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호 / 인터뷰]
46년생.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서울대에서 조선공학을 전공하고 평생을 해군 장교로, 조선공학 교수로, 대학총장으로 학교를 일으키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은퇴 후 60이 넘은 나이에 필리핀에 선교사로 헌신한 후에도 현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회를 세웠다. 최근에는 필리핀에서의 10년을 담아 <시니어 선교사 행전>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지나온 삶에 허락하신 모든 것은 선교의 자원이었으며, 선교는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고, 자신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붓에 불과했다고 고백하는 김재복 선교사를 만났다.
– 늦은 나이에 어떻게 선교사로 나가게 되셨나요?
“은퇴를 앞두고 지나온 삶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남은 인생에서 갚고 싶었어요. 저는 전통적인 유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모태신앙인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불신 사위를 맞을 수 없다는 장모님 말씀에 교회에 나가게 됐죠. 건성으로 1년 반쯤 나가다가 독일 군 연구소로 혼자 유학을 가게 됐어요. 독일에서 어느 날 담임 목사님이 주신 성경을 읽다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는 말씀에 마음이 찡했어요. 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라는 말씀도요. 하나님 사랑이 그렇게 큰가? 싶었죠. 한국에 돌아와서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부임했을 때, 담임 목사님이 일반사회에서도 교수인데 교회 청년부 교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교재를 주셨어요. 모르는 말이 너무 많았어요. 그 6개월이 아마 가장 성경을 많이 본 시기일 거예요. 그 후 군 교회에 출석했는데, 사관생도들에게 복음을 확실히 심어줘야 하는데 군목은 여러 교단에서 올 뿐 아니라, 1년 반, 2년이면 바뀌는 게 아쉬웠죠. 그에 비해 저는 지속적으로 출석을 하니까 교회 사정이나 행사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수석 장로 역할을 했어요. 대령이 되었을 때 목사님이 저에게 장로직을 주셨어요. 그때가 47세였어요.”
성경의 하나님 사랑에 충격
– 비교적 이른 나이에 장로가 되셨네요.
“그렇죠. 해군사관학교 교무처장을 거쳐 150명 정도의 교수를 총괄하고 생도들을 책임지는 교수부장에 대령까지 됐어요. 그런데 대령이 되고 1년이 채 안되었을 때 별까지 달아 제독(육·공군의 장군)이 되었죠. 군 조직은 철저히 계급사회이고 피라미드 구조여서, 모두 다 소령, 중령, 대령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일부만 진급을 해요. 그런데 저는 순적하게 인도하시고 독일과 미국 유학까지 보내주시고 박사까지 받게 하셨어요. 하나님 은혜가 아니면 어떤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았어요. 게다가 군인은 어느 때가 되면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되는데 재취업이 어려워요. 그런데 아직 만 49세에 전역을 하기도 전에 남해에 설립하는 도립대학에 공채 지원을 해서 총장이 되어 연임까지 했으니, 이것도 큰 은혜였어요. 그때 아내에게 말했죠. “여보. 다른 사람은 별도 달기 힘든데 우린 너무 많은 축복을 받았으니 이제는 세상의 감투가 아니라 하나님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하고 말이죠. 아내와 저는 성향이 많이 달랐는데, 이 부분은 딱 뜻이 맞았어요.(웃음)”
– 이후에도 마산에 있는 대학에 계셨다고 책에서 봤어요.
