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OO대학교에 가서 조직신학 박사과정을 공부한다고 하니 후배 목사가 도움이 되라고 글들을 보내준다. 읽다가 느낀 점이 있어서 몇 글자 첨가한다. 마지막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은 나 스스로는 갖고 있지만 글을 읽는 분들이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몇 가지 답이 될 만한 것은 안명준 교수(평택대학교 조직신학)의 글에 담겨 있다. 조직신학을 할 수 있는 기초 사고 능력을 위해 좋은 글이다. (조용선)
안명준 교수의 칼럼은 다음과 같다.
1. ‘조직신학’을 정의하신다면?
반틸(van Til)의 말처럼 조직신학이란 전체적이며, 통일된 체계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제공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어떤 주어진 주제에 대하여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에 대답하는 학문이다. 결국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모든 주제들을 계시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제시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2. 오늘날에 있어 조직신학이 연구되어야 할 가치(효용)이 있다면 어떤 점을 들 수 있겠습니까?
조직신학은 기독교신학의 내용의 구조를 형성하는 학문으로서 사실상 신학을 대표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도그마적이고 경직된 학문의 방법으로 인해 최근에 그 가치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는데 있어서 조직신학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종교다원주의 도전으로 기독교의 정체성이 약화되어 가는 시점에서 조직신학의 사명은 올바른 교리의 확립을 통하여 참된 기독교의 특성을 바르게 만들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3. 현대 조직신학의 대표적 동향과 이를 대표할만한 학자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현대의 조직신학의 흐름은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종교개혁신학의 명분을 이은 정통주의 신학이다. 두 번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 하에 있는 자유주의 신학이다. 세 번째는 이에 반발한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을 통하여 신의 초월성과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강조한 신 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볼 수 있다. 네 번째는 최근 에벨링과 데이비드 트래시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해석학적 신학이 유행하고 있다. 다섯 번째로 한스 큉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에큐메니칼 신학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던 신학자들의 새로운 시도를 들 수 있다. 현대의 대표적인 신학자들로서는 화란의 자유대학의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 베르코프와 베크, 미국의 칼빈 신학교의 벌콥과 호케마,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반틸과 존 머리, 남아공 프리토리아 대학의 헤인즈와 베스마르가 있다. 이들은 모두 칼빈의 정통을 이은 신학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좀더 폭넓게 신학을 전개시키는 학자로서 에밀 부르너, 폴 틸리히, 오토 웨버, 몰트만과 판넨베르그, 그리고 에벨링과 마이클 베커가 있다.
4. 한국의 조직신학연구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어떤 점을 들수 있겠습니까?
그 동안 한국의 신학은 서구의 신학의 지나친 영향으로 많은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물론 서구 신학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요한 것은 21세기에 한국신학이 서구신학에만 종속화 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그들의 신학의 내용에 문제보다는 그들의 신학방법에 대하여 한국의 신학이 검증을 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한국의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의 건설적인 협조를 통한 기초 위에 동양적 사상과 한국의 사상을 신학의 방법으로 적용할 시기가 왔다. 이런 작업을 위하여 이런 관점에 성경에 대한 해석학의 역할은 우선적으로 시행 되어야 한다.
5. 신학과 현장의 연계에 있어 조직신학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들 수 있겠습니까?
조직신학이 지나친 교리에 집중하는 경향으로 교회의 현실성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조직신학의 목표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것임을 밝히 증거 해야 한다. 과거의 교리적인 논쟁에 얽매이지 않고 오늘날의 상황을 분명하게 분석하여 신학적인 진단과 더불어 올바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현재 복음주의 조직신학회에서는 내년 봄에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지 그 대안들을 제시할 심포지움을 계획하였다. 신학자란 진정으로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신학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다음은 필자의 생각이다.
“신학자란 진정으로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신학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안명준 교수의 이 말에서 교회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교회가 눈에 보이는 교회를 말할 때에 조직신학자들은 로마 가톨릭에 종속된 스콜라 신학자들처럼 된다. 조직신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 즉 참된 교회를 향한 신학의 헌신이다.
만일 눈에 보이는 교회 즉 교황처럼 그 힘이 조직신학자들에게 가해지면 조직신학은 어용신학이 된다. 어떤 상황에서 조직신학자는 눈에 보이는 교회는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만으로 이 세상의 교회가 변질될 때에 그 교회를 향하여 선지자의 횃불을 들어야 한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의 조직신학자들은 벌써 횃불을 들었어야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기도신문]
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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