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헌신을 결정하면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모세처럼 긴 시간을 광야에서 보내게 하셨다. 그는 이제 고백한다. “제가 누군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아이 셋을 낳고, 기다림에 지쳐 흔들릴 때 “주님, 저 불러주신 거 맞아요?”라고 묻기도 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정말 주님이 부르셨다면 그 길을 가게 하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김사원 형제를 만났다.
“저는 불교집안에서 자랐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 고부갈등을 겪으시던 어머니께서 옆집 아주머니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시면서 저도 같이 다니게 됐죠. 그런 집안 분위기에서 제게 가위눌림이 계속 있었어요. 교회에서 사탄이 있다는 것을 들었고, 예수님 이름으로 선포하면 그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단순하게 선포했는데, 놀랍게도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알게 됐죠.
그리고 저희 가정은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교회에 다니며 착한 사람인 척하고 자랐어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죄인이었어요. 아이들끼리 모여서 어른 흉내를 낸다면서 고스톱도 치고, 교회 수련회에 가면 회개하고, 그렇게 유년기, 청소년기를 보냈어요”
하지만 그는 대학시절에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원하는 대학에 떨어지고 원하지 않는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운동권 학생들과 어울려 3년 가까이 학생운동에 관여했다. 그런데 양심으로는 올바른 말을 하지만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황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삶을 갈구하게 된 것이다.
학생운동에도 관여했지만…
“운동권 동아리에서 좋아하던 자매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사람들과 멀어지고, 군입대가 현실로 다가와 휴학을 하고 집에만 있었어요. 어머니께서 그냥 내버려두면 안되겠다 싶었는지 수요예배, 금요철야에 저를 데리고 다니셨어요. 그때 하나님이 저의 죄된 실체를 보게 해주셨어요. 내가 그 자매를 좋아했던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깨닫게 됐어요. 그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을 드렸어요”
군대에 가서도 그 은혜는 지속됐다. 제대 후 교회에서 청년들이 사역에 지쳐 빈자리가 생길 때면 그곳에서 봉사했다. 그 시간이 좋았다. 찬양을 드릴 때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친구와 교회에서 아예 살았어요.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자 집에서는 아예 신학을 하라고 하셨죠. 사회에 나가 어떻게 살지 기도하는데, 어떤 분이 제게 목회자의 길이 맞는 것 같다며 목사님이 돼야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그 말, ‘대접받을 수 있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더군요.
그러다 평소 믿음의 교제를 하던 청년부 선배와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어요. 믿음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단한 거죠. 뜻밖의 장소가 허락되고, 청년들이 많이 오가면서 신앙상담을 하려고 방문하기도 하는 열린 공간이었어요. 그 공동체에서 정말 즐거웠어요. 함께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3D업종이었지만 주님께서 주신 일로 여기고 열심히 했어요. 성실하게 하니까 계속 다른 일들이 연결됐고 벌어들인 재정은 선교사님이나 개척교회로 흘려보냈어요. 주님이 우릴 책임지시니까 뭘 쌓아두지 않았어요. 5년 정도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갈급함이 찾아왔어요. 선배의 허물과 잘못이 보이고 분쟁이 생겼어요. 예전보다 현격히 줄긴 했지만 음란에 넘어지기도 했어요. 다니던 대형교회에 대한 판단도 들었죠. 육체노동을 할 때여서 엄청나게 먹었는데도 스트레스 때문에 비쩍 말라갔어요. 나름 믿음대로 산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안 되는지 괴로웠어요”
2009년, 공동체가 마무리되는 시기가 왔다. 아버지께서도 급작스럽게 위암 말기 선고를 받으시면서 임종을 맞으셨다. 모든 게 끝난 듯, 절망이 찾아왔다.
“그 시기에 정말 가난한 마음으로 십자가 복음 앞에 섰어요. 2010년 6월이었어요. 5박 6일간 진행되는 복음학교에 가게 됐고,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이 어떤 죄인을 불러주셨는지 알게 됐어요. 하지만 돌아보면 그때도 존재적 죄인이 어떤 건지 잘 몰랐어요. ‘나의 복음’을 나누는 시간에는 부담을 떨어버리려 빨리 해버렸죠. 하나님 경외하기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던 거죠. 복음은 어마어마한데, 나는 하나님 경외함이 없구나…. 그런 생각이 마음에 도장같이 새겨졌어요.
