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의 촉망받는 법학도였던 마틴 루터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심판에 대한 공포와 같은 원초적인 고민을 가진 청년이었다.
당시 루터는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돈을 잘 버는 직업을 갖기 위해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루터는 부모님을 찾아뵙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 들판에서 쏟아지는 폭우와 천둥번개를 만나며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는 그 폭풍을 하나님이 자기 영혼 위에 내리시는 심판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땅 바닥에 엎드려 주님이 아닌 수호성인의 이름을 불렀다. “성 안나(Saint Anne)여, 나를 도우소서. 살려만 주신다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그는 서원대로 수도사가 되었지만 그의 고뇌는 사라지지 않았다.
수도원장은 루터가 자신의 고뇌를 이겨 낼 수만 있다면 교회에 큰 공헌을 할 가능성이 있는 재목감으로 봤다. 수도원장은 루터가 교황청을 방문하면 그의 영혼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날 것을 지시했다. 루터는 그러나 로마에서 온갖 위선과 겉치레와 궤변이 난무하는 추악한 모습을 발견했다.
로마 순례는 그에게 교회에 대해 더욱 큰 환멸감을 안겨 줬다. 그러자 수도원장은 루터를 다른 곳에 보내 신학 공부를 하게 했다. 왜냐하면 루터가 공부하기에 바빠 고질적인 자기 점검을 할 시간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처방도 루터의 병을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루터는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신학 강의를 시작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을 읽고 다시 바울의 글을 읽게 되었다. 바울은 불의한 자였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를 요구하셨다. 이해할 수 없는 딜레마였다. 루터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발견하지 못하다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로마서 강해 수업을 맡으며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렇게도 갈급하며 찾던 ‘하나님의 공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7절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만연한 문제점을 지적한 반박문을 비텐베르크대학 정문에 내 걸었다.
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루터에 대한 영향력을 잠재우기 위해 로마 가톨릭은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독일 분회에서 그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혀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는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십자가 신학’을 발표한다. 이 세상의 화려함과 권력을 추구하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영광의 신학’ 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루터는 바울에게 계시된 복음을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와 철학과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보다 더 어리석고 공격적이다.
십자가는 영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걸려 넘어지는 돌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학자는 가시적이고 분명한 것들로부터 논하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 숨어계시는 방식인 십자가로부터 배우는 자”라고 주장한다. [GNPNEWS]