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새벽을 깨우리라 (3)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는 다윗의 사자후(獅子吼)가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우리가 당하고 있는 처지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털썩 주저앉을 만큼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안 보인다. 이 나라 헌정사에 크고 작은 위기들이 있었지만 작금의 사태는 그 어떤 위기와도 비길 수 없을 만큼 내외적인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 막막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우파도 좌파도 아니었다. 양편 모두에게 미움을 샀다. 다윗처럼 우리의 싸움은 양편 모두에게 미움을 산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라! 역사의 진정한 통치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사회주의는 종교를 가리켜 ‘인민의 아편’이라 말한다. 시작부터 하나님은 없다. 그렇다고 자유민주주의의 다수결이 진리일 수도 없다. 다윗이 당했던 일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영적인 문제였다. 이 땅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영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깨어서 기도하는 크리스천이 마지막 보루(堡壘)인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가진 교회가 아니면 누가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에겐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기준이 있다.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강요받는 이 시기에 역사의 운명을 쥐고 있는 교회가 깨어 일어나야 한다.
기도하는 크리스천이 마지막 보루
한낱 정치사상적 개혁으로는 세상을 못 바꾼다. 생명의 역사가 아니면 어림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집어삼킬 것처럼 요동치는 인생들의 역사를 비웃으신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 2:1~4)
하나님의 통치는 햇빛이 비치는 곳마다 대대에 미친다.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사람만이, 역사의 대주재(大主宰)이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캄캄한 절망의 흑암에 침몰당하지 않고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왕의 기세가 아무리 등등해도 역사의 결론은 하나님께 있다.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던 사울 왕은 결국 귀신들려 미쳐 죽었다. 사울만 그러한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역사를 혼돈케 했던 히틀러, 마오쩌둥, 일본 천황과 같은 악인들의 최후 또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의심, 분노, 낙담, 두려움, 미혹의 안개와 같은 혼돈과 암흑의 상황에도, 어찌할 수 없는 강요된 상황에 놓였다 할지라도 다윗처럼 용감하게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내며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노래하라!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악은 반드시 악으로 드러날 것이며, 심판 받을 것이다!”
(2017년 3월)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용의 선교사(순회선교사. LOG미션 대표)
<저작권자 ⓒ 복음기도신문 > 본지 기사는 열방을 품고 기도하는 분들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출처 [복음기도신문]을 밝히고 사용해주세요. 활용하신 분은 본지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연락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