“남해대학 총장으로 7년 반쯤 되었을 때 마산에 있는 창신대학 총장님이 “이제 어쩔 거야?” 라고 물으셨어요. “쉬어야죠.” 했더니, “60도 안됐는데 쉬다니? 우리 학교에 오라.”고 하셨어요. 기독교 학교여서 마음의 결정을 하고, 부총장으로 부임했어요. 여름방학에 교목이 청년부와 단기선교를 다녀오겠다고 해요. 허락을 했죠. 그런데 겨울방학에도, 또 다음 여름방학에도 간다는 거예요. 저는 그때 단기선교가 뭔지도 몰랐어요. 왜 계속 가냐고 야단을 치면서,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 필리핀이라고 했어요. 그 열 몇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먹고 자는 것을 누가 해줍니까? 했더니 현지 선교사님이 하신다는 거예요. 학교에서 학생들을 보내면서 그렇게 신세를 지게 하다니, 반드시 다음에 한국에 나오시면 무조건 채플 강사님으로 모시라고 했어요. 얼마 후 선교사님이 오셨고, 채플이 끝난 후 “한국에 교회도 많은데 왜 하필 선교를 나갑니까? 현지에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렇게 궁금하시면 와 보세요.”라고 하시더군요. 그 순간 가슴에 쿵! 하고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어요.”
“궁금하면 선교지에 와 보세요”
– 주님의 사인이네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집에 가서 아내에게 말하니까. “여보! 바로 그거에요. 우리가 기도하고 있었던 거요.”라고 했어요. 그래! 그게 이거구나! 둘이 가장 마음이 맞은 날이었죠. 아직 임기가 2년이나 남았지만 다음 날 학교에 사표를 냈어요. 그런데 ̒학기중이니 학기를 마치고 가라, 학기말이 되니 학년을 마치고 가라.̓면서 차일피일 미뤄졌어요. ̒이러다가는 못 가겠구나, 결단 안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마음이 들어 후임자도 없었지만 학교를 나와 필리핀으로 정탐을 떠났어요.”
– 직접 둘러보니 어떠셨나요?
“선교사님을 따라 농촌, 산골, 성경공부 하는 곳, 신학교 하는 곳을 보니 언어와 컴퓨터의 필요성을 절감했어요. 무엇이든 선교사님을 돕는 일을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일 힘든 게 뭡니까. 내가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선교사님이 주일 아침 일찍부터 세 지역에 가시는데, 산길을 돌다 오면 마지막에는 파김치가 된다고 하셨어요. 그럼 저는 운전을 해드리겠다고 했죠. 하지만 선교사님은 필리핀에서 제일 귀한 일이 사람을 키우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저에게 교육자의 경험을 살려보라고 했어요. 생각해보니 저는 가르치는 것을 가장 잘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소개받은 학교에 가보니 학생들은 원하는데 할 수 없는 수업이 바로 한국어였어요. 한국에서 정식 교수를 한 사람이, 그것도 원어민이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하니 다들 대환영이었죠.”
– 어떻게 수업을 시작하셨나요?
“정탐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서 외국인에 대한 한국어교사 자격증 이수를 했어요. 그때가 필리핀에 한류바람이 불고 있을 때여서 다들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많았죠. 파송받아 현장에 가보니, 저에 대한 기대가 컸어요. 군인 출신으로 교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특강을 해달라, 정규 담당교사를 해달라 부탁이 왔죠. 선교사가 부탁하면 제 스케줄을 어떻게 조정해서라도 무조건 갔어요. 그 지역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학교는 다 가본 것 같아요.”
– 책에는 주일학교 이야기도 있던데요.
“필리핀에 간 지 3일 째 되던 날, 어딘지도 모르고 선교사님 차에 실려 농촌마을을 가게 됐어요. 어린아이들이 거리에 한 가득 있었어요. 한 집에 보통 아이들이 네다섯 명 있다고 했어요. 우리나라 60~70년대 분위기였죠. 이 교회는 주일학교가 없냐고 물었더니, “예배시간도 조정해야 하고, 집기들도 필요해서 주일학교가 없는데, 장로님이 하시겠습니까?” 하더군요. 청년들이 있으면 좀 붙여 달라고 했더니 7~8명이 왔어요. 한국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니 다들 좋아했어요. 필리핀 청년들은 한국에 취업하려고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데 비싸거든요. 그렇게 한국어를 가르치다가 얘기했죠. “한국 가서 돈 버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정말 복이다. 내가 주일학교를 하고 싶은데 너희들이 교사를 하면서 나를 도와줄래?” 그랬더니 다들 좋다는 거예요. 시내에 가보니 의외로 주일학교 교재도 아주 많았어요. 학용품과 사탕을 나눠주니 아이들이 오픈예배에 100명씩 몰려왔어요. 주일에는 40명이 왔고요. 다들 기뻐했죠. 그 교회가 삐아스교회에요.”
