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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됐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 만난 이수길·맹광숙 선교사 부부


[205호 / 인터뷰]

3대째 모태신앙 가정에서 태어나 6·25전쟁 후 50~60년대 한국에 온 외국 선교사들의 삶을 가까이 보면서 자랐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기업 임원으로 살면서 80~90년대 대한민국 정치·경제의 굵직한 역풍이 불 때 TV뉴스에 등장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 책이라 해도 좋을 만큼 사건 많은 인생의 1막이 끝나고 나이 60에 인도에 파송되어 11년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수길·맹광숙 선교사 부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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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길 선교사(이하 이): “어머님이 성악을 하셨어요. 함흥 영생여고, 이화전문학교 음대를 나오셨지요. 모두 크리스천 학교죠. 6·25전쟁이 끝나고 음악 선생님을 하셨는데 찬양단을 조직해서 미군부대 위문공연을 다니셨어요. 그때 숙명여고, 동덕여고 같은 학교들이 다 천막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미8군에서 지원을 받아 학교 건물 짓는 일을 많이 하셨어요. 선교사님들도 집에 자주 초대하시고 사령관들도 많이 오갔죠. 선교사님들을 쫓아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롤러스케이트, 초콜릿, 치즈, 양복… 그 당시 미군부대에서만 나오는 걸 많이 접했어요. 선교사님들 덕을 많이 봤죠. 그때가 50~60년대 초에요.”

– 교회 울타리 안에서 성장하셨네요.

이: “그런데 제 믿음은 별로였어요. 대학 때 교회와 멀어지고 사회에서 잘 나갔죠. 진급도 빨라서 40대 초반에 임원이 되는 바람에 신문에도 났어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처럼 지내면서 한 달에 두어 번 교회에 가고 술 담배도 다 했어요. 얼마나 엉터리였냐면, 기사가 예배 끝나고 데리러 오면 차 안에서 바로 담배를 폈어요. 썬팅이 돼있으니까 안보이잖아요. 술도 보통 사람이 평생 먹을 걸 젊을 때 다 마셨어요.”

모태신앙이지만 교회와 멀어져

– 다음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궁금하네요.

이: “그런데 90년대 말 금융위기(IMF)가 왔습니다. 큰 자회사가 17개 정도 됐는데 건설은 중동에서 망하고, 연달아 하나씩 쓰러졌죠. 그때 등기이사들이 몇 조(兆) 단위의 회사 빚보증을 섰는데, 대검찰청에서 연대책임을 물었어요. 제 개인변상만 1080억이었습니다. 회사가 공중분해 돼버린 거죠. 변상할 수조차 없는 금액이어서 차라리 걱정도 안 됐어요. 그때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녔어요. 재판을 한 4~5년 했는데, 저는 은혜로 무죄 판결을 받았어요.”

– 역시 고난이 유익이네요.

이: “그때까지 그런 상황이 크게 고난이라고는 생각이 안됐어요. 제게 가장 큰 고난은 2004년에 딸이 둘째 아이를 잃었을 때에요. 심장이 없이 태어나 17일 만에 하나님이 데려가셨죠. 사위와 딸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어떤 위로도 할 수 없는 게 고통이었어요. 그때 딸은 인도 선교사로 나간 지 7년째였는데, 저렇게 헌신했는데 왜 이런 시련이 온 건지 주님께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어요.”

– 사모님은 어떠셨나요?

맹광숙 선교사(이하 맹): “저희 부부가 74년에 결혼했어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기독교 울타리에서 지냈지만 믿음은 없었어요. 기독교 집안과 만나 결혼한 건 은혜였어요. 하지만 세상적으로 잘 갖춰져 있었어도 행복하진 않았어요. 하나님이 주신 목마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30대 후반부터 여러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일었어요. 그 첫 번째가 남편이 직장문제로 구치소에 간 일이었어요.”

