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호 / 나눔&나눔
탈북한지 10년째 된 장인내 전도사를 만났다. 장 전도사는 교회에서 탈북 성도들을 섬기며 선교를 준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탈북 과정과 한국 생활을 들어봤다.
– 탈북자들을 섬기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
“우리 교회는 탈북 식구들이 60%, 남한 성도들이 40% 정도로 구성돼 있어요. 저는 초등부를 담당하면서 탈북 2세들과 남한의 다음세대를 섬기고 있어요. 담임 목사님도 탈북하신 분이세요. 교회를 섬기시면서 동시에 통일소망선교회 대표를 맡고 계세요. 선교회에서는 1년에 두 번 북한선교학교를 열어요. 북한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 교육하고 파송해요. 이들은 탈북자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 말씀으로 양육을 해요. 3개월 동안 양육을 받고 난 후에 대사관이나 이민국과 연결해서 한국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선교회와 교회 공동체가 한 건물 안에 있고 대표님도 한 분이어서 같은 비전과 기도제목을 공유하며 협력하고 있어요.”
– 탈북의 경험이 있어서 탈북자들에 대한 마음이 있으시겠지요. 탈북 과정을 들려주세요.
“탈북을 결심하면 길을 인도하는 브로커를 따라가게 돼요. 대부분 중국으로 가게 되는데 언어도 안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브로커가 안내하는 대로 갈 수밖에 없어요. 저를 인도한 브로커는 처음엔 북경에 있는 나이 많은 남자에게 저를 데려가 남편이라고 소개해줬어요. 당시 저는 22살밖에 안됐기 때문에 남자를 경험한 적도 없고, 두려워서 몇날 며칠을 도저히 못 있겠다고 울었어요. 브로커가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저를 다시 연변으로 데리고 갔어요. 두 번째로 팔려 가게 된 곳에서 만난 한족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에요. 남편과 함께 중국에서 3년을 살았어요. 탈북 하는 과정에서 믿을 사람은 브로커뿐이에요.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죠. 게다가 탈북을 한 처지이기 때문에 살아가려면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해요. 그래서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브로커를 통해 중국 남편에게로 팔려가거나 채팅업자들에게 잘못 걸려들기도 해요.”
목사님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싶어졌어요
– 한국에 오기까지는 긴 여정이 있었겠죠?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어요. 받았더니 브로커였어요. 한국에 있는 분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했어요. 번호를 받아서 전화를 걸었는데 제가 아는 사람이었어요. 북한에 있을 때 가족 모두가 없어졌던 사람이었죠. 그분이 나를 도와주고 싶다고 했어요. 한국사람 만나게 해주겠다고요. 저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곧바로 지금 교회 담임 목사님이 중국에 오셨어요. 그때 목사님을 처음 만났어요. 식당에서 만나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기도해줬는데 너무 놀랐어요. 생전 처음 본 분이 큰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를 했어요. 무섭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그날 목사님과 2개월 동안 매주 만나기로 했어요. 목사님은 만나는 동안 생활비를 대주겠다고 약속하셨죠. 목사님은 오실 때마다 북한 선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함께 데리고 오셨어요. 그분들은 2박 3일 동안 우리 얘기를 들으면서 울고 그렇게 아픈 시간을 겪는 동안 우리만 잘 살아서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졌어요.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진짜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돌아와 집 근처에 교회가 있는지 찾아봤어요. 한 시간 거리에 조선족 교회가 있었어요. 그 교회에 6개월 정도 다녔는데 남편이 매주 데려다줬어요.”
– 부군도 함께 교회에 나가셨나요?
“아니요. 데려다만 줬어요. 그러는 동안 목사님을 4번 정도 만났어요. 만날 때마다 예배를 드렸어요. 처음에는 성경공부가 먹히지 않았어요. 그저 교제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탈북 자매 4명 정도가 함께 모였던 것 같아요. 그 무렵 그 모임에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자매가 있는데 왠지 대답을 안했어요. 나중에 보니 그 자매가 중간 브로커 역할을 하고 있었고 제가 오해를 사게 된 사건이 하나 터졌어요. 저 때문에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에 어려움이 생겼어요. 제가 없으면 괜찮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한국행을 결심했어요. 그때가 첫 아이 돌이 지난 때였어요.”
