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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기적의 순간들… 이 일을 자녀에게 고하라!

▶ 6.25전쟁 당시 사로잡은 조선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설치된 거제도포로수용소. ⓒ 복음기도신문

한반도가 6.25전쟁으로 아픔을 겪은 지 70년이 흘렀다. 그 길고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후손들은 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같은 겨레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잃었을까?

최근 10대 청소년들을 만나 이 전쟁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남침인가 북침인가? 한자말이 어려워서이기도 하겠지만, 금방 답이 나오지 않는다.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 남침이라는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6.25전쟁이란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북한군이 소련 탱크 242대를 앞세워 불법으로 남침, 3년 동안 수백만의 사람을 죽고 다치게 만든 뼈아픈 전쟁의 역사다. 국군 62만 명이 전사, 부상, 포로 등으로 희생됐고 민간인도 100만 명 가까이 희생됐다. 여기에 북한군, 중공군, 유엔군을 모두 합하면 500만 명 가까이 죽고 다친 엄청난 비극의 역사가 여기에 담겨 있다.

전쟁이 발발하던 당일 전방군인 1/3이 고향의 모내기 등을 돕기 위해 휴가를 떠나고 전투 장비도 후방으로 정비를 보내 전투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북한이 38선을 넘어 서부, 중부, 동부로 기습남침을 시작,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됐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남한이 북침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남한이 북한을 공격했는데 어떻게 사흘 만에 남한의 수도 서울이 북한에 의해 점령당할 수 있었을까? 탈북민들은 남한에 도착한 이후, 이 같은 사실을 접한 뒤, 그동안 북한이 주민들에게 허위사실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남한은 전쟁 발발 한 달 만에 국토의 90%를 빼앗겼다. 그리고 국군은 낙동강까지 철수, 남은 대도시는 대구와 부산뿐이었다. 6.25전쟁 초기는 바로 이같이 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전쟁은 지루하게 이어져 무려 3년이 지난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종결됐다. 하지만 이 기간을 다시 되짚어 보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하는 기적 투성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전쟁의 몇 장면을 되짚어본다.

[장면1] 미국, 복음이 전파된 한국을 돕기 위해 파병 결정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 발발 사실을 본국에 알리기 위해 급하게 출근하던 무초 미국대사를 대사관 앞에서 UP통신 기자가 만났다. 이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쟁 발발 사실이 보고도 되기 전이었다. 이렇게 “한국전쟁 발발” 속보가 타전돼,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그리고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불과 이틀 뒤인 6월 27일 신생국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파병을 결정했다. 그 무렵 미국은 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해 1950년 1월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 애치슨라인을 발표한 것을 보면, 미국의 대한(對韓) 인식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바로 20세기에 전 세계를 누빈 빌리 그레이엄 목사다. 그는 미국의 대표적 선교 성공사례국인 한국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국이 공산화되면 50만 명에 달하는 기독교인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며, 미국은 자유와 평화의 파수꾼이 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미국은 전쟁기간에 무려 180만 명의 군인을 이 땅에 파병했다.

[장면2] 전 세계 70%의 국가가 한국의 공산화를 막아내다

유엔군이 한 나라의 전쟁에 이렇게 연합을 이뤄, 참전한 전쟁은 6.25전쟁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전투 병력을 보낸 나라만 16개국. 이밖에 의무지원, 물자지원, 전후복구지원 등으로 우리를 도운 나라는 모두 67개국에 이른다. 당시 전 세계 93개국 중 무려 72%의 나라가 식민지에서 막 벗어난 존재감도 없는 대한민국을 도왔다. 우리는 전 세계에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나라다. 이처럼 지금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유엔군의 참전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대한민국은 건국되던 해인 1948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엔(UN)총회에서 한반도의 합법적인 단일 정부로 인정받았다. 러시아의 끈질긴 필리버스터로 인해 회의 기간 내내 안건 토의 조차 하지 못하다가 마지막 순간, 러시아 대표의 목소리 이상(異常)으로 그의 발언이 중단됐다. 그 이후 안건토의와 함께 표결이 이뤄지고 조직적인 공산권국가의 반발에도 불구, 찬성 48개국, 반대 6개국의 압도적인 표차로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았다. 만약 이때 대한민국이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면, 유엔 연합군 참전은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전쟁 발발 이틀 후인 6월 27일 미국은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를 소집했다. 이 중요한 회의에 당시 소련 대표는 불참했다. 그러나 소련은 일부러 이날 회의에 빠졌다. 미국과 유엔군이 한반도의 전쟁에 참여한다면, 소련은 그 기간에 유럽의 공산화를 거세게 밀어부칠 계획이었다. 미국과 정면충돌을 하지 않으려던 스탈린의 오판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기적을 안겨주었다. 덕분에 미·영·불·중(당시는 중화민국)으로 이뤄진 안보리 회의는 신속하게 ̒공산당의 침략을 저지해야한다는 한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장면3] 5000분의1 기적으로 성공한 인천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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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에 성공한
UN군 군인들이 방조제를 넘어 싸우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캡처