경제사범으로 구치소에 가다

– IMF 체제 당시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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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 “그전의 일이에요. 89년 무렵이었어요. 당시 정권이 바뀌면서 남편의 회사가 표적이 돼서 수사 도중에 100일 동안 구치소에 갔었죠. 그게 제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이: “맞아요. 그때 저는 특별한 경험을 했죠. 감방장이 전과 12범이었는데 제가 전도를 하기도 했어요. 경제사범인 제가 TV에 등장하다보니 구치소에 있던 사람들이 구경하러 오고 그랬죠. 사형수들이 있었는데 회사에서 영치금이나 물품을 넣어주면 다 나눠줬어요. 저는 미결수라 구치소 내 교회에 못 갔지만, 주일예배를 권했는데 그들은 가더군요. 감방장은 나중에 출소해서 신학대에 갔어요. 그 무렵 제가 돕기도 했는데, 그는 결국 목사가 됐어요. 전 사실 그 기간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어요.”

맹: “저는 힘들었어요. 그런 곳은 범죄자만 가는 곳인데,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충격이었어요. 아침에 출근한다고 나간 사람이 바로 끌려갔으니까요. 그렇게 당당하시던 시어머님도 식물인간처럼 병원에 누워계시던 상황이었어요. 친정어머니도 아프시다 돌아가신 후였어요. 너무 큰 아픔이었어요.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어요. 저는 학교 교사였는데 퇴근 후 금요철야에 가고, 성경필사도 했어요.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주셨어요. 딸이 제게 ‘엄마 많이 변한 것 같다’고 했죠. 그 사이 40대가 되었고, 어느 날 20살이 된 딸이 선교사로 헌신을 했어요. 기대했던 딸이 헌신한다고 했을 때 마음이 쉽지 않았어요.”

– 두 분 다 어려우셨겠네요.

이: “전 괜찮았어요. 아이를 신뢰했으니까 오케이 했지요.”

맹: “세상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던 우리는 어린 딸을 통해 순수한 믿음을 보게 됐어요. 결국 축복하고 인도로 보낸 딸이 선교사와 결혼하고, 아들도 누나처럼 변하고 싶다면서 인도로 따라갔어요. 딸이 ‘엄마도 보내는 선교사에요’라고 했을 때 저는 ‘NO’라고 했어요. 너 하나로 족하다, 나는 교회에서 훈련받고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어요. 남들이 보기에도 좋은 크리스천 가정이었으니까요. 그 사이 50대가 되고, 두 번째 고난 IMF가 닥쳤어요.”

– 그 고난은 어떤 의미셨나요?

맹: “제게 재정적 고난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안했어요. 남편이 직장을 잃고, 새롭게 시작한 사업이 실패하고, 가산이 전부 날아가고… 그리고 딸의 둘째 아이가 떠났어요. 재산이 없어져도 버티는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절망이 허락된 거죠.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컸어요. 딸의 고통을 지켜보는 건, 부모로서 정말 어려웠어요. 기독상담을 배우고, 훈련단체에 한동안 집을 통째로 내주기도 하고, 10년 동안 해외파송 한국 선교사님들을 섬기는 한 선교회를 섬기면서 나름 믿음으로 사는 삶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뛰어넘길 원하셨어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남편은 뭔가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마음이 남아있었어요. 딸이 ‘아빠, 노력으로 안돼요. 하나님께 엎드려야 해요’라고 했을 때 살짝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 노력이 아닌 은혜가 필요한 때가 그때였어요. 믿음으로 변화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할 때 제주도로 6개월 제자훈련과정을 가게 됐어요.”

– 이 선교사님도 그런 간절함으로 가셨나요?

예기치 않은 선교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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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는 딸이 부탁을 해서 갔어요. 아이를 잃은 딸을 위로할 수 있다면 뭐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죠. 제자훈련이 뭔지도 몰랐고, 제주도에서 여행도 하고 주일에는 서울에 와서 일도 볼 수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지요(웃음). 제주도에서 둘이 아주 처절하게 싸웠어요. 그때 복음을 조금 알게 된 것 같아요. 6개월 후 교회에 돌아왔더니 선교사 되려고 훈련받고 왔다는 소문이 나 있었어요.”

맹: “끝없는 다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2005년에 훈련이 끝나고 돌아왔지만, 재정이나 상황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막막하고 소망이 없었죠. 그럴 때 딸이 아이를 입양하게 됐어요.”

