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 복음기도신문을 처음 만났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고심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한 초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 인간의 죄 값을 담당하고 십자가에 죽임당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즉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실제 된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 이것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대명을 군더더기 없이 담은 오직 복음을 말하는 신문이었다.
이 신문을 많은 사람이 봐야할 것 같아 30부를 신청했다.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돌렸다. 소심한 내가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돌리러 나가는 날, 내 심장은 기차소리마냥 쿵쾅거렸다. 그리고 자신 없이 쭈뼛쭈뼛 돌리고 온 날은 비참했다. 이 완전한 복음을 말하는 신문을 가짜 물건 팔 듯 돌린 내가 부끄러웠다.
생각다 못해 직장인 예배에서 아는 후배들에게 돌렸다. 그러자 신문이 나올 때 마다 꼭 달라는 고정 독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순간 전광석화처럼 스치는 생각. ‘직장인 예배에 250명이 모이니 이들 또한 반응이 동일하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쉽게 가는’ 각종 표현들이 떠올랐다.
땅 짚고 헤엄치기? 손 안대고 코 풀기? 희열 자체였다. 업(up) 되기 잘 하던 베드로처럼 바로 복음기도신문 측에 전화를 걸었다.
“200부를 보내 주세요.” 잠간의 침묵에 이은 답변. “우선 100부만 해 보시죠.” 그랬다. 믿음재정으로만 만드는 가난한 신문사라더니 재정이 허락 안 되나? 생각하며 불만스럽게 알았다고 했다.
100부를 중앙 통로 양편에 놓인 테이블에 주보와 함께 펼쳐 놓았다. 예배 후에 보니 30부 정도가 아니라 정확히 30부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다음번에도 정확히 30부가 남았다.
그 다음에는 직장 후배 중 상냥한 후배를 시켜 주보와 함께 강제로 손에 들려주었다. 다 돌렸다. 흐뭇해하며 예배드리고 보니 또 30부가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경악했으나 당연한 결과였다. 억지로 쥐어 줬으나 원치 않는 사람이 예배 후 놓고 간 것이며 신문을 사모하여 보는 사람이 정확히 70인이었던 것이다. 예배인원이 줄어드는 때 몇 번을 제외하고는 지금껏 꼬박꼬박 주님이 30부를 남겨 주신다.
여전히 나는 남은 신문을 돌릴 때 심장에 부담을 느낀다. 주님 오실 때까지 내 심장이 무사할지 모르겠다. 마라나타. [복음기도신문]
조희자 집사(남대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