인천은 전투 교범에서 상륙작전을 수행해서는 안 되는 모든 악조건을 갖춘 지형이다. 또 수로에 기뢰를 설치했다면 반드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좁은 구역이다. 만약 작전 사실을 적이 알게 된다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모험이다. 그러나 이 모든 악조건에도 한국해군의 사전 기뢰제거와 북한의 첩보 무시 등의 기적으로 지상군 7만5000명, 함적 261척으로 구성된 제7기동부대의 상륙작전이 1950년 9월 15일 성공적으로 완수됐다.

성공 확률 5000분의 1을 뚫고 성공한 이 작전으로 6.25전쟁의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이미 남쪽 깊숙이 내려간 북한군은 중부지역의 보급로 차단으로 오도가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됐다. 덕분에 빨치산으로 돌변한 북한군으로 인해 민간인의 희생은 적지 않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머물던 전선을 돌파하고 북쪽으로 진격, 9월 28일 서울을 공산군의 손에서 탈환했다. 곧이어 북으로 진격을 개시, 10월 1일 국군 제3사단이 먼저 38선을 돌파하고 10월 19일 국군 제1사단이 평양을 점령했다. 그리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변까지 진격했다.

한국의 반격이 시작되자 김일성은 10월 3일 아들 김정일 등을 만주 심양으로 보내고, 국군이 평양에 입성하기도 일주일 전인 10월 12일 평양을 떠나 중국으로 도주한다. 이와는 달리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이 함락되기 전인 6월 27일까지 서울을 사수하며 전쟁을 지휘했다. 항간에 이승만 대통령이 거짓 연설로 혼자 도주했다는 설이 나돌고 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군이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보고를 접한 이후 비로소 참모들의 뜻을 듣고 피신했을 뿐, 마지막까지 수도 서울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해외 망명 제안 역시 단칼에 거절했다.

[장면4] 주한미군 주둔과 한미 방위조약 체결

미국은 6.25참전 전쟁이 그렇게까지 장기화될 줄 몰랐다. 한국전 참전 이후 미국의 젊은 군인들의 희생과 반전여론이 커져가면서 미군은 휴전협정 체결을 통해 빨리 한반도에서 발을 빼고자 했다. 소련과 중공, 북한 역시 장기화하는 전쟁을 버티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휴전 논의는 휴전과 함께 확정되는 경계선과 포로교환으로 인해 쉽지 않았다. 마침내 경계선은 협정 체결당시 남북한군 각각의 주둔지로 확정되었지만, 포로교환은 서로의 견해가 엇갈렸다.

공산당 측 포로는 북한군 11만 2000명과 중공군 2만 명으로 합계 13만 2000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반면 아군 포로는 미국 3200명, 남한군 7000명, 유엔군 1600명 등 총 1만 2000명이었다. 포로가 많았던 북한 측은 포로 전원의 본국 송환을, 남한은 남한에서 강제로 징집당해 북한으로 끌려간 젊은이들 때문에 이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석방을 주장했다. 이 문제로 휴전협정이 장기화되자 미군은 협정과정에서 한국 측을 배제하고 협상을 마무리 지으려했다.

당시 휴전협정과 함께 북한의 남침에 대한 확실한 군사적 대책을 확보하고자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비상한 전략으로 이 상황을 타개했다. 협정 논의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새벽 2시를 기해 유엔에서 관리하는 포로수용소의 철책을 끊는 등의 방법으로, 2만 7388명의 포로를 석방시켰다. 6.25전쟁의 종전 이후를 일거에 바꾼 반공포로석방사건이다. 반공포로란 북한 포로 가운데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휴전협정이 어려워진 미국은 이에 분노했지만 특사를 보내 이 대통령과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한국은 한국의 안보를 지킬 수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미군을 한반도에 남겨두도록 하며,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통한 전후 복구사업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이란 묘수로 우리나라는 그 이후 지난 70년 동안 장기적인 평화를 누리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이처럼 6.25전쟁으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은혜를 마련했다. 또 공산주의의 심각한 폐해를 온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그러나 종전 70년이 지나는 동안,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덕분에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한 위험도, 우리에게 허락된 수많은 은혜의 통로도 잊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맞고 있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 시대에 고할 것이니라”(요엘 1:3) [복음기도신문]

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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