이: “입양을 위해 딸과 사위가 인도에서 나왔는데, 태어난 지 한 달 된 그 아기가 천사 같았어요. 우리 부부가 손주들 봐주러 6개월 정도 인도에 갔는데, 벵골에서 6주 동안 리더훈련도 받았어요. 저는 MK(선교사자녀) 아기돌봄이를 했는데 거기서 잘 놀았지요(웃음). 식사로 풀빵 같은 것 하나에 늘 같은 음식이 6주 동안 나오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여기서 평생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도 선교사까지는 생각 안했어요.”

– 그런데 어떻게 인도에 갈 결심을 하셨나요?

이: “10년 동안 섬기던 선교회의 목사님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인도와 몽골에 선교사를 보낼 마음을 주셨다고 말이죠. 우리가 아주 적임자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선교자금도 약속했어요. 다니던 교회 목사님과 상의하고 파송식을 아주 거창하게 하고 나갔어요. 인도에 딸 옆집도 계약했어요. 그게 2008년이에요. 그런데 영 다른 상황이 펼쳐졌어요. 우리가 인도에 간지 2~3개월 만에 딸과 사위가 안식년으로 한국에 갔다 왔는데, 갑자기 완전히 철수를 한다는 거예요. 약속한 선교헌금도 줄어들더니 고작 3개월 만에 소리 없이 끊어졌어요. 헌금을 약속했던 교회가 미국에 있었는데, 미국에 불황이 닥친 거죠. 하나님께 기도하니 이런 마음을 주세요. ‘너 같은 녀석이 그냥 선교사 나가라고 했으면 갔겠느냐? 그 돈을 믿고 나간 거지’(웃음). 하나님 앞에 인정이 됐어요. 그리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목사님을 사용하셔서 나를 불러내셨구나…. 그 이후도 정말 드라마 같은 시간이 이어졌어요.”

<이상 205호에 게재>

맹: “선교사로 나갔지만 영혼에 대한 뜨거운 마음 같은 건 사실 없었어요. 이 땅에서의 삶이 막막해서 떠난 것도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의 죄성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릴 선교지로 보내기 위해 두 가지를 사용하신 거죠. 재정적인 것과 자식에 대한 애착이요. 그런데 가자마자 모든 걸 끊어버리시고 주님만 의지하게 하신 거예요. 딸이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물을 때 인도에 남겠다고 했어요. 담대함이 생겼어요.”

– 하나님의 계획이 절묘하네요.

맹: “그래도 처음엔 너무 두려웠어요. 힌디어는 배우기가 어려워서 말도 안통하고, 시장에 뭘 사러 가도 힘들었죠. 인도 사람들이 이방인인 날 해칠 것 같기도 했어요. 그때 하나님은 우릴 통해 저들을 변화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계획이 있으시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리에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우린 인도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한국에서 나름 살 수 있는 조건들을 다 끊어놓으시고 이곳에 부르셔서 주님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허락하셨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았다는 것을 딸의 두 번째 헌신을 통해 알았어요.”

– 두 번째 헌신이요? 좀 더 얘기해 주세요.

이: “인도는 비자갱신 때문에 정기적으로 한국에 나와야 했어요. 그때 복음학교에 가게 됐죠. 인도에서 철수한 딸과 사위가 먼저 복음학교를 하고 권해서 우리도 가게 된 거에요. 그러면서 또 그 단체에 헌신을 하겠다는데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거예요. ‘9년이나 인도에서 선교사를 했는데, 그 뭐하는 곳인데 너희들이 떨어지냐’ 싶었어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통장을 다 정리하고, 차도 팔고, 모든 걸 다 없애고 헌신했어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됐어요.”

맹: “두 번째 헌신을 하고 딸이 훈련기간 중 막내를 낳았어요. 그런데 딸 얼굴도 못보고, 우리에게 아무 도움도 안 받겠다고 했을 때 참 힘들었어요. 왜 이렇게까지 다 버리고 헌신해야 하는지… 딸은 ‘엄마, 세상의 행복은 잠깐이고 영원한 천국이 있어요’라고 했죠. 사실 딸은 인도에서 철수할 때 심한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었어요. 아이를 잃고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았지만 견디기 어려운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거예요. 인도에서 철수해야할 만큼 영혼이 고갈된 상태에서 복음 앞에 섰고, 십자가 복음으로 회복되어 다시 헌신을 하게 된 거죠. 지금은 다 이해가 됐어요. 돈으로, 보이는 것으로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지금은 아이들이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고, 믿음으로 사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너무 좋아요. 자식을 신뢰하고, 자녀가 말하는 믿음의 걸음에 동의가 돼요.”