– 그냥 순종하니 교회가 생기는군요.
“또 다른 교회 이야기도 있어요. 처음 필리핀에 갔을 때 잠시 골프를 쳤어요. 그때 교회 다니는 캐디를 만났는데, 화산 난민촌에 있는 자신의 교회를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필리핀에 큰 화산 폭발이 있었는데 그때 난민이 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어요. 아이들이 예배시간에 떠들지 못하게 하는 게 자기 일인데, 아이들에게 줄 그림 그릴 종이와 크레용이 없다는 거예요. 그 얘길 듣는데 너무 도와주고 싶었어요. 얼마 후 예고도 없이 찾아가 봤어요. 난민들이 비좁게 모여 사는 수용소 마을에 겨우 집 한 칸을 교회로 쓰고 있었어요. 그런 처지니 주일학교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분위기였죠. 그곳은 처음 갔던 마을보다 아이들이 더 많았어요. 삐아스교회에서 30분 정도 거리여서, 그 교회 청년들에게 다시 부탁을 했어요. 청년들은 교회학교가 시작된 지 1년 만에 우리가 교사를 하게 됐다고 뿌듯해했어요. 그렇게 생긴 교회가 로스(ROS)교회에요. 삐아스교회 예배가 끝나면 아내가 싸 준 샌드위치를 나눠 먹으면서 로스교회에 갔어요. 그곳에도 청년 2명이 있었는데 삐아스교회 청년들을 잘 보고 배우라고 했어요. 양쪽 교회 청년들 모두 더 빨리 배우고, 믿음이 자라갔어요. 로스교회의 첫 성탄절은 처음으로 성탄 발표회도 하고 다들 너무 기뻐했어요. 얼마 후 교회가 비좁아서 더 이상 예배를 볼 수 없어서 넓히고 더 넓혔어요. 이런 일을 보니까 사역이 너무 기쁘고 힘든 줄을 몰랐죠.”
– 그런데 어떻게 한국으로 다시 오게 되셨나요?
“선교사들 따갈로그어 현지 스터디그룹과 현지 학교를 맡아 교장으로 섬기고 있던 때였는데, 2018년 12월에 목회자에게 현지 사역을 다 넘기고 들어왔어요. 처음 필리핀에 갈 때는 뼈를 묻으려 했으니 오기 싫었죠. 건강도 문제없고, 할 일도 많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 많았어요. 그런데 한국교회의 담임 목사님 권유로 여러 가지 교회의 필요도 있어서 돌아오게 됐어요. 그런데 와서 보니 더 중요한 것이 시니어 선교를 일으키는 것이었어요.”
“한국에서 하던 일을 선교지에서 하면 돼요”
– 시니어 선교에 대해 좀 더 들려주세요.