중국을 탈출, 제3국 감옥을 거쳐 한국으로
– 가족이 모두 나오셨나요?
“아니요. 저만 나왔어요. 급하게 목사님께 연락을 드렸어요.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다고요. 무조건 도망 나오라고 했어요. 남편과 교인들의 도움으로 목사님이 소개한 분을 따라 11명이 함께 탈출했어요. 브로커와 같이 보트를 타고 강을 넘어 제3국에 도착했어요. 그곳에서 경찰한테 잡혀야, 난민이 되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나라 대사관으로 연결될 수가 있어요. 어쨌거나 체포당해야 하죠. 그곳 감옥에서 이민국까지 40일 정도 걸려서 한국에 오게 됐어요.”
– 넘어오는 과정 중에 기억나는 어려운 일은 없었나요?
“그곳 감옥에서는 시장에서 음식을 사서 알아서 식사를 해결해야 해요. 돈이 있는 사람들은 먹을 수가 있는데, 저는 재판비용밖에 없어서 먹지 못했어요. 불법으로 그 나라 땅을 밟았기 때문에 재판을 받아야 다른 나라에 갈 수 있어요. 그때는 첫 아이를 1년 동안 모유 수유를 하고 몸이 허약해져 있는 때여서 시장에 갔다가 기절해버렸어요. 경찰에 신고되어 다시 머물던 경찰서로 돌아갔는데 그때부터 밥을 주더군요. 제3국에서 그렇게 헤매고 있을 때는 아무도 보호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정신력만으로 버텼어요. 지나고 보니 상처나 강퍅함, 메마름이 쌓이는 시간이었더군요.”
– 힘든 시간을 보내셨네요.
“감사한 건 그때 호흡곤란이 있었는데도 한국에 왔다는 거예요. 몸에 이상이 있으면 비행기를 탈 수가 없는데 오게 됐어요. 한국에 도착해 바로 국정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폐결핵 진단을 받았어요. 국정원에 2개월 머무는 동안 저는 결핵약이 맞지 않아서 40일을 독방에 있었어요. 여러 사람이 있으면 견딜 수 있겠는데 벌레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있는 것이 너무 어려웠어요. 제 몸이 아프면서 아이가 너무 걱정됐어요. 제가 언제부터 이 병을 앓았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아이에게 옮겼을까봐서요. 조사받을 때 중국에 한번만 전화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아이가 너무 걱정된다고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깜짝 놀라더군요. 한국에 잘 도착했는데, 내가 폐에 벌레가 생겼다. 아이도 병에 걸릴지 모르니 검사해보라고 하고 끊었어요. 그때는 폐결핵이라는 용어도 모르니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죠.”
– 한국에 와서도 계속 어려운 시간을 보내셨네요.
“독방에는 종이 한 장이 없어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볼펜 하나가 가방에 있었어요. 글이 너무 쓰고 싶어서 휴지에 밥풀을 붙여서 종이처럼 만들어서 편지를 썼어요. 중국에, 북한에 있는 사람들에게요. 처음에는 편지만 쓰다가 중국에서 성경필사를 하던 게 생각나서 성경책을 달라고 사정했어요. 조사받는 독방에서 성경책을 요구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하면서 안 된다고 나가더니 10분 만에 갖다 줬어요. 그때 찬송가를 1장부터 600장까지 한 가지 멜로디로 밤낮 불렀어요. 휴지에 성경을 필사하고요. 그러나 약 부작용이 심해져서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그때 병원에 같이 가주던 선생님이 아무도 면회 안 오는 걸 아시고는 면회를 오셨어요. 서운해하지 말라고, 명절에도 아내가 싸줬다면서 음식도 갖다 주셨어요. 제가 휴지에 성경을 쓰는 것을 보시더니 볼펜 한줌이랑 종이 100장을 주셨죠. 거기서 매일 울며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우리 아이를 지켜달라고 기도했어요. 하나님이 지켜주시면 이 아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드리겠다고요.”
복음의 진리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다
– 그럼 언제 그곳에서 나오셨어요?
