 생애 마지막 여행. 제공: 프레이포유

– 목사님께서 너무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주님이 어떻게 인도해주셨는지 더 궁금해지네요.

“어느 날 여자 전도사님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잘 되고 있냐고 물어봤어요. 아는 분이 교회도 못가서 드리지 못한 헌금을 주셨는데, 건물을 알아보라고 하셨어요. 공인중개사를 찾아갔죠. 그런데 왜 종로에 교회를 하려고 하느냐, 월세는 어떻게 낼 거냐. 안된다고 하면 될텐데 계속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렇게 한두 시간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는데, 다음날 한군데 가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여기 주인 할머니가 귀가 어두우신데, 너무 시끄럽게만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찬양하고 예배드려도 된다고요. 그렇게 다음날 계약을 하고 지난 1월 7일에 첫 예배를 드렸어요.”

– 하나님도 너무 재밌게 인도해주셨네요.

“그러나 우리 예배는 기존 교회 예배와는 다른 모습이에요. 거리에서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간식봉지를 나눠주면서 기도해드려요. 보통 500개 정도를 나누고 거리나 쪽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기도를 하죠. 교회와 합동으로 사역할 때는 1000개 이상도 나눕니다. 필요한 물품들도 구해서 전해드려요. 가방, 신발, 핫팩, 침낭, 텐트, 감기약, 소염제, 양말, 내복, 장갑, 마스크 등 이분들이 신청하면 다음에 갈 때 전해드리죠. 이제는 교회가 생겼으니 거리에서 하던 것을 교회에서 하려고 해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예배드리고 식사하고 교제하고, 물품도 전해드려요. 특별히 재능기부도 해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이발, 치과 등 각종 봉사로 섬겨주시는 분들이 오세요.”

– 따뜻한 곳에서 잠시 쉬실 곳이 생기셨네요. 이분들의 상황이 궁금해요.

“노숙인들은 각자가 일을 할 수 있는데도 노숙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어요. 생의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나온 사람들이에요.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하죠. 이분들이 노동을 하다가도 몸을 다치게 되면 벌어놓은 돈을 쓸 수밖에 없고 그다음부터는 노숙을 하게 되는 거예요. 기초수급을 받으려고 해도 먼저는 집이 있어야 받을 수 있죠. 그건 돈이 있다는 이야기고요. 그나마도 없는 사람들은 수급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 상황이 그렇군요.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처음에는 그분들이 그래도 사회로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기도를 많이 했어요. “일자리 구해보셔야죠.” 묻기도 했는데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게 잘못됐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어요. 그분들 입장에서는 1%도 도움이 안 되는 말이었어요. 먼저 몸이 건강하지 않아요. 그리고 생을 마감하려고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죽어야겠다고 생각해요. 멀쩡한 직장에 들어가도 금방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규칙적인 일은 이분들에겐 힘들 수가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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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입구역에서 만난 조춘식 형제와 함께한 손은식 목사. 제공:프레이포유

– 경험해보지 않으면 생각해 볼 수 없는 문제들이군요.

“그때부터 기도가 바뀌었어요. 그분들은 이 곳 다음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계세요. 그분들과 대화 나누고 마지막에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알고 이분들의 마음과 영혼을 받아달라고, 마지막 삶을 하나님 뜻 안에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저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것을 알아요. ‘은식아, 고맙다. 내가 이들과 함께 있다.’는 마음을 주세요. 이분들이 거리에 계시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이후 관점이 달라졌어요. 예수님은 거리에서 죽어가는 자들과 함께 하셨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셨어요. 나사로의 집에 머무시면서는 각종 귀신들리자, 병자들과 함께 하셨어요.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러면서 성경의 핵심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됐어요. 그때부터 거리에 예수님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했어요.”

– 이분들을 섬기시면서 저희가 알고 기도해야할 것들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쪽방에 계신 분들도 쪽방에 살 돈이 없으면 거리로 나오게 돼요. 노숙인들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인데 단지 이분들이 쪽방에 사는 이유는 정부에서 나오는 기초수급 때문이에요. 그러나 이것은 근로를 할 수 없다는 진단이 나와야 받기 때문에 절벽 끝에 있는 분들이세요. 이곳에 60~70%는 수급자고 나머지는 일용직 일을 해요. 쪽방의 모습은 처음 보면 충격 그 자체에요. 서울 중심가에 어떻게 이런 집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 평짜리 집에 밥솥이나 선풍기가 한 대 있으면 발을 뻗을 수 있는 공간도 없어요. 대부분 옷 위에 발을 올리고 주무시죠.”

– 말로 들어도 이렇게 열악한데 실제 눈으로 보면 더 심란하겠군요.

“그래도 그분들이 거기에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쪽방 상담소에서 물품들이 들어오기 때문이에요. 서울 중심에 있으니 병원 가기도 쉽고요. 그분들은 근로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 분들이니까 병원이 가까이 있어야하죠. 그래서 혼자 원룸이나 고시원에서 살 수 없어요. 이분들에게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처음 이분들을 만났을 때는 제가 한번 올지 계속 올지도 모르고, 또 봉사하는 거 사진만 찍고 지원받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 문을 안 여셨어요. 그런데 계속 찾아가고 섬기고 하니까 마음의 문이 열렸어요. 지속적으로 찾아가다보니 굳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분들이 먼저 성경책을 달라고 하시고, 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했어요. 그게 전도인 것 같아요. 이웃사랑에 모든 키가 달려있었어요. 복음전파의 문을 여는 키는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었어요.”

– 끝으로 기도제목을 나눠주세요.

“국내외에서 프레이포유와 같은 사역을 하시는 분들은 아직 보지 못했어요. 노숙인들을 섬긴다 해도 오래가지 못했어요. 드러나지도 않고, 가난하고 어려운 분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다 가고 싶어요. 그곳에 살림 공동체가 세워졌으면 좋겠어요. 주님이 보내주신 사역자들이 진실하게 잘 하고 계셔서 이것이 하나님이 세워주신 모형이 아닐까 생각해요. 힘들고 어려운 분들을 더 많이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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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포유의 동역자들. 제공: 프레이포유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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