“지금 우리나라 젊은 세대의 선교사 헌신율은 떨어지고, 시니어들은 늘어나고 있어요. 그러면 손 놓고 젊은 사람만 기다릴 것인가? 아니죠. 우리나라 평균 55~6세가 정년이에요. 아직 일할 나이인데 재취업은 쉽지 않죠. 자영업을 해도 성공이 쉽지 않죠. 갈수록 위생과 영양은 좋아져서 이제는 100세 시대인데, 50세 후반에 은퇴하고 남은 3~40년을 어떻게 사느냐 이거죠. 보통 사람들은 건강관리하고 친구 만나고 여행하고 살겠지만, 크리스천은 주님이 그때까지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싶은 거룩한 부담이 다 있어요. 그럼 무엇을 할 것인가? 선교에요. 선교가 가장 좋은 답이에요. 대부분 선교지는 한국보다 생활비가 적게 들어요. 한국의 80% 정도면 생활할 수 있지요. 그러면 한국에 비해 남는 액수만큼만 사역한다는 생각을 하면 돼요. 하지만 제가 나가보니 주님은 내가 생각한 만큼만 하라고 하는 분이 아니었어요. 가족들이 주는 작은 용돈. 선교지를 위해 내어놓는 성도들의 작은 헌금. 그런 재정을 현지 학생 몇 명의 장학금으로 써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어요.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처럼 너도 나중에 돕는 사람이 되라고 하며 지원해요. 그렇게 하면 시니어가 못할 일이 없어요. 선교지에 가서 또 뭘 하나? 은퇴할 때까지 했던 일을 선교지에서 하면 돼요. 한국에서 했던 일은 선교지에도 다 필요하죠. 두려워할 것이 없어요. 선교사 한 명이 열심히 하는 것보다 열 명의 선교사를 가르쳐 보내는 선교사 동원훈련. 아, 그게 맞구나 싶은 마음에 한국에 오길 결정했어요. 책도 그런 의미에서 썼어요.”
<이상 221호에 게재>
– 선교동원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교회에서 50대쯤 되면 예배드리고 밥 먹고 세상 염려하다가 집에 가요. 교회가 노년의 친교의 장처럼 되어버린 거죠. 그런 사람들을 주님의 일꾼으로 드리기 위해 GP선교회에서 시니어 선교담당직을 주셨어요. 1년에 두 번씩 ‘아름다운 선교이야기’라는 행사를 통해 지역교회를 순회하며 은퇴자들이나 예비 시니어 은퇴자들을 만나요. 수요예배나 장년 수련회도 참여하고요. 사실 5년 후에나 은퇴를 준비한다고 해도 긴 시간은 아니에요. 은퇴 이후의 제2의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또 본인이 원하고 기뻐해야 하잖아요. 성취감과 체력과 건강의 부담도 있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바로 선교라고 하면 과연 그런가? 라고 되물어요. 다들 건강을 많이 생각하죠.”
– 선교사님은 건강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에게 나이가 몇이세요?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냥 웃고 말지요. 필리핀에서 주일학교 아이들과 같이 찬양하고 율동하면 너무 재미있어요. 청년부 열린 예배에 가면 또 격하게 찬양과 율동을 해요. 수요예배, 금요예배 있죠, 토요일에는 연습하죠. 그러다보면 일주일 내내 율동과 찬양을 해요. 찬양을 하면 기쁘고, 엔돌핀이 나와요.(웃음) 그것만큼 건강유지 하는 게 없어요. 그 나라 말은 몰라도 찬양은 할 수 있거든요.”
– 선교동원이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반응은 어떤가요?
“지금은 씨를 뿌리는 시간 같아요. 선교는 사명을 받은 소수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매주 예비역 조찬기도회에 나가는데, 거기 오시는 목사님들도 어떻게 해야 선교사가 됩니까? 라고 물어서 놀랐어요. 신학까지 하신 목사님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데, 평신도들은 정말로 알 방법이 없죠. 군인, 소방, 경찰, 교정과 같은 특수직 공무원 출신들은 아프리카나 이슬람 같은 어려운 선교지에 정말 좋은 자원이 될 수 있어요. 이미 준비돼 있는데 어떻게 가는지 모르기 때문에 못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어요. 누구를 만나야 그 길을 알 수 있나? 했을 때, 그 일을 누군가 해야죠.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아니겠어요? 저를 보면 제 인생에 주신 모든 경험이 선교의 자원이 되고, 또 주님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미리 트레이닝을 시켜주시기도 했어요.”
인생의 모든 경험이 선교자원
– 구체적인 사례를 들려주세요.