그 이후 바로 중보기도훈련과정에 참여했지만, 여전히 복음을 알아듣지 못했어요. 아내와 교제를 시작하던 때였는데, 어떤 자매를 만나든지 결혼 전까지 지켜주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마음과 달리 계속 무너졌어요. 너무 괴로워 주님께 울부짖는 자리에서, 비로소 존재적 죄인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어요. 죄인이라는 사실이 제게 실제가 되니까 십자가 은혜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은혜인지 체감이 되더군요”
복음 앞에서 드러난 존재적 죄인
이제는 정말 자신을 주님께 드리며 나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홀로 되신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그즈음 세 가정이 모여 공동자본으로 카페를 개업했다. 어머니의 생활을 돌봐드릴 수 있겠다는 마음에 기쁘기도 했다.
“사실 하나님께 물었지만 응답을 받지 못한 채 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돌이켜보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면서 어머니의 삶은 제가 책임지겠다는 마음이 컸던 거죠. 실제로는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한 거였죠. 그런데 카페를 시작한 이후, 하루 일과에 매이다보니 신앙생활이 균형을 잃기 시작했어요. 진리의 말씀을 공급받지 못하면서 마음과 육체 모두 힘이 들었어요.
결혼 후 아내는 중보기도훈련을 받으며 복음의 삶을 기쁨으로 누리며 살아갔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어요. 마치 주님이 보호의 손길을 살짝 놓아버리고 방치된 것 같았어요. 1년간 일만 하면서 어둠의 골짜기에 있었어요. 동업이다보니 정리도 힘들었어요. 결국 양해를 구하고 목마름으로 다시 신앙훈련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면서, 주님이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시듯 저의 삶에 은혜를 부어주셨어요”
은혜로 한 걸음씩 순종하다보니 주님은 더욱 깊은 갈망을 주셨다. 이번에는 아예 6개월 동안 합숙하며 진행되는 공동체훈련을 받고 싶었다. 결혼하고 2년 동안 아이가 없었는데 주님께 아이를 주시면 순종하겠다고 사인을 구했다. 주님은 신실하게 응답하셨다. 너무 확실한 사인이었다.
“하지만 가지 못했어요. 아내 혼자 출산하게는 할 수 없더군요. 부르심은 명확한데 결국 응답하지 못한 저의 믿음 없음을 생각하면서 너무 괴로웠어요. 원형탈모가 생길 정도였죠. 그러나 ‘유보된 순종’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신다는 마음을 주셨어요. 아이를 낳은 후 지금 순종 못하면 다시 못하겠다는 마음이 들어 아내에게 허락을 구했어요.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강원도의 훈련학교로 들어갔어요. 하나님은 그분과 동행하는 신혼여행을 하는듯한 은혜를 주셨어요. 아내도 함께 이 걸음을 걸으면 정말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6개월 합숙훈련을 마치고 계속 복음의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불탄다고 해서 아내를 두고 홀로 달려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님은 둘째 아이를 허락하시고 아내와 가정을 섬기는 시간을 보내게 하셨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지만 셋째까지 허락해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따라오겠냐고 물으시는 듯 했다.
“그동안 순종하고 헌신하고 싶은 선교단체가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아내에게는 회복의 시간과, 조금 더 때를 기다려야한다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그러면 당장 어떻게 지금의 자리에서 순종할까 구하다가 아내와 함께 지역의 중보기도훈련과 선교훈련과정의 동역자로 섬겨왔어요. 아내에게도 이 길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 작년 1월부터는 주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믿음재정의 걸음을 걷게 하셨어요”
주님만 의뢰하는 믿음재정의 삶
세상의 모든 일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그분의 공급으로 살아가는 삶은 오래전부터 사모했던 삶이었다.
“마음은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지만 결정이 쉽진 않았어요. 그런데 6개월 공동체훈련 과정 중에 주님이 조용히 말씀하셨어요. ‘넌 나의 종이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훈련을 마치고 세상에 나와서 순종할 때마다 아내가 “우리가 선교사도 아니고 후원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냐”고 반문하더군요.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아웃리치를 나가기 위해 재정을 벌었어요. 그러던 중 2016년 말 기도모임에서 주님이 마음을 강하게 두드리셨어요.