“제가 한국에 온 게 2011년 1월이었는데, 국정원과 하나원을 거치고 나니 5월이 됐어요. 집을 얻어 아무도 없는 방에 앉아있는데 혼자 있는 게 너무 두려웠어요. 제가 항상 용감한 척하고 씩씩한 척을 해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숨 막힐 만큼 두려웠어요. 적막함 때문에 좌절하고 못 견디고 자살한다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해가 됐어요. 바로 집을 나와서 동네를 돌아다니며 펑펑 울었어요.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몰랐어요. 마침 목사님과 연락이 닿아 교회에 갔어요. 그때는 결핵약을 먹고 몸이 허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직업 교육을 받지는 못하고 1년 동안 교회에 가서 살았어요. 집회, 수련회, 부흥회, 금식성회, 산기도, 별 곳을 다 다녔어요. 교회에서는 청소하고 음식도 했어요. 음식을 잘하는 것도 아닌데 맛있다고 칭찬해주시고 사랑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러다 2011년 11월에 지인의 소개로 복음학교에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모태부터 죄인인 나를 보게 됐어요.”
– 어떻게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셨죠?
“우리 아버지는 북한에서 지휘자였어요. 밖에서는 존경받는 사람이었지만 집에서는 악역을 도맡아하셨어요. 엄마는 살아보겠다고 두부를 만들면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셨어요. 북한은 선동을 하기 때문에 직장마다 운동이 있고 거기엔 예술이 빠질 수 없어요. 아빠는 지휘를 하면서 뇌물도 엄청 많이 받으셨는데 그것을 대원들에게 다 풀고 정작 집에는 잘 못하셨어요. 그러다 아버지는 외도를 하셨어요. 그 뒤로는 제가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복음기도신문]
<이상 237호에 게재>
돌아가실 때까지 곁을 안줬죠. 아버지가 너무 미워서 술에다 쥐약을 탈까도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마지막까지 아버지와 관계 회복을 못했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와중에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셨어요. 엄마와 저는 며칠 동안 밭일을 하러 가느라 집을 비웠어요. 그동안 집에서 키우던 병아리가 한 마리씩 죽었는데, 고기를 좋아하던 아버지가 당신이 그것을 드시지 않고 찹쌀을 넣고 끓여놓으셨어요. 한여름이었는데 그게 어떻게 상하지 않았는지 신기했어요.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더군요. 그때가 떠오르면서 제가 얼마나 본질적인 죄인인지 깨닫게 해주셨어요. 그러면서 어느새 제가 십자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붙잡고 있었는지 보게 해주셨어요. 착하다, 믿음 좋다는 칭찬이 어느새 복음으로 자리 잡고, 누군가 칭찬하지 않으면 혈기가 나오고, 성전을 청소하거나 봉사하는 일이 즐겁지 않고 짜증을 내며 질투하는 모습을 보며 죄인의 모습을 깨닫게 해주셨어요.”
– 그랬군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난 이후에는 어떤 삶을 사셨나요?
“1년 뒤 남편과 아들이 한국에 들어왔고, 이듬해 말씀을 받고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신학을 복수 전공했어요. 남편은 하나님을 모르지만 착한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탈북 여성들을 돈을 주고 살 때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해요. 그러나 남편은 그러지 않았어요. 저를 물건 취급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죠.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해도, 남편은 포기하지 않았을 거예요. 물론 복음을 들었고 믿었기 때문에 올바른 선택과 책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에 더욱 감사할 수 있어요. 그러나 모든 탈북 지체들이 가정을 지키고 자녀들을 지키는데 어려움이 있어요.”
–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한국에 나온 북한 식구들은 다양한 어려움을 겪어요.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나라에서 북한 식구들에게는 임대주택을 주고 6개월 간 생계급여를 줘요. 그동안 자립을 하라는 거죠. 그러나 문제는 공허한 게 큰 어려움이에요. 예수님을 알아도 말씀으로 채우고 신앙을 유지하는 게 어려운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공허함을 뭔가로 채워야 해요. 그 중에 이성도 그 대상이죠. 중국이나 제3국에서 탈북 이후의 삶은 자신이 선택한 삶이 아니라 반강제적으로 결혼을 하죠. 그러나 한국에서 주어진 자유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성을 찾는 것 같아요. 어떤 경우는 중국에 있는 가족들을 한국에 데리고 와도 끝까지 가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데려오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가족이 북한에도, 중국에도, 한국에도 있게 되는 거죠. 자유가 뭔지 모르고, 책임이 뒤따르는 것은 생각 못해요. 자기가 누린다고 생각하지만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지 몰라요. 결국 하나님을 만나고 이것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허락된 가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중국에 있는 가족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가정을 지킨다는 건 불가능해요.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도 적지 않아요. 중국이나 북한에 남은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야하니까 계속 돈을 쉽게 많이 벌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또 다른 어려움도 겪게 돼요.”