“로스교회가 시작 된 후 1년 정도 되니 필요한 집기들이 생겼어요. 어떤 집이 이사를 하면서 가구와 집기를 내놓는다는 소식을 듣고 갔어요. 이거 왜 팝니까? 물으니 선교사인데 뇌가 아파서 한국에 가서 최소 1년은 휴양을 해야 한다더군요. 저희가 살던 집보다 더 싸고 시원한 집이었어요. 그 집을 인수 받고 “다 해결됐습니까?” 물으니, 교회를 세워놓았는데 1년 휴양기간 동안 믿고 맡길 사람이 없다고 하셨어요. 저는 목회에 욕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평신도니까 반드시 1년 후에 다시 교회를 돌려드리겠다고 약속했어요. 하나님의 교회인데 내 것이 어디 있겠어요? 성도가 100명 정도였으니 필리핀에서 작은 교회는 아니었어요. 그때가 연말이라 성탄행사, 새해 재직임명, 결산·예산편성, 주일학교 교사배치, 체육대회 등 각종 행사를 그 자리에서 다 배우며 했어요. 그러면서 담임목사의 일을 배우게 됐죠. 아침에는 로스교회, 점심에는 또 다른 교회. 그렇게 두 군데를 섬겼죠. 그런데 예배에서 현지인 말을 알아듣지 못해 답답하기도 해서 아내와 주변에 있는 한인교회 새벽예배에 나갔어요. 그런데 그 한인교회가 한 달 후쯤 풍비박산이 났어요. 교인들이 거의 나가고 청년들 20~30명이 남았어요. 그 교회 장로님이 이 청년들을 붙들어야 한다며 찾아왔어요. 먼저 두 군데 교회가 끝나고 오면 오후 1시 반쯤 돼요. 얼른 점심을 먹고 바로 한인교회 예배에 가면서 한동안 세 개의 교회를 섬겼어요. 바쁘기도 했지만,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어요.”
– 10년의 선교기간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신 말리왈루 교회는 어떤 곳인가요?
“그 교회는 한 여자 선교사님이 혼자 5년 정도 토요일마다 급식사역을 하던 시골마을에 있었어요. 제가 주일학교를 섬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선교사님이 어느 날 찾아오셨어요. 주님께서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하게 하라는 마음을 주셨다고요. 선교사님 부탁이니까 또 갔죠. 빈민마을 목공소 추녀 밑에 어린 아이들 20명 정도가 있었어요. 한 모녀가 찬양을 인도하고, 끝나면 닭죽을 주는 거예요. 토요일마다 세 번을 갔는데, 이 사역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선교사님은 본래의 교회 사역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네 번째 방문부터는 제가 아예 맡아서 했죠. 마음 다해 섬긴다는 걸 아이들이 느끼고 언니 누나 오빠를 데리고 왔어요. 조금 있으니까 어른들이 기웃거리고, 점점 인원이 늘어났어요. 찬양을 인도하던 모녀도 신실했어요. 할 수 있다면 주일로 옮겨서 주일 개념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면 좋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 주일 오후에 시간을 잡아 교회 사람을 붙이고, 악기를 가져오고 찬양을 시작했어요. 보통 필리핀의 예배는 찬양을 20~30분씩 하고 시작하니까 악기를 목공소 추녀 밑에 보관하고, 그곳이 말리왈루 구락부니까 말리왈루 교회라고 불렀어요. 2012년 10월 28일에 그렇게 예배를 열었죠. 그런데 햇빛이 나고 비가 오면 피할 곳이 마땅찮았어요. 그걸 고민하고 있을 때 2013년 2월 한국에서 두 선교팀이 방문했어요. 평소에는 닭 한 마리를 죽으로 해서 40명이 먹었는데, 열 마리를 잡아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먹었어요. 그날 그 팀의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이곳에 교회를 세웠으면 좋겠다면서 큰 재정을 내시겠다고 했어요. 안되면 장기를 팔아서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 개의 장기를 주신 것은 하나가 없어도 살 수 있게 만드신 거라고 하면서요. 나는 현지 담당 선교사이고, 이 분은 잠시 왔다 가는 분인데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나? 순간 가슴이 뭉클하면서 더 전심으로 하지 못한 태도에 대해 회개했어요.”