그래서 2017년부터 믿음재정으로만 살 것을 결정했어요.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나 다른 누구에게도 구하지 않고 주님께만 구하기로 했어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싶은 갈망이 있었어요. 그해 1월, 네팔에서 진행된 복음학교를 섬기러 떠날 때 주님이 친히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했어요”
하지만 승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론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 부르며 바로에게 팔아먹은 것이나 다름없는 아브라함처럼 부끄럽고 초라한 모습도 있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셨다.
“작년 5월 셋째 출산을 앞둔 아내가 이번에는 꼭 산후조리원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둘째를 집에서 낳으면서 아이도 아내도 고생이 심했거든요. 기도하면서 ‘주님, 제가 두세 달만 일을 하겠습니다’ 말씀드리고 아르바이트를 구했어요. 3일 동안 교육을 받는데, 둘째 날이 되자 고민이 됐어요. 새벽에 시간을 정해놓고 열방기도를 하는데 자꾸 거르게 되면서 마음이 편치않았죠. 셋째 날도 아침부터 허겁지겁 나가는데 정말 주님을 신뢰하며 기도할 마음을 주셨어요. 그해 약속의 말씀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겠다’는 이사야 56장 말씀이었어요.”
<이상 복음기도신문 187호 게재>
말씀을 주시면서 주님은 다시 결단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 완전히 사진이 찍히는 순간이었죠. 그래서 그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다시 믿음재정의 삶을 선택했어요. 그날 오후에 지금 섬기는 교회에서 열방을 위한 24시간 기도에 기도자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 자리에 전심으로 나아갔어요. 그렇게 부끄러운 순종을 드리는데도 주님은 은혜를 누리게 하시고, 그 시간에 재정도 주셨어요. 제가 모르던 집안의 땅이 마침 정리되면서 필요한 재정이 공급된 것이죠. 우리의 필요들을 무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런 순종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됐어요.
그동안 수많은 은혜를 주셨는데도 얼마나 내 통밥과 계산으로 하는지 일일이 셀 수도 없어요. 그런데도 그때마다 얼마나 또 주님은 은혜를 주시는지요.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지만 이렇게 불완전하고 부족한데 한걸음 한걸음을 붙잡아 주시고, 여전히 고백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이 길을 가야 하는지 인도해주셨어요. 그 길을 가면 갈수록, 알면 알수록 더 자신감이 생기는 게 아니라 더더욱 겁이 나요.
그런데 정말 주님을 따라가는 것 외에 뒤돌아갈 길이 없어요. 설사 있다 해도 끊고, 주님 사랑 때문에 다른 길로 갈 수가 없어요. 어떤 은혜를 받았는데, 어떤 사랑을 받았는데요. 부끄러운 내 모습을 수없이 아시면서도 믿음의 길을 가게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더 주님의 사랑에 매여서 주님을 따라가는 길. 정말 더욱 가고 싶어요”
최근 수요예배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 그때 형제는 아내를 위해 이런 기도를 드렸다. ‘헌신해야 하는 부담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을 누릴 수 있게 도와주세요’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그 기도가 정말 제 기도인 것 같아요. 보여지는 어떤 헌신, 중압감, 도중에 돌아설까봐 드는 두려움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 사랑에 더 빠지게 해주시길 기도해요. 누군가는 저에게 ‘꼭 그렇게 헌신을 해야하느냐?’라고 물어요. 하지만 올림픽에 나가려면 어떻게 해서든 국가대표가 되려고 태릉선수촌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요? 어떠한 자리에서든 생명으로 살 수 있지만, 주님이 오시는 이때에 전폭적으로 마음을 드리며 나아가고 싶어요. 지금은 혼자가 아니라 대대적인 연합과 부흥을 이뤄야 할 때라는 마음과 함께 불러 주신 곳이에요. 전심으로 주님께 나를 드릴 마음이 있어요. 지금은 순종할 때이고, 복음의 삶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을 보면서 더욱더 마음이 간절해짐을 느끼고 있어요.
E.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