– 한국으로 왔다고 해도 상황이 매우 어렵군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물질로 북한사람을 끌어당기면 안돼요. 돈이 있어서 만족하고, 없다고 불행한 게 아니에요. 진리를 만나게만 해주면, 엎치락뒤치락 과정을 겪을 순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나는 가족을 지켰고 괜찮으니까 이런 말을 한다고 해요. 그러나 가족을 데려오기까지도 결단을 해야 해요. 쉬운 일은 아니죠. 내가 한국에 와서 초대하지 않았으면 남편은 올 수 없었어요. 이게 탈북자 아내를 한국에 보내고 중국에 남아있는 남편들 입장이에요. 그런데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어요. 북한 자매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때까지 신앙으로 양육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그 대가지불이 어떤 건지를 알게 해주는 게 교회의 역할인 것 같아요.”
탈북자를 섬길 복음의 전사가 필요해요
– 교회가 탈북자들을 위해 또 어떤 것들을 섬겨야할까요?
“한국에 온 북한 식구들은 연락을 끊기가 쉬워요. 연락처를 바꾸면 다시는 못 찾죠. 지금 한국에 탈북자가 3만 4000명 정도 있고, 수백만 명이 북한을 나왔어요. 어떤 선교사님은 탈북자들은 요셉처럼 먼저 한국에 보내진 통일이라고 얘기하세요. 이들을 마귀가 가만히 놔두겠어요? 그래서 전사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이 때문에 남한 교회의 역할이 절실해요. 북한 식구가 북한 식구를 양육하는 건 어려워요. 이미 하나님을 깊이 만난 준비된 한국교회가 자신들이 경험한 깊이까지 북한 식구들을 양육해주는 역할이 필요해요.”
– 양육이 필요한 거군요.
“한국 교회가 5~6만개라고 하는데, 한 교회가 탈북자 한 명씩만 맡아서 용사로 키우면 통일을 준비하는데 효율적인 방법이 될 거예요. 남한 교회가 북한 선교를 준비하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요. 북한 사람이 북한을 선교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에요. 복음의 전사가 된 사람들이 북한이 열려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큰일을 할 수 있겠어요. 이 때문에 남한 교회가 복음이 자기 안에서 능력이 되는 증인의 역할을 해줘야 해요. 최고의 교육과 시스템 안에서 살아온 남한 교회 자체를 이들에게 심어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이식해주기까지의 노력이 있다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예요.”
–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저는 선교가 목표에요. 그래서 1인 예배자, 1인 말씀 선포자, 1인 말씀 인도자를 준비하고 있어요. 영어와 헬라어, 중국어를 준비해서 어디를 가든지 말씀을 선포하고 싶어요. 내가 있는 곳이 교회가 되도록요. 그래서 기타도 시간이 될 때마다 연습하고 있어요. ‘어 성경이 읽어지네’ 전문 강사과정도 마쳤어요. 무리가 아닌 제자를 양육할 때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온전히 서 있지 않으면 제자 양육이 안 되니까요. 무리가 아니라 각 사람이 세워져서 또 다른 제자를 삼을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해요. 탈북 2세들은 중요한 위치에 있어요. 우리 아이들은 북한과 중국을 품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에요. 그러나 남편이 준비되지 않으면 같이 갈 수 없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예배자로 준비되는 것을 기도하고 있어요.”
– 마지막으로 기도제목 나눠주세요.
“가정이 먼저 예배 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남편도 예수 생명으로 이끄셔서 동일한 비전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북한 식구들을 복음 앞에 세우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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