순종하다 보면 교회가 세워졌다
–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 정말 크셨나보네요.
“2주 후에 또 다른 선교팀이 왔는데 그분들도 예배 후 이곳에 교회를 세우라는 감동을 주님이 주셨다며 재정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거예요. 우리는 교회 지을 부지도 없고 건축 계획도 없다고 거절했지만, 한국에 다녀오더니 정말 약속대로 큰 재정을 가져왔어요. 그때 처음 그 마을에 급식을 하셨던 여자 선교사님이 다른 교회의 건축을 위해 사둔 부지가 있다며 땅값도 받지 않고 선뜻 내어주었죠. 확보된 재정으로는 교회를 건축하기에 부족했지만, 조선공학을 공부하며 배를 만들던 기억으로 목공소를 하던 형제와 교회를 설계했어요. 주님은 부족한 재정도 생각하지 않은 통로를 통해 채워주셨어요. 제 파송교회에서 언젠가는 저희가 필리핀에 교회를 지을 것이라 생각하고 건축헌금을 모으고 있었다는 거예요. 저는 아예 말도 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주님은 그 교회를 기도로 완성하게 하셨고, 나중에는 오히려 재정이 남아서 식당과 수세식 화장실을 짓고, 급수도 자동 전동모터로 해서 동네에서 제일 좋은 건물이 되었어요. 바닥이 타일로 된 건물은 처음이어서 다들 신발을 벗고 들어왔어요.(웃음) 그렇게 10년 필리핀 사역 중 말리왈루 교회가 저의 목회의 주사역지가 되었죠.”
– 주님의 인도하심이 정말 놀랍네요.
“저는 선교지에 와서 뭘 하겠다는 계획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 주님이 트레이닝을 시켜주시고, 필요한 곳에 저를 부르셨어요. 선교지에 갈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작은 빈 도화지를 들고 갔는데, 10년 후에는 큰 캔버스에 꽉 찬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어요. 그 그림은 하나님이 그리셨고 나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붓에 불과했어요.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김재복만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은 누구에게라도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하시는 일이에요.”
나는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붓
– 어떻게 모든 것에 그렇게 순종이 가능하셨나요?
“저는 평신도로 선교사 훈련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조건 ‘선교사를 돕는다.’는 마음밖에 없었어요.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죠. 최근에 누군가 제게 ”시니어가 선교지에 나간다면 선교지에서 좋아할까?” 물었어요. 당연히 싫어하죠. 나이는 많지, 물정은 어둡지, 전기·수도 연결, 자동차, 보험등록, 주소지 옮기는 일… 한국처럼 전화 한 통으로 되는 곳이 아니에요. 하나에서 열까지 이런 저런 도움을 안 받을 수 없는데 바쁜 선교사가 이것까지 챙겨주려면 며칠은 허비해야 해요. 그래서 저는 “밥 잘 사주는 시니어가 돼라, 입을 다물고 지갑을 열어라.”고 해요. 두세 배 감사를 표현하는 거죠. 시니어 선교사는 현지에서 낮은 자세가 필요해요. 뭔가 도움을 원하면 도와주고, 열심히 하면 시니어도 할 일이 많아요.”
– 마지막으로 기도제목을 나눠주세요.
“지금 75세인데 아직도 할 일이 많아요.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될 수가 있어요. 그 일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못할 뿐이죠. 저에게 주신 사명은 시니어 선교사들에게 주님이 저에게 먼저 걷게 하신 길을 조금이라도 알려주는 거예요. 하나님께 지금까지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하면서 쓰임 받아야 할 사람들, 원자재는 많이 있는데 누군가 조금만 만져주면 좋은 부가가치를 가진 자들이 한국사회에는 넘쳐나요. 그런 분들이 이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섬기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체력이 허락되었으면 하고, 교만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추스르고 다스리기 바라요. 잘났다 건방지다 소리 안 듣도록, 낮아지고 겸손하게 섬기고 싶어요.”<끝> [복음기도신문]
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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