자녀들의 과격한 헌신에 도전과 충격

– 그리고 훈련을 받으셨나요?

이: “2010년에 비자갱신을 하러 나온 기간에 복음학교에 참석했는데, 일주일 동안 복음을 들으면서 큰 감흥은 없어도 재미가 있었어요. 졸리지도 않았어요. 또 듣고 싶은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그 다음에 섬김이로 한 번 더 갔을 때 심령이 깨졌어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마음에 들어왔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 말씀을 찬양으로만 좋아했는데, 실은 내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사실 저는 그저 인간적인 선함으로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기 때문에 죄인의 실체를 잘 몰랐어요. 처음 복음학교 훈련생으로 갔을 때 ‘죄 된 나의 실존’를 기록하는데, 하얀 A4 종이 한 장을 놓고 아무 것도 쓸 죄가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옆 사람 쓰는 것을 슬쩍 들여다볼 정도였죠. 그 후 매년 한국에 올 때마다 조장으로 섬기면서 복음을 계속 들을 수 있었어요. 갈 때마다 더 깨지고, 깨지면서 십자가 복음이 리마인드 되고 환기가 되었어요. 말씀이 안 들어오면 쉽게 무너지니까요. 나중에는 A4 용지에 죄를 한 장 쓰고도 모자라 한 장 더 달라고 했어요(웃음).”

– 인도의 사역은 어떠셨나요?

이: “딸과 사위가 하던 캠퍼스 사역을 받아서 계속 했어요. MK사역, 선교사 케어도 하고요. 우린 C지역에 있었는데 북부 지역에 있는 선교사들이 경유해서 머물다 갈 수 있는 곳이었어요. 상담사 자격이 있는 아내가 선교사들의 상담도 하고, 선교사나 사람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연결해서 보내주는 창고 같은 역할을 했어요. 네팔 출신의 동역자가 한 명 있었는데 나중에는 목사가 돼서 네팔교회를 개척했죠.”

맹: “우리 같이 나이든 사람들은 선교사들 사이에서 중간역할을 할 수 있어요. 사실 선교지로 나와서 부부끼리, 선교사들끼리 관계가 어려울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우린 편안하게 들어줄 수 있는 상대가 되고, 또 중간에서 조언이나 권면을 해도 어렵지 않은 연배였던거죠. 그러면서 복음을 나누고, 위로해주고, 공동체로 기도하며 연합했어요. 아웃리치 팀을 받고, 선교사 헌신을 하고 인도에 온 청년 선교사들도 케어했죠. 힌디어는 아주 기본적인 생존언어 정도밖에 못했지만 인도는 영어가 통하니까 크게 어렵진 않았어요. 여름이면 45~46도까지 기온이 올라가는데, 감사하게도 11년 동안 크게 아프지 않게 해주셨구요. 한국에 온 지는 이제 두세 달 정도 됐어요.”

실버 선교사의 삶

– 한국은 어떠신가요?

이: “한국 오니까 겁이 나더군요. 지하철 타는 것도 서툴고, 보이는 유혹이 너무 많았어요. 다 거절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로 들어왔어요. 이곳에서도 선교사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요. 어디에 살든 선교사의 끈을 놓지 않아야죠. 서울에 있으면 세상 접촉을 많이 할 것 같아서 내려온 이유도 있어요. 이 집은 마지막 정착지이기도 하지만 섬기기 위해 마련해 놓으신 곳이에요.”

맹: “이 집에서 인도에서처럼 선교사님들을 섬기고 싶어요. 하루든 이틀이든 선교사님들이 오시면 지낼 수 있도록 작지만 방도 만들었어요. 그렇게 건강이 허락되는 한 섬기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기도제목을 나눠주세요.

이: “섬기는 사역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도록, 모든 일에 주님이 동행해 주시길. 그리고 건강주심에 감사하고, 가장 감사한 것은 우리 아들, 딸이 하나님 일 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게 가장 감사해요.” [복음기